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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사적 계획이 우리 존재를 규정한다. 직업, 결혼, 여가시간의 관심사, 자녀, 재산에 관한 계획이 우리를 앞질러 달린다. 그러나 때로 이 지도를 들여다보고 길을 건너고 표지를 따라가다 보면, 이상하게도 예측 가능한 여정과 너무 정확한 지도의 모습, 어제 지나온 길과 오늘 걸을 길이 상당히 닮아 있다는 느낌 같은 것이 걸음을 방해한다. 이게 정말 내 인생이 나아갈 길일까? 어째서 매일의 여정이 지루함, 타성, 판에 박힌 느낌을 안겨주는 걸까? - 코헨, 테일러,<도피 시도>(1992)

최근의 일이다. 일과 관련한 선택의 순간이 생겼다.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의문이 들었다. 왜 인생의 모든 계획은 일과 연관되고, 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일까? 중요한 인생 계획들은 대부분 일과 연관된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인간의 삶이란 왜 이리도 똑같은가 싶을 때가 있다. 무언가 획일적일 삶을 사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런 생각들은 바쁜 일상과 마주하고 나면 금세 지워진다. 현대인에게 바쁘지 않다는 것은 마치 '죄악'과도 같다.

우리가 일에서 벗어나는 삶을 상상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곧바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다. 실업은 공포를 안겨주고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모멸감을 안겨준다. 실업은 곧 실패자로 낙인찍는다. 이러한 실패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급노동은 당연시된다.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일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일하지 않을 권리>표지
 <일하지 않을 권리>표지
ⓒ 동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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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을 권리> 저자 데이비드 프레인은 유급노동 사회에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할까? 그 속에 과연 진정으로 나다운 삶이 있는 것일까? 발달한 산업사회 속에서 문화적, 윤리적, 정치적 삶에서조차 일이 중요하다고 칭송하며, 취미나 여타 활동, 사회 기여의 활동이 등한시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기술발전에 따라 일자리의 수요는 변해왔고 사라지거나 새롭게 생긴 일자리도 많지만, 사회는 계속해서 일자리를 만들어 내야만 한다. 일자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회가 일자리를 계속해서 만들어야 할 만큼 일 자체가 그렇게 대단한가 하고 말이다.

저자의 말처럼 생산성이 극도로 발달한 산업사회에서도 여전히 모두가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더 이상 평생 일하며 살라는 강요를 당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 밖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저자에 따르면 전통적 사회 또는 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필요를 채울 정도로만 일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돈을 더 벌어들이기보다는 자기에게 맞는 방식으로 살기를 바라며, 그 목적을 이루는데 필요한 만큼만 벌기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추수하는 이에게 더 높은 임금을 제시하면 그는 같은 시간에 얼마나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가 아니라, 이전 수준만큼 벌면서도 일하는 시간을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를 계산했다는 것이다. 금전적 보상을 높이기보다 자유시간 확보가 최종 목표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에 대한 인식은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급격히 변했다.

미국의 사회학자 대니얼 벨은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는 모두들 더 이상 '어떻게 일하고 성취할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고 '어떻게 소비하고 즐길 것인가'에 골몰한다고 주장한다. 저자에 따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방탕과 도피는 문화적 금기가 아니라 오히려 집요하게 장려하는 덕목이다. 하지만 그 즐거움을 누리려면 일에 더 강하게 매달려야 한다. 어느덧 소비가 골치 아픈 일에서 벗어나게 하는 종교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고민하는 질문들은 우리가 일을 거부하고 일에서 완전히 벗어나자는 의미가 아니다. 모두가 적게 일하고, 스스로 자율적 자기계발에 쓸 시간이 더 많은 삶을 고민해보자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무척 이상한 일이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노동절약 기술도 비약적으로 상승했다. 기술혁신으로 더 빠르게 더 편리하게 물건을 생산해낸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생산량은 정점을 찍고 있지만, 생산량이 정점에 달한 현대에도 우리는 더 많은 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존 메이너 케인스는 생산기술 진보에 따라 노동시간이 줄어 인구 전체가 더 적게 일할 것이며, 2030년이면 주 15시간까지 줄어들 것이라 예측했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은 오히려 그 반대가 되었다. 정시 퇴근이 자유롭지 못한 환경이 '칼퇴근'이란 말을 만들어냈고, 퇴근 후에도 메신저를 통해 업무에 시달린다. 오죽하면 퇴근 후에 메신저로 업무지시를 금지하는 법이 마련되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스스로의 선택하거나 건강 악화로 인해 노동을 저항하고 있는 이들의 삶을 조명하며 대안적 삶에 대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당장 노동으로부터 벗어난다면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 또는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 여기기 쉽지만, 그들은 적게 소비하고 여가를 여가답게 활용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경제적 여유는 공포스럽다. 하지만 일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에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이들의 삶이 완벽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그들 개인의 선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폴 랜섬의 말을 인용하며 사람들이 계속해서 노동에 참여할 의지를 그토록 강하게 표현하는 원인은 다른 대안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라 말한다. 우리가 일할 필요를 느끼는 데는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도덕적 선택이 강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일을 해야 하며 다른 대안이 없다고 여기는 인식이야말로 우리를 끊임없는 노동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노동시간 단축이라는 사회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다면 저자가 말한 삶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니다.

또 저자는 다른 대안으로 기본소득제를 언급한다. 기본소득제를 놓고도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기본소득제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나태하고 게으른 사람들을 양산해낼 것이란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일에 관해 밝히고 있는 견해와 일과 연결된 정치, 소비문화를 들여다보면 기본소득제마저 지나치게 일의 관점에서 바라본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인간은 어째서 자발적 자기계발에 시간을 쏟지 못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고통스러운 노동에 시달려야만 하는 것일까.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여가는 다시 일하기 위한 휴식의 시간이다. 여행을 떠나는 것도 긴 노동에 대한 보상심리이며, 우리가 누리는 여가도 서비스 산업의 소비로 이어지고 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여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서두에 인용한 코헨, 테일러의 말처럼 우리의 여정은 너무나 틀에 박혀있다. 저자가 주장하는 노동시간 단축의 노력은 모두가 더 적게 일하며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해내기보다 일자리를 공유하고, 일에서 벗어난 대안적 삶에 대해 말한다.

일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일-생활 균형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일에 대한 보상심리로 누리는 휴식이 아닌 진정한 휴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상상해보라. 일에서 벗어나 자발적 자기계발에 힘쓸 수 있는 삶을. 일에 대한 저항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양극화와 직업의 서열화,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며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에 중복 게재 하였습니다.



일하지 않을 권리 - 쓸모없는 인간에 대한 반론

데이비드 프레인 지음, 장상미 옮김, 동녘(2017)


태그:#유급노동, #일하지않을권리, #노동시간단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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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상가 입니다. 블로그 "사소한 공상의 세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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