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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갈 물린 제도권 언론들

민청련 운동이 활성화되면서 제기된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언론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면서부터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을 없애기 위해 '언론 통폐합'을 시행했었다. 그 결과 중앙일간지의 경우에는 이른바 '조중동'이라고 부르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3개 신문사의 독점체제가 구축되었고, 방송의 경우에는 동양방송, 동아방송 등이 사라지고 한국방송공사(KBS)와 문화방송(MBC) 2개 방송으로 정리되었다. 

여기에 '언론기본법'을 제정해 정부가 언론사 설립 허가제를 실시하고 기존에 허가된 언론사의 허가를 취소할 수 있는 조항을 두었다. 따라서 언론은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권력 앞에서 설설 기었다. 당시 국민들은 TV 방송의 9시 뉴스를 '땡전 뉴스'라고 비아냥거렸다. 매일 저녁 9시 정각, TV에서는 "뚜, 뚜, 뚜, 땡!"하고 시보를 울리면서 뉴스를 시작하는데, 하루도 빠짐없이 오프닝 멘트는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방송이 정부의 홍보기관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보도한 1980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
 전두환 정권의 언론통폐합 조치를 보도한 1980년 11월 15일자 [동아일보] 1면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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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언론들은 야당의 의정활동에 대한 보도조차 가능하면 소략하게 다룰 뿐이었다. 김대중, 김영삼과 같은 정치 활동 금지 조치 아래 있던 이들에 대한 보도는 '보도지침'에 의해 철저하게 금지됐다.

앞서 1983년 5월, 정치 활동금지에 묶여 있던 김영삼이 전두환 정권의 탄압에 대한 저항으로 무려 23일에 걸친 단식투쟁을 벌였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언론에도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래도 양심이 있던 기자와 데스크는 '보도지침'을 피하여 보도할 방법을 찾다 보니 수수께끼와 같은 기사를 써내기도 했다. 신문 구석의 작은 가십난에 "최근 '정세 흐름'과 관련, 정가 일각은... 신경을 쓰는 눈치"라는 식이었다. 심지어 "모 재야인사의 식사문제"라는 웃지 못할 표현도 있었다.

이러한 언론 상황에 대해 가장 큰 문제의식을 가진 이들은 80년에 해직된 언론인들이었다. 이들은 1984년에 '민주언론운동협의회(약칭 민언협)'을 만들었다. 그리고 1985년에 정부의 간섭을 거부한 대항언론으로서 월간 <말>을 창간했다.

운동의 진로를 밝힐 기관지

그에 앞서 1984년 초부터 민청련 내부에서는 대항언론의 필요성을 검토하고 있었다. 민청련이 지향하는 것은 민언협의 '대항언론'과는 결이 약간 달랐다. 월간 <말>이 제 역할을 못 하는 기존 제도언론에 대한 비판과 대안으로 모색되었다면, 민청련은 학생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빈민운동 등 각 부문 민주화 운동 소식을 운동세력 내부에서 서로 소통하는 것을 더욱 중시했다. 나아가 당면 정세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정세분석'을 운동세력들이 공유할 필요성, 운동세력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다양한 논쟁들을 정리할 필요성 등이 절실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민청련 집행부는 기관지의 형태로 <민주화의 길>을 발간하기로 결정한다. 정권의 시각에서 이는 '불법 유인물'일 것이었고, 당연히 탄압해올 것이 뻔했기 때문에 편집부는 공개되지 않는 비밀조직으로 만들어져야 했다.

그 임무를 맡은 이는 당시 상임위 부위원장 이해찬이었다. 이해찬은 성균관대 73학번 김희상에게 편집장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김희상은 이후 민청련 집행부로 진출해 대변인을 맡았으며 김근태와 함께 옥고를 치렀다. 그 후유증 때문이었을까, 2011년 아직 한창일 나이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당시 김희상은 직장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의 길> 편집에 전념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대 78학번으로 이른바 '제헌의회' 그룹의 이론가로 맹활약했던 최민에게 편집 진행을 맡겼다. 최민은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었지만, 선후배 편집진들을 지휘하며 <민주화의 길> 창간의 산파 역할을 했다.

마침내 1984년 3월 11일, <민주화의 길> 창간호가 발행됐다. A4용지 크기의 갱지 20페이지를 흑백으로 인쇄한 뒤 중철로 제본한 소박한 간행물이었지만, 이를 받아본 편집진들은 그동안의 고생을 되돌아보며 감개무량해 했다.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창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왼쪽부터) 이해찬, 김희상, 최민
 민청련 기관지 [민주화의 길] 창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왼쪽부터) 이해찬, 김희상, 최민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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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표지는 두꺼비를 중심으로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농민군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을 목판에 새긴 뒤 판화로 찍은 것이었다. <길>은 폐간할 때까지 이 표지를 일관되게 사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판화를 민청련 깃발로 만들어 집회 때마다 사용하여 두꺼비가 민청련의 상징이 되었다.

권두언은 김근태 의장이 '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들며'라는 제목으로 썼다. 이 글에서 김 의장은 <민주화의 길> 임무로 5가지를 들었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의 방향 제시, 정확한 정세분석, 운동권 내부의 동질성 확보, 관제언론이 보도하지 않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건의 보도, 다른 운동세력과의 연대' 등이었다. 이후에도 권두에는 논단, 논설 등의 항목으로 당면 정세에 대한 민청련의 견해를 밝히는 글이 실렸다. 대개는 김근태 의장이 썼으나, 때로는 다른 집행부 또는 김병곤, 이범영 등 비공개 간부가 작성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서 당시 민주화운동 전체를 이끌던 지도자 문익환 목사의 격려사, 신경림 시인의 축시가 실렸다. 그리고 정세분석, 민주화 동향이 이어졌다. 이후 <민주화의 길>의 편집체제는 대체로 이러한 형태를 유지하며 발간되었다. 발간 주기는 일정하지 않았는데, 대략 2, 3개월의 간격을 두고 발간되었다.

3호부터는 편집진이 보강돼 일선 기자 출신으로 민청련 활동에 참여하고 있던 진재학, 백현기, 김선택 등이 참여했다. 이로 인해 <민주화의 길>은 기관지로서의 틀과 격식을 제법 갖추게 됐다. 

정보기관은 <민주화의 길> 발간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3월 14일, 서울 인사동 입구 파고다빌딩 5층 사무실에서 일을 마치고 퇴근하던 김근태 의장은 종로경찰서 소속 10여 명의 수사관들에 의해 강제 연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연행을 거부하는 김 의장은 심한 구타를 당했다.

민청련 집행부는 '올 것이 왔다'고 느꼈지만, 강력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이튿날, 집행부는 김 의장을 즉각 석방하고 부당한 강제 연행에 대해 내무부 장관이 사과하고 종로경찰서장과 수사관들을 처벌할 것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민청련 측의 강력한 반발이 있자 정권 측은 며칠 지나지 않아 김 의장을 슬그머니 석방했다.

 1984년 한 해 동안 6호까지 발행된 [민주화의 길] 표지들
 1984년 한 해 동안 6호까지 발행된 [민주화의 길] 표지들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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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앞에서 설명했듯이 4·19행사와 5·18기념식 이후에도 민청련 간부 및 회원들에 대한 폭행사태가 되풀이되었다. 바야흐로 민청련은 정권에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권의 탄압이 있었지만, 비공개된 <민주화의 길> 편집부는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은 채 다음 호 작업을 계속했다. 그래서 2차 총회가 끝난 뒤인 4월 25일에 제2호를 발행했다. 이 2호는 권두 논설에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 – 기만적 화해정책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실천'을 실었다. 당시 학생 운동권 내부를 뜨겁게 달구고 있던 복학조치에 대한 논쟁을 민청련의 시각에서 정리한 글이었다. 정권이 화해 제스처를 보이는 이유를 분석한 뒤 운동세력이 준비해야 할 것으로 '한 개의 칼'과 '두 개의 방패'를 제시한 것이다.

한 개의 칼이란 '국민 대중의 편에 서서 민주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해나가는 것'이며, 두 개의 방패란 '운동의 조직력을 강화함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쓰라린 시련에 무릎 꿇지 않도록 준비하는 것'과 '기층 대중과의 구체적인 연대'를 통해 '민중운동의 토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 논설은 민청련 회원뿐만 아니라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각 부분의 활동가들에게 널리 읽혔다. 이때부터 <민주화의 길>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정세분석의 안목을 길러주는 일종의 지침서 역할을 하게 된다.

80년대에 전국 각 대학 앞에는 대개 서점이 한 군데는 있었는데, 이들을 '사회과학 서점'이라고 불렀다. 학생운동가들 사이에서 읽히는 진보적 사상을 담은 책들을 주로 판매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점은 단순히 서적 판매의 장소가 아니라 학생운동가들이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소통하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화의 길>에 대한 인기가 높아지자, 이들 서점에서 <민주화의 길>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물론 <민주화의 길>은 정부에 등록된 간행물도 아니고, 출판사를 통해 발간된 공식 서적도 아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서적 유통경로인 서적 도매상을 통해 배본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민청련 집행부 안의 사무국에서 직접 서점으로 <민주화의 길>을 배본하고, 정기적으로 그 대금을 수금하는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민청련의 재정에 약간이나마 도움을 주는 판매상품이 된 것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978년 이해찬이 문을 연 서울대 앞 광장서적. 1982년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건국대 앞 인서점. 1985년 문을 열어 아직도 운영 중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
 (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1978년 이해찬이 문을 연 서울대 앞 광장서적. 1982년 최초의 사회과학 전문서점인 건국대 앞 인서점. 1985년 문을 열어 아직도 운영 중인 성균관대 앞 풀무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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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만 열사를 살려내라!'

1984년이 저물 무렵인 11월 30일, 민청련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에 있는 택시회사 민경교통의 택시기사 박종만씨가 분신자살했다. 노조 대의원이었던 그는 노조원 해고와 부당한 노조탄압에 항의하며 회사 마당에서 농성하던 중 막무가내로 노조를 무시하던 회사에 분노하여 분신자살로 항거한 것이었다. 

민청련은 이 소식이 알려지자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다. 14년 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전태일이 분신한 것과 판박이 사건이었다. 김근태 의장, 김희택 운영위원장, 권형택 사회부장 등 민청련 집행부는 박종만의 시신이 안치된 신촌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로 달려갔다. 민주통일국민회의의 장기표, 청계피복노조의 김영대, 노동자복지협의회 방용석 등도 달려왔다. 그들은 경찰이 시신을 탈취해갈 것을 막기 위해 영안실로 들어가려 했으나 전경들에 막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자 영안실 앞 공터에 50~60여 명이 자리 잡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새벽에 전경의 체포 작전이 개시되고 민청련 집행부는 온몸을 던져 거기에 맞서 싸웠다. 전경은 민청련 집행부 등을 닭장차에 던져 넣고 군홧발로 짓밟으며 구타한 뒤 최루탄을 터뜨리고 문을 닫아버렸다. 많은 이들이 부상을 당했고, 그 상태로 김근태 의장, 김희택 운영위원장, 안희대 집행국장, 박우섭 사무국장, 권형택 사회부장이 경범죄로 구류를 선고받았다. 경찰은 민청련 회원들의 항의 방문을 피하기 위해 이들을 서울 시내 각 경찰서 유치장에 분산 수감했다.     

결국, 시신은 탈취당해 강제로 화장당한 뒤 묘지에 안장됐다. 하지만 민청련은 투쟁을 이어나갔다. '박종만 열사 추모위원회'를 범민주단체로 구성하고, 추모제를 열기 위해 노력했다. 12월 13일 홍제동 성당에서 추모제를 열기로 했으나 당일 경찰이 성당을 원천봉쇄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그러나 민청련 회원들은 성당 부근에서 주민들에게 '박종만 열사 살려내라' '폭력 정권 물러가라'는 유인물을 나누어주고 전단을 배포하며 박종만 열사의 죽음을 알렸다. 그리고 밤에는 시내 종로1가에서 학생들과 함께 야간시위를 감행했다.

이렇게 민청련은 자칫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묻힐 수도 있는 사건들을 사회문제화하고, 그것을 통해 정권의 반민주성과 폭력성을 드러내게 하는 활동을 펼쳤다. 이는 또한 민청련이 주장하는 기층민중을 운동의 중심에 두는 민중 노선에 충실한 것이기도 했다.

 박종만 열사를 표지로 실은 [민중생활소식] 2호(왼쪽)와 박종만 열사 합동추도식 양면 안내지(오른쪽)
 박종만 열사를 표지로 실은 [민중생활소식] 2호(왼쪽)와 박종만 열사 합동추도식 양면 안내지(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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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유인물 배포 전술들
 
민청련 회원들의 활동은 집행부가 개최하는 집회에 참석하는 것이 주된 것이었지만, 일상적인 홍보 활동도 중요한 임무였다. 당시 언론은 철저하게 정부의 검열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운동세력의 주장을 대중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직접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래서 대학별로 조직된 민청련 계반원들은 집행부에서 만든 유인물을 전달받아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에게 할당된 지역에 배포하는 작업을 했다.

이때 경찰에 검거되지 않아야 했기 때문에 기발한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가장 많이 한 활동은 유인물을 편지봉투에 넣어 야간에 주택가를 돌며 일일이 우편함에 넣는 것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골목길에서 갑자기 사복형사나 정보기관원을 맞닥뜨리지 않을까 노심초사해야 했기 때문에 심장이 떨리는 작업이었다. 그만큼 무사히 일을 끝냈을 때는 뿌듯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낮에 거리에서 배포하는 방법으로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정류장이 가까워 오면 천정 환기구를 열고 바깥에 유인물을 올려놓고 내리는 것이 있었다. 그러면 버스가 출발하면서 유인물이 바람에 날려 저절로 길가에 뿌려지는 효과가 있었다.

이러한 활동을 거듭하면서 신기술이 개발되기도 했다. 세로로 긴 플래카드를 유인물과 함께 두루마리처럼 말아 접은 다음 비닐 끈으로 묶고 그 매듭에 쑥담배(일반 담배 개비에서 담뱃잎을 빼내고 대신 한약방에서 구한, 솜같이 생긴 뜸쑥을 채워 넣은 것)를 묶어 놓는다. 이것을 시내의 빌딩에 가지고 올라가 5, 6층 정도 높이의 창문 밖을 향해 장치하고 쑥담배에 불을 붙인 뒤 내려와 건물 밖으로 나온다. 그 사이에 쑥담배는 천천히 타들어 가서 비닐 끈을 끊게 되고 플래카드가 건물 벽면으로 펼쳐지면서 그 안에 있던 유인물이 공중에 흩뿌려진다. 이 방법은 특히 큰 가두집회를 앞두고 그 부근에서 사전에 실행하여 집회를 대중들에게 공지하는 효과로 많이 사용되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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