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4년 2월 HCRF 컨퍼런스 연단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배우 엘렌 페이지.

지난 2014년 2월 HCRF 컨퍼런스 연단에서 커밍아웃을 하고 있는 배우 엘렌 페이지. ⓒ HCRF


"여러분은 서로 조금만 덜 못되게 굴어도 세상이 훨씬 나아지리란 믿음으로 여기에 모였어요. 서로의 차이점을 공격하는 대신, 5분만 투자해 서로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아요. 그게 오히려 더 쉽게, 더 나은 삶을 사는 방법이죠. 궁극적으로, 생명을 구하기도 하고요."

지난 2014년 2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인권 캠페인'(The Human Rights Campaign) 컨퍼런스 연설에서 자신의 성정체성을 밝혔던 배우 엘렌 페이지. 그는 당시 "오늘 여기 선 이유는 내가 게이이기 때문"이라고 운을 뗀 뒤, "다른 (성소수자들) 이들이 좀 더 다르고 쉽게, 그리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돕고 싶었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인 책임과 의무감도 느껴왔다"는 연설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한 바 있다.

하지만 커밍아웃 전까지, 엘렌 페이지는 얼마나 많은 나쁜 공격과 차별에 시달려야 했을까. 지난 10일(현지시각) 엘렌 페이지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와 관련된 피해 사실을 털어놨다. 지난 2006년 자신이 출연한 <엑스맨 : 최후의 전쟁>의 감독 브렛 래트너로부터 들었던 성희롱과 여타 할리우드에서 겪은 성희롱과 성추행 경험을 장문의 글을 통해 고백한 것이다(https://www.facebook.com/EllenPage/posts/10155212835577449).

"그녀가 '게이'(레즈비언)인 걸 깨달을 수 있도록 네(엘렌 페이지)가 그와 섹스를 해야 겠다." ("You should fu*k her to make her realize she's gay.")

브렛 래트너가 지난 2005년 영화 촬영 전 행사에서 당시 18살이던 엘렌 페이지에게 했다는 말이다. 브렛 래트너가 엘렌 페이지보다 10살 넘는 선배 연기자를 가리키며 했다는 이 말은 소위 명백한 '아우팅(본인은 원하지 않는데, 성소수자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강제로 밝혀지는 일)'에 해당한다. 다른 사람이 증언하는 당시 분위기도 이와 같았다고 한다. 같은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 안나 파킨은 최근 트위터를 통해 "내가 그 자리에 있었고 그 말을 들었다"며 "나는 네 편이다"란 글을 남기며 응원하기도 했다.

엘렌 페이지는 또 촬영 내내 브렛 래트너가 저속한 언행을 일삼았다고 밝혔다. 이미 브렛 래트너는 배우 나타샤 헨스트리지, 올리비아 먼 등 6명으로부터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바 있다. 엘렌 페이지는 이어 10대 때 한 감독으로부터 당한 성추행과 다른 감독이 한 남성과 잠자리를 할 것을 요구했다고 추가로 밝히기도 했다. 

엘렌 페이지의 경우, 장문의 글을 통해 자신이 겪은 피해 경험과 이로 입은 정신적 피해는 물론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차별에 관해 구체적이고 진중하게 의견을 피력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파문 이후, 수많은 피해자들의 고백과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반면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의 대응은 천차만별이다.  

루이스 C.K.의 사과

 배우 케빈 스페이시, 1980년대에 동성 아역배우 성추행 의혹

배우 케빈 스페이시, 1980년대에 동성 아역배우 성추행 의혹 ⓒ EPA/ 연합뉴스


케빈 스페이시나 더스틴 호프만처럼 소셜미디어나 언론을 통해 사과한 경우도 있지만, 가해자로 지목되고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외신에 따르면, 브렛 래트너 역시 엘렌 페이지의 주장에 아무런 답을 내놓고 있지 않다. 법률대리인을 통해 "소송 혹은 배상 요구를 받은 적이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2000년대 연속해서 저지른 성추행으로 미 검찰에 기소된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루이스 C.K.의 사과문은 꽤나 이례적이다.

지난 9일(현지시각)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 따르면, 지난 2002년 루이스 C.K.는 한 코미디쇼가 끝난 뒤 여성 코미디언들을 자신의 호텔 방으로 초대해 '자위행위를 해도 되느냐'고 물은 뒤 실제로 옷을 벗고 음란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포함해 루이스 C.K는 총 5명의 여성 코미디언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거나 '행위를 해도 되느냐'고 물어 수치심을 준 것으로 밝혀졌다.

루이스 C.K.는 수차례 에미상을 수상한 미국의 유명 스탠딩 코미디언이다. CBS <데이비드 레터맨 쇼>의 작가로 데뷔해 스탠딩 코미디언으로 발돋움했으며, 사회 전 분야에 걸친 거침없는 발언으로 유명하다. 국내에서도 그의 코미디는 유튜브 동영상과 넷플릭스를 통해 호응을 얻은 바 있다.

지난 11일 루이스 C.K.는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그는 "이 이야기는 실제"라며 피해 여성들은 물론 자신의 가족, 자신과 오랜 시간 함께 함 매니저에게도 사과했다. 루이스 C.K.는 "내가 가진 권력이 피해 여성들로 하여금 날 동경하게 만들었고, 내가 그 권력을 무책임하게 휘둘렀다"며 가해 사실을 인정했다.

 넷플릭스에 공개된 루이스 C.K.의 코미디쇼.

넷플릭스에 공개된 루이스 C.K.의 코미디쇼. ⓒ 넷플릭스


또 그는 진심으로 반성한다며 "내 길고 운이 좋았던 경력에서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지낼 수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뒤로 물러나 타인의 말을 들어줄 때인 것 같다"며 잠정 은퇴를 암시하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루이스 C.K.의 경우 사회적인 발언이나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된 발언도 주저하지 않았기에 팬들이 가지는 충격은 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실제로 소셜미디어 상에서는 과거 그의 발언을 예로 들며 '앞으로 그의 쇼를 보기를 원치 않는다'는 반응도 상당수다.

가해자로 지목된 다수 남성들이 침묵으로 일관하거나 법률 대리인을 앞세우며 법적인 대응을 우선시하고 있다. 심지어 케빈 스페이시처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면서 순간을 모면하려 했던 경우까지 나왔다.

"권력을 남용했다"며 순순히 자신의 가해 사실을 인정한 루이스 C.K.의 입장 발표가 그나마 "솔직하다"는 반응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루이스 C.K.가 자신도 알고, 상대방도 알았던 그의 권력 남용을 인정했다는 사실일 것이다. 

엘렌 페이지의 호소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이러한 일련의 폭로와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캠페인은 여성에게 가해진 남성의 폭력을 경계하고 근절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오랫동안, 아니 지금도 권력을 쥔 남성들이 행하고 있는 성폭력을 포함한 전방위적인 폭력을 근절하려는 움직임 말이다. 루이스 C.K.가 명백히 밝힌 대로, 본인도 알고 피해자들도 인지하고 있었던 그 '업계 내 남성 권력' 말이다.

이와 더불어, 자신이 성 정체성에서 비롯된 경험을 고백한 엘렌 페이지는 한발 더 나아가 "(이성애자들보다) 더욱 심한 폭력과 차별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다른 많은 소수자들의 고백에도 지지를 보내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백인 레즈비언'인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언급하기도 한 엘렌 페이지의 호소는 결국 지속적으로 폭로되고 있는 남성 가해자들의 성폭력을 포함해 이 모든 폭력의 핵심이 전방위적인 권력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을 꼬집은 것이다. 이렇게 성 소수자인 엘렌 페이지가 한층 더 넓은 시각을 제시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추문 파문과 이를 계기로 이어진 여성들의 성폭력 고발 운동인 '미투' 캠페인은 현재 진행형이다. 미 연예계를 넘어 미국 사회 전반과 타국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영국과 오스트리아 정계까지 잇따른 성추행 폭로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소식이다.

실질적인 '거부' 움직임도 일어나고 있다. 최근 <원더우먼>의 주연 배우인 갤 가돗은 시리즈에서 브렛 래트너가 참여할 경우 출연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 케빈 스페이시는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시리즈는 물론 여타 출연작에서도 완전히 '아웃' 당하는 수모를 겪는 중이다. 전 세계에 파장을 미치고 있는 성폭력 고발 운동의 힘이 어디까지 미칠지 전 세계인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

엘렌페이지 루이스C.K. 미투캠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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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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