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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알고 있는 망원동은 무엇인가요?

망리단길로 유명한 지금의 망원동은 카페와 음식점이 가득한 서울의 핫플레이스가 되어 있습니다. 망원역에서 망원시장에 이르는 길과 한강으로 연결되는 도로에는 젊은 청춘과 그들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카페가 가득합니다.

그러나 지금의 망원동에 대한 또 하나의 기억은 물난리와 쓰레기 산입니다. 제법 나이 있는 사람들에게 망원동에 산다고 하면 제일 먼저 들려오는 말은 '아, 물난리 났던 곳'이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리고 난지 쓰레기 매립장.

그런 그곳이 어떻게 지금의 망원동으로 바뀌어 왔는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이 마을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그 문화적 간극을 찾아 가게 되었습니다.

망원동에서 망리단까지

서부분뇨처리장 망원동에 들어섰던 분뇨처리장, 망원동 일대는 쓰레기와 분뇨처리장 등 산업화 폐기물이 버려지는 장소였다.
▲ 서부분뇨처리장 망원동에 들어섰던 분뇨처리장, 망원동 일대는 쓰레기와 분뇨처리장 등 산업화 폐기물이 버려지는 장소였다.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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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산업화의 발달로 서울은 고도성장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고도성장의 그늘에는 성장의 폐기물들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쓰레기와 분뇨들, 그 산업폐기물을 고스란히 받아 안고 살아온 곳이 바로 이곳 망원동 주변이었습니다. 망원동 일대의 분뇨처리장과 난지쓰레기장, 그리고 지금의 문화비축기지가 된 석유비축기지가 있었지요.

이렇듯 폐기물과 악취가 흐르던 망원동, 그 망원동이 변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망원동 변화의 불꽃은 무엇으로 폭발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1984년의 수해, 그리고 망원동 물난리 사건으로 인해 벌어집니다.

1984년 9월, 그 해는 전국적으로 내린 폭우로 엄청난 수해가 발생합니다.

'1984년 9월 1일과 2일에 걸쳐 서울과 중부 및 강원 지방에 쏟아진 350㎜의 폭우로 인해 불어난 한강의 첨두 시간과 광명시를 관통하는 안양천·목감천 유역의 첨두 시간이 24시간을 두고 교차하면서 서해로 미처 배출되지 못해 한강의 역류가 시작되었다. 이로 인해 광명시 일원의 안양천·목감천 주변을 포함하여, 서울 지역의 저지대인 성내동·망원동 일대가 침수되면서 전국에 걸친 대규모 수해가 발생하였다.'
(출처:디지털광명문화대전 http://gwangmyeong.grandculture.net/Contents?local=gwangmyeong&dataType=01&contents_id=GC03100049)

당시 망원동 유수지가 무너진 사진 망원동 유수지가 붕괴된 것을 알려낸 신문기사
▲ 당시 망원동 유수지가 무너진 사진 망원동 유수지가 붕괴된 것을 알려낸 신문기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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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해로 공사 중이던 망원동 유수지 제방이 유실되었습니다. 유실 순간 누수가 되는 것을 마을 사람들이 신고하였으나, 구청에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고 오히려 별일 없을 테니 집에서 방송을 들으며 기다리라는 답변뿐이었습니다.

결국 제방둑이 터지면서 물길은 망원, 서교, 성산, 합정동 등을 덮치며 5000여 가구가 침수되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가슴까지 차는 물난리를 피해 기본적인 가재도구도 챙기지도 못하고 급하게 피난길에 오른 주민들은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에 바빴습니다. 당시 중동의 중동초등학교에만 3000여명 가까운 주민이 대피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니 이 수해의 참상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수해를 피해 대피하는 망원동 주민들 1984년 망원동 수해시 피난가는 기사 사진
▲ 수해를 피해 대피하는 망원동 주민들 1984년 망원동 수해시 피난가는 기사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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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로만 알았던 이 일이 인재라고 주장하며 서울시를 비롯한 국가의 책임을 주장하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청년 조영래 변호사였습니다. 조영래 변호사는 신문기사를 접한 뒤 이 사건에 대한 인재 가능성을 의심하며 소송단을 모집하였습니다. 최초 5명의 소송단으로 시작한 소송은 6년여의 긴 시간 끝에 3700여 명이 모이는 소송단이 꾸려졌습니다.

서울시는 망원동 유수지 공사 중 발생한 부실공사의 증거를 담은 '토목학회' 결과보고서를 은폐하고, 천재에 의한 사고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증거보전 노력과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변호사 등의 현장에 대한 증거보전 신청. 더불어 배수로의 부실관거 공사와 물을 막아야 하는 수문상자가 원래 계획보다 작게 설계 시공된 사실, 벽과 바닥의 방수처리 미흡 등의 내용을 담은 연세대의 사고보고서가 함께 제출되며 소송은 망원동 주민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민변의 역사를 연 망원동 수재사건

유수지 수문이 파손된 기사 유수지 수문이 파손되어 떨어져 나간 사실을 보도한 기사, 이러한 기사들을 통해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임이 주장되었다.
▲ 유수지 수문이 파손된 기사 유수지 수문이 파손되어 떨어져 나간 사실을 보도한 기사, 이러한 기사들을 통해 자연재해가 아닌 인재임이 주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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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동의 이러한 유례없는 집단 소송의 승리에 대해 당시 소송에 참여했던 박원순 변호사는 당시 함께 변론에 참여했던 조영래 변호사를 두고 이런 회고를 합니다.

'그는 늘 시대를 통찰하고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이끌었습니다.
그가 끈덕지게 붙잡고 몰두한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5공 독재정권의 도덕적 치명타를 가했습니다.
망원동 수재사건은 자연재해로 치부된 홍수사태를 인재로 규명함으로써 공공기관의 엄중한 책무를 확인시켰습니다.'
[출처] 박원순 서울시장, 故 조영래 변호사 25주기 추도사|작성자 박원순
(http://blog.naver.com/seoulwonsoon/220565564470)

그리고 그 결과 이 땅에 힘없는 시민의 권리를 지켜내는 중요한 단체가 만들어 집니다. 그것은 바로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이하 민변)입니다.

민변의 홈페이지에 가면 민변의 역사에 이런 글이 나옵니다.

"민변, 인권변호사의 역사를 잇다 - 80년대에는 조영래, 이상수, 박성민, 박원순 등 '2세대' 변호사들이 시국사건 변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망원동 수재사건과 구로동맹파업 사건 공동변론을 계기로 1986년 5월 19일「정의실현 법조인회(정법회)」를 결성(이하 생략)"

망원동 수재사건은 민변의 탄생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높아진 주권의식과 시민의식은 이후 개발과 성장으로부터 성미산을 지켜내고, 홈에버와 홈플러스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파업에 연대하고, 대기업 자본에 밀려날 뻔한 망원시장을 지켜내고, 홍대의 세입자 생존권을 위해 함께 싸우는 밑거름이 됩니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망원동 길은 이러한 주민들의 자치와 권리투쟁을 통해 만들어진 길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마을과 함께 이 역사를 이야기 하려고 합니다. 성미산 마을 주민들이 만들고 성장시켜낸 마을극장 '나루'에서 11월 마을연극제를 펼칩니다. 성미산 마을극장 상주단체인 '공연예술창작터-수다'와 국가폭력피해자를 지원하는 '지금여기에'가 함께 만든 <그때 그 망원동, 1984시절> 연극이 11월 21~23일 공연됩니다.

 연극축제 포스터
 연극축제 포스터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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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해를 마무리하며 망원동을 찾아보시면 어떨까요? 아울러 재미있는 연극도 관람한다면 마주하는 망원동이 한층 더 정겹게 보이지 않을까요?

망원동으로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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