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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대부분은 알고는 있지만 정확하게는 알지는 못하는 이야기가 있다. 아주 오랜 시간 제주도에서는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 안 되었다. 제대로 된 이념을 아는 사람도 적었고 해방 이후에 살아 남기 위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판단하지 못했던 그곳에서 무고한 희생이 있었다. 누구는 폭동이라고 하고 누구는 저항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애국이라고 한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는 4·3 사건을 촉발하게 된 사건이 발생한다. 일명 4·3 사건, 제주도 4·3 사건, 제주 4·3 항쟁, 4·3 봉기으로 불리는 비극적인 일이 발발했다. 지금처럼 제주도를 사람들이 많이 가던 시절이 아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더 폐쇄적인 곳에서 제주지역 공동체는 파괴되고 엄청난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참혹한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평화공원
▲ 제주 4.3평화공원 평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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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주도 4·3 사건은 여러 가지 악재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발생했다. 일본이 패망 전에 오키나와 등지에서 극심한 저항과 태평양에서 늘어지고 있는 전쟁은 미국을 고민하게 만들었다.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소련을 한반도로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그 결과 한반도에서는 민주주의가 공산주의가 같이 싹을 피우게 되었으며 일본이 패망하면서 한반도에 남아 있던 한국인이면서 일본에 종사했던 관리들은 미군정의 지원 아래 기득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기에 한반도 통합 정부를 구상했던 김구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생각했던 이승만 사이에는 생각 차이가 있었다. 게다가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온 조병옥 박사는 공산주의에 대한 극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부
▲ 1전시관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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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권을 되찾고 나서 제주도에는 일본의 밑바닥에서 일하던 6만여 명의 사람들이 흘러들어왔다. 이들은 한반도보다 더 많은 정보를 접했고 공산주의에 대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육지에 비해 지원이 부족했던 제주도 주민들은 극심한 식량난을 겪어야 했고 모두가 평등하다는 좌익인사들의 주장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제주도는 1945년 9월 10일 제주도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이들은 치안과 일본군 패잔병들의 횡포를 막는 데 주력을 하는 한편 한반도 통합 정부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안정적으로 체제를 유지하기를 원하는 미군정은 일제 때의 관리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했고 이는 인민위원회와 충돌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충돌
▲ 충돌의 시작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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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이 인정하는 우익세력과 좌익이 포함된 인민위원회의 충돌은 예견된 것이었다. 그러던 중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앞에서는 경찰의 총격에 6명이 사망하면서 제주도민들의 민심을 악화시켰다.

미군정은 사건의 발생 경위를 파악하기보다 시위를 주도한 사람을 잡고자 했다. 그 사건으로 인해 제주도청의 민과 관은 총파업에 들어갔고 이는 민간으로 퍼져나갔다. 3월 14일 미군정 경부 부장이었던 조병옥은 이들을 와해하는 데 주력을 했으나 와해되지 않자 3월 19일 담화문을 통해 제주도를 '빨갱이 섬'이라고 규정하고 무차별로 연행하고 검속 하였다.

미군정
▲ 미군정 미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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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씨앗이 이곳저곳에 뿌려지며 무르익어갈 때 1948년 1월 남한 단독선거 안이 확정된다. 이에 제주도 좌익진영은 단독선거를 봉기 결행의 주요 명분을 세우고 때를 기다린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오르고 350여 명이 제주도내의 주요 시설을 공격한다.

약 2주가 지난 4월 17일 미군정은 국방경비대 9 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령했으나 연대장은 대화를 통한 해결을 모색한다. 미군정의 하지 사령관은 그 대응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미 24군단 작전참모부 슈 중령을 내려보내지만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제주도 무장대는 5.10 단독선거를 거부하고 투쟁을 선언한다.

희생
▲ 희생자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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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선거 거부는 미군정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한 미군 지휘부는 총 3개 대대를 제주도로 내려보내 본격적인 토벌에 나서게 되고 조병옥 경무부장도 '강경 진압 방침'을 세운다. 그 결과 6월 입산자 중 6,000명이 붙잡히고 같은 해 단독선거를 통해 정권을 잡은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군 병력을 증파한다. 11월 17일 제주도에는 계엄령이 선포되고 제주도 해안가에서 5km 이상 중산간지대로 들어간 사람은 모두 폭도 배로 간주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포한다.

희생
▲ 피할수 없는 희생 희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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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명 '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살상이 벌어지고 4·3 사건 전 기간 동안 제주도에서 희생된 사람의 수는 25,000명 ~ 30,000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군병력에 의한 희생이 가장 컸지만 주민과 주민을 갈라놓은 정책에 의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참상이 벌어진다.

1954년 9월 21일 제주 4.3 사건은 종결되었으나 오랜 기간 그 사건은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하는 금기가 되었다. 7년 7개월의 악몽 같은 시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오랜 시간 진상규명을 하지 못한 채 강제로 수면 아래로 묻혀 있던 진실은  2000년 1월에 「4·3 특별법」(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공포되고 정부차원의 진상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2003년 10월 정부의 진상보고서(『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고 노무현 대통령의 공식 사과 등이 이루어지면서 일단락되었다. 

기자간담회
▲ 호세 라모스 오르타 기자간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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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4.3 70주년을 앞두고 동티모르의 제2대 대통령을 지낸 호세 라모스 오르타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제주시 제주 4·3 평화공원을 방문했는데 이날 공원에서 기자 간담회 및 위령제단에 참배를 했다.

기자 간담회에서 호세 라모스 오르타 전 대통령은 4·3 희생자들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정신이 매우 중요하다며 진상규명과 함께 과거를 통해 배우고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진상규명
▲ 진상규명필요 진상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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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라모스 오르타 전 대통령은 인도네시아의 점령기간에 망명 생활을 하며 인권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연설을 하는 등 동티모르인들의 아픔을 알리고자 노력한 공을 인정받아  1996년에는 티모르의 카를루스 시메느스 벨루(Carlos Ximenes Belo) 주교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백비
▲ 백비 백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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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평화공원의 입구에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은 비가 하나 있다. 4·3 특별법 공포가 되고 인명 피해와 희생자를 밝히기 위한 진상 조사는 이루어졌으나 4·3 사건이 어떻게 불려져야 하는지에 대해 명확하게 규정된 것이 없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폭동으로 불리고 현재는 사건이라고 하나 시대가 낳고 사람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아직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일명 보수라고 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아들 이인수씨와 대표적인 극우인사 이선교 목사 등 특별법에 의해 조성된 4·3 공원의 취소 소송을 내면서 2008년부터 '4.3 진상조사보고서는 가짜', '4.3 평화공원은 친북·좌파 양성소' '4.3 희생자는 폭도'라는 주장을 계속해왔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 동안 대통령으로 위령제나 추념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너븐숭이
▲ 너븐숭이의 기억 너븐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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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마을 중 너븐숭이 4·3 유적이 있는 마을을 찾아가 보았다.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는 수많은 주요 학살지 중 하나로 1949년 1월 군경들에 의해 무고한 시민 300여 명이 학살된 곳이다. 아이들의 돌무덤이 있는 너븐숭이는 제주어로 넓은 돌밭을 의미하는데 제주도의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올레길
▲ 너븐숭이마을 올레길 올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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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븐숭이 주변에는 올레길이 만들어져 있는데 올레길 중간중간에 총탄의 흔적과 비극적인 사건을 안고 있는 유적들이 눈에 뜨이는 특별한 길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육지와 분리되어 오랜 시간 그들만의 문화를 만들어왔다. 그렇기에 고립된 곳에서 더 큰 희생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푸른바다
▲ 제주도 바다 푸른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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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를 방문했던 그날따라 제주도의 바다가 더 맑고 푸르게 다가온다. 제주도 주민들이 학살이 일어났었던 그날에 제주바다는 얼마나 붉고 어두웠을까. 이제 시간이 지나 이국적인 풍경을 다시 되찾았지만 제주도민들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악몽이 아직도 가시지 않고 있다고 한다.

총탄
▲ 총탄흔적 총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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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제주도에 온 군경들은 사람들을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이 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는가 하면 주변에 있는 비석이나 돌에다가 총을 쏘았다고 한다. 너븐숭이의 사건은 중산간지역에 있던 무장대가 군인을 급습해 발생했다. 그들과 연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군인의 시체를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는 이유로 9명 중 8명을 죽이고 나머지 마을 사람들을 초등학교에 몰아넣었다. 그리고 군인이나 경찰의 가족이 아닌 이들을 나누어서 무차별로 학살한 것이다.

초등학교
▲ 비극의 현장 초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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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3월 1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희생된 소요사태'로 규정되었고 2014년 4월 3일에는 국가추념일로까지 지정되었지만 아직도 진상규명은 요원한 상태이다. 소요사태 혹은 사건이라 불리기만 하고 있지 이 일이 국가가 희생자나 그 가족에게 어떤 것을 해주어야 하는지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등의 논의는 갈길이 먼 상태이다. 


태그:#4·3사건, #제주4·3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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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든지 쓰는 남자입니다. 영화를 좋아하고 음식을 좋아하며, 역사이야기를 써내려갑니다. 다양한 관점과 균형적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금은 열심이 사는 사람입니다. 소설 사형수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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