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콜롬비아에서 10개월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지인에게 들은 단어는 딱 3가지였다. 커피, 마피아, 축구. 10일 콜롬비아와의 평가전이 있는 만큼 그곳에서의 이야기를 가져와 본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콜롬비아가 낯설지 않다. 최근 3년간 월드컵과 코파 아메리카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고 하메스 로드리게스와 라다멜 팔카오라는 뛰어난 선수를 보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콜롬비아가 축구로 유명해진 건 얼마 되지 않았다.

Statue of Carlos Valderrama 산타 마르타에 세워진 발데라마 동상

▲ Statue of Carlos Valderrama 산타 마르타에 세워진 발데라마 동상 ⓒ RICARIZA


1990년대까지 콜롬비아는 마피아가 판치는 각종 범죄의 온상지였다. 수도인 보고타에서도 광장에서 납치와 살해를 당하는 등 위험이 도사렸다. 그러던 중 '콜롬비아의 전설' 카를로스 발데라마가 데뷔했고 축구가 국민에게 희망을 줬다.
1962년 첫 참가 이후 28년간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한 콜롬비아는 발데라마의 등장과 함께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16강까지 진출한 콜롬비아는 이후 1994년 미국, 1998년 프랑스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비록 1994년 안드레스 에스코바르가 자책골을 넣었다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불운한 일이 있었지만, 그만큼 축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그러나 전성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2000년대 들어 콜롬비아 축구는 다시 암흑기에 접어들었다. 발데라마가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뒤 16년 동안 월드컵 본선에 오르지 못했다. 2001년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에서 우승했지만, 다른 국제 대회에서 별다른 두각을 보이지 못했다.
오랜 시간 침체기를 겪은 콜롬비아는 2012년 들어 축구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한때 FIFA 랭킹 54위(2011년)까지 내려앉은 콜롬비아는 어떻게 강팀 반열에 합류할 수 있던 걸까. 팔카오, 하메스, 콰드라도라는 뛰어난 선수가 등장한 것도 있지만, 이것만이 그 이유는 아니다.
콜롬비아의 인구는 4900만 명으로 오히려 한국보다 200만 명 적다. 그러나 프로팀은 36개(1부 리그 20개, 2부 리그 16개)로 국내의 22개보다 16개나 더 많다. 그렇다 보니 선수의 숫자도 훨씬 많다. 이렇게 많은 선수가 어디서 온 것일까. 국내처럼 엘리트 스포츠로 선수를 육성하는 것도 아니다. 축구할 수 있는 환경이 좋다는 주장에는 단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대다수가 공원이나 우레탄 풋살 코트에서 뛰지 국내처럼 예쁘게 가꿔진 곳이 더 많은 것은 아니다. 축구를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Ciclovia de domingo 일요일마다 보고타의 일부 도로는 자전거 도로가 된다.

▲ Ciclovia de domingo 일요일마다 보고타의 일부 도로는 자전거 도로가 된다. ⓒ nati_fg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에서 잠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유학 간 지 2주쯤 됐을 때의 일요일 아침, 거리를 나갔을 때 새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왕복 6차선이 되는 차도의 한쪽 도로 전체가 통제된 것. 차는 나머지 3차선으로만 다니고 통제된 도로에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헤드셋을 낀 청년부터 풍채 좋은 할머니, 작은 자전거를 들고나온 어린아이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항상 그랬다는 듯 안전모와 보호구를 차고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지나갔다. 일요일 아침 8시도 되지 않은 때였다.

현지에서 친구를 사귈 때면 언젠가 한 번씩 좋아하는 운동에 대해서 묻곤 했다. 대다수의 대답은 축구와 자전거. 모두가 운동을 좋아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남녀 구분 없이 운동을 많이 해왔고 잘 한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전부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수긍하기 시작했다.
보고타의 가장 대표적인 공원인 파르케 시몬 볼리바르는 가족, 친구 단위로 항상 가득 찼는데, 그들은 축구와 캐치볼 등 다양한 운동으로 여가를 보냈다. 학교와 인접한 놀이터(작은 공원이라고 보는 게 적절하다)에서도 오후 3시만 되면 학생들이 나와 농구, 축구, 프리스비(원반 던지기)가 한창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학생이 멋진 트래핑을 선보이고 적극적으로 뛰는 모습이었다. 강압적인 운동이 아니라 하나의 취미, 생활의 한 요소처럼 가까웠다.

그들을 보며 많은 생각이 교차했다. 확실히 한국에서 생각하는 운동과 달랐다. 그들에게 운동은 재미있기에, 오랜 시간 해왔기에 익숙하고 당연한 활동이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몸 관리를 위해 시간을 쪼개서 하는 인식이 강하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교내 동아리로, 방과 후 프로그램으로 운동을 즐기긴 하나 공부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는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때로는 부모가, 때로는 선생님이 강제로 실내에 붙들어 놓는다. 지겨운 3년간의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수능이 끝나면 학생들은 자유를 기대한다. 하지만 집에서는 또 다른 지시가 내려진다. "가끔은 나가서 운동 좀 해."
운동을 할 시간조차 없던 학생들이 성인이 돼서 운동을 쉽게 할 수 있을까. 운동뿐만 아니라 모든 것은 어렸을 때부터 꾸준히 했을 때 쉽게 익숙해진다. 그렇지 않다면 꽤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에서 청소년기에 운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그룹, 엘리트 스포츠로 일찌감치 선수의 꿈을 키운 학생뿐이다. 우리는 소수의 몇 명에게만 운동을 시키고 그들 모두가 유망주가 되기를 바란다. 그들의 실패를 책임지지도 않은 채.
대한민국 축구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점으로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박지성과 이영표 등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가 은퇴한 뒤로 최악의 길을 걷고 있다. 콜롬비아의 하메스, 팔카오처럼 대한민국도 몇 년 뒤에는 걸출한 선수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박지성은 정말 특별한 경우였다. 지금 상황에선 헛된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옳다. 기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우선이다. 현 상황을 살펴본다면 이승우, 백승호, 이강인 등 촉망받는 유망주가 성장하지 못한다면 대체자는 없다. 대한민국은 카를로스 바카처럼 생선을 팔면서 축구를 할 수 없는 환경이다.

Youth soccer indiana 서양권 문화에서는 아동기부터 운동과 가까워진다

▲ Youth soccer indiana 서양권 문화에서는 아동기부터 운동과 가까워진다 ⓒ Tysto


콜롬비아 축구 이야기에서 야간 자율 학습까지 이야기가 돌고 돌았다. 그러나 콜롬비아에서 배운 것 중 전하고자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다. 대한민국도 엘리트 스포츠에서 생활 스포츠로 변해야 한다. 그리고 어린이와 청소년의 운동을 권장해야 한다. 그래야만 프로 스포츠와 국가 대표가 같이 살아날 수 있다. 물론 국민 체력 증진으로도 이어진다. 이미 변화하고 있다고는 말하지만, 유스 시스템 확대와 생활 스포츠 지원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그래 봤자 엘리트 스포츠의 색만 더 짙어질 뿐, 모든 학생의 운동이 보장되지 않는다. 적어도 우리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지난 3개월간 대한축구협회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지난 8일, 박지성과 홍명보를 요직에 선임하며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에도 축구계가 변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군다나 경기력은 당분간 큰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대한민국 국적의 축구 선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2017년의 대한민국은 박지성처럼 세계적인 선수도 없고 유럽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는 선수라고는 손흥민, 기성용, 구자철뿐이다. 과연 한국 축구의 부진을 기술위원회와 감독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 있는가. 혹여나 새로운 감독이 좋은 성적을 내더라도 2022 카타르 월드컵을 준비할 때 이들은 30대가 된다. 그 뒤를 이어줄 대체자가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더 큰 위기가 닥치게 된다.
당장의 성적을 기대하는 마음은 모두가 똑같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지금은 현실을 바라보고 더 멀리 봐야 할 시점이다. 콜롬비아가 그랬듯이 암흑기가 있으면 황금기도 언젠가는 돌아온다. 그러나 그 언젠가는 준비를 했을 때 찾아온다. 선택받은 몇 명의 학생만 운동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좋은 선수가 얼마나 배출될까. 물론 잘못된 축구협회와 감독, 선수에게 비판을 가하는 것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을 파악하고 더 넓은 시각으로 아래쪽을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든 탄탄한 기반 없이는 오래갈 수 없다. 국민 모두가 운동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이 필요하다.


☞ 관점이 있는 스포츠 뉴스, '오마이스포츠' 페이스북 바로가기

덧붙이는 글 세 장 모두 작가가 모든 목적으로 사용을 허용한 사진입니다.
콜롬비아 대한민국 생활스포츠 축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현장을 눈앞으로 전달하겠습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