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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 때나 요즘 같은 가을날 여건이 안 되어 여행을 떠나지 못할 땐 여행기를 읽으며 책속 여행을 떠나곤 한다. 여행기의 매력이라면, 같은 여행지라도 떠난 사람에 따라 혹은 여행방법(도보여행, 자전거여행, 사진여행, 미식여행 등)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데 있지 싶다. 종종 여행기 안에 또 다른 여행기가 등장하는 것도 눈길을 끈다. 

3권에 걸쳐 이어지는 여행서.
 3권에 걸쳐 이어지는 여행서.
ⓒ 효형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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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 여행에 어울리는 간결한 제목의 이 책 <나는 걷는다>도 많은 여행기들에 나오는 여행서 가운데 하나다. 최근에 읽었던 아이슬란드 배낭여행기 <아이슬란드가 아니었다면 (강은경 저)>이나 까칠한 도보 여행가로 국내외 많은 여행기를 남긴 김남희 작가의 여행기에도 나온다. 서명숙 제주올레길 이사장은 올레길 행사 때 이 책의 저자 베르나르 올리비에를 초청하기도 했다. 도보 여행가들의 스테디셀러라 해도 되겠다.

450페이지가 넘는 이 두툼한 책이 얼마나 좋길래, 짐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할 도보여행자들이 배낭에 넣고 다닐까. 궁금한 마음에 읽으려고 찾아보니 무려 3권이나 된다. 터키에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지나 중국의 옛 수도 시안(西安)까지 길고 긴 실크로드를 걸었으니 책 한 권으론 부족하기도 했겠다.

이 책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터키 이스탄불을 출발해 1만2000킬로미터의 길을 무려 4년간 나누어서 걸었던 프랑스 사람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고행 같은 여행기다. 얼마나 고생이 많았고 할 이야기가 많았으면 여정이 그려진 지도 외에 여행사진, 풍경사진 한 장 없이 글로만 가득한 여행기다. 덕택에 여행기를 읽으며 상상력이 한껏 활성화됐다. 저자의 노력과 정성은 '세계 최초 실크로드 도보답사기'라는 명예도 얻게 했다.

사진 한 장 없이 저자가 보고, 듣고, 겪고, 생각한 것들을 상상하며 느릿느릿 읽자니 나도 함께 긴 여행을 한 기분이 드는 책이다. 1권은 터키를 횡단해서 이란 국경에 이르기까지 여정을, 2권은 이란에서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까지를, 그리고 3권은 마침내 중국의 시안에 도착하기까지의 장도를 담고 있다.

철학적 화두가 된 질문 "왜 걷는가?" 

'걷는다는 건 모든 접촉에 노출되는 일이다. 따라서 호의도 악의도 모두 접하게 된다. 그냥 침대에서 편안하게 죽기를 바랐다면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자신의 침대에서 죽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래서 절대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은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다.' - 본문 가운데

전직 기자 출신으로 취재를 위한 크고 작은 도보여행을 경험한 그에게 걷는 일 자체는 생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중국까지 여러 나라와 여러 민족이 사는 곳을 지나는 실크로드를 걷는 일은 그에게도 커다란 도전이 아닐 수 없었다. 맨 처음 실크로드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하게 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호기심이었다. 700여 년 전 마르코 폴로가 서양에 동양의 존재를 알린 이후, 두 세계 간에 무역과 문화의 통로가 되었던 길.

대상들이 낙타를 끌고 행군했던 그 신비로운 미지의 길. 낯선 언어와 문화 그리고 다양한 민족들... 그리고 그 길이 지닌 전설적인 역사까지. 저자는 실크로드를 제대로 알고 느끼고자 편리한 차를 놔두고 오로지 두 발로만 지난다. 덕택에 많은 생각과 고민과 깨달음을 거치면서 왜 걷는지에 대한 생각이 다채로워진다.

여행길에 만난 지역 주민들이 그에게 수도 없이 질문하곤 했던, 그리고 저자 자신도 걷기가 힘겨울 때마다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 "왜 걷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의 철학적 화두가 되어 이 책 곳곳에 숨어있다. 자전거를 타고 우리나라의 리버 로드(River Road, 강변길) 여행을 하다보면, 동네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왜 혼자 다니느냐?"다.

실크로드의 주민들이나 한국 사람 모두 걷는 것, 혼자 살아가는 게 외롭고 고단하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홀로 걷기가 준 가장 큰 선물은 모두가 두려워하는 고독을 즐기게 된다는 거다.

여행의 최고봉은 '혼자 걷는 여행'이지 싶다. 저자에겐 유일한 동행이 있었는데 '윌리스'라 이름붙인 손수레다. 숙소가 없는 동네가 많아 야영 장비를 실은 작은 손수레를 끌고 다녀야 했다.

더 이상 비단길이 아닌 실크로드

동고동락을 함께 한 손수레 '윌리스'와 함께.
 동고동락을 함께 한 손수레 '윌리스'와 함께.
ⓒ 베르나르 올리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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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왜 걷는지 다음으로 묻는 의외의 질문은 돈에 관한 것이다. 지금 돈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있는가? 돈벌이는 어떻게 하는가? 수입은 어느 정도인가? 자동차는 갖고 있는가? 있다면 얼마짜리인가? 부자인가? 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예외가 없어 심기가 좀 불편해진 저자가 물었다.

"도대체 돈 말고는 다른 관심거리가 없습니까?"
"그건 우리가 너무나, 너무나 가난하기 때문이라오..."
- 본문 가운데


걷기 좋은 산티아고 순례길과 달리 실크로드(Silk Road)는 더 이상 비단길이 아니었다. 중앙아시아 최고(最古) 도시 사마르칸트의 운명처럼 낭만적이고 시적인 이름을 가진 옛 도시와 정경은 대부분 사라졌다. 사진에서 봤던 아름다운 사막에 대상들이 묵었던 숙소 같은 역사적인 건물들은 어울리지 않는 장식과 시멘트 칠로 범벅이 되어 그를 실망시킨다.

길에 삭막하고 위험한 국도가 나있어 GPS로 실크로드의 흔적을 찾아 걸어야 했고, 오아시스가 사라진 사막엔 더 이상 낙타들이 다니지 않았다. 사막에서 유일한 위험은 뱀도 전갈도 아닌 나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밤이 되면 만약을 대비해 손에 칼을 쥐고 야영을 했다.

역사, 종교적인 사연으로 서양인인 저자에게 경계와 적개심을 드러내는 지역 주민들도 많다. 터키의 어느 마을에선 테러리스트(혹은 쿠르드족 독립군)로 신고 되어 장갑차까지 대동한 군부대에게 체포되기도 한다. 시안까지 가는 길섶 마을에 사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은 실크로드라는 이름조차 몰랐다.

그렇다고 조바심이 생기는 게 아니라, 저자는 오히려 더 느긋해졌다. 이 세상은 이렇게 내가 모르는 것들로 이루어져 있구나 싶어서다. 이런 느긋함 덕분인지 이상한 짐수레를 끌면서 길을 걷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프랑스인에게 커피와 음식을 내어주고 잘 곳을 마련해주고 미소를 보여준 사람들은 고된 여정에 단비 같은 감동을 선사한다.

이 책은 요즘 여행서과 달리 여행지의 경치와 풍습들이 요란스럽고 화려하게 나오지 않는다. 전직 기자로서 이런 일을 예상했을까. 다행히 그는 원대 하게 보일 수도 있는 자신의 여행에 애초부터 어떤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아내와 사별하고 직장에서 은퇴한 저자는 고독한 도보 여행을 통해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싶었다고.

저자가 보고 들은 실크로드가 품고 있는 오랜 역사 이야기는 역사책에서 접하지 못한 내용이라 무척 흥미롭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하는 남성할례(포경수술)가 터키 등 이슬람국가들에서 연유한 이유, 712년 페르시아(현재 이란) 지역을 점령한 아랍인들이 탄압이나 강제 없이 짧은 시간 안에 페르시아인들을 이슬람교도로 개종시킨 비결, 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사원을 제외하고 실크로드의 흔적을 지워버린 사연, 과거 중국이 철저하게 비밀로 간직해온 종이, 비단, 도자기 등의 제조법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구 세계에 넘어간 역사적 사건 등 긴 여행기를 지루하지 않게 해주는 윤활유 같은 이야기가 풍성하다.

덧붙이는 글 |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은이), 임수현 (옮긴이) | 효형출판 | 2003년 12월
제 블로그(sunnyk21.blog.me)에도 송고했습니다.



나는 걷는다 세트 - 전3권

베르나르 올리비에 지음, 고정아 옮김, 효형출판(2004)


태그:#나는걷는다, #베르나르올리비에, #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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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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