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전편에서 이어진 기사.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생 사진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생 사진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쌍둥이 형제는 선감학원에 오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몸도 또래에 비교해 약했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정글과 같은 선감학원을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허약했던 것이다.

"생활 기록부에 신체 허약체질이라 나올 정도로 몸이 약했어요. 원생 중 제일 어렸고요. 그래서 더 많은 고통을 받았지요. 힘이 약하다 보니 허구한 날 밥을 빼앗겨 더 많이 배가 고팠고, 맞기도 더 많이 맞았어요. 안 주면 죽여 버린다고 협박하고 때리고 못 살게 굴고. 정말 배가 고파서 살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 제가 거기서 살아 나왔는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해요.

형도 분명 저하고 똑같이 당했을 거예요. 내 기억에는 없지만, 형이 배가 고파서 모포를 뜯어먹고 병이 나 죽었다는데, 그랬을 것 같아요. 보리밥에 단무지 하나 나오는 식사, 다 먹어도 늘 허기가 지는데 그마저도 덩치 크고 거친 형들한테 빼앗겼으니. 몸도 약한 사람이 병이 안 날 수가 없죠."

꽃신 주인의 쌍둥이 동생 허일용(60세)씨가 추측하는 '형이 죽은 이유'다. 근본 원인은 굶주림이라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죽음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죽음이라는 '아사(餓死)'니, 참으로 아픈 일이다. 그는 "너무 끔찍한 기억이라서 그런지, 형에 대한 기억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라고 입버릇처럼 중얼거렸다.

하늘 아래 유일한 혈육과의 이별만큼이나 괴로운 게 지독한 매질이었다. 아침에 조금만 늦게 일어나도 머리통만한 주먹이 날아왔다. 더 억울한 것은 아무 이유 없이 맞는 것이었다. 사장(막사의 장)이나 반장이, 자기 기분 나쁘면 집합시켜 놓고 화풀이를 했다. 선생도 군기를 잡는다는 이유로 걸핏하면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러다 보니 안 맞는 날이 거의 없을 정도로 숱한 매를 맞았다. 너무 어리고 겁이 많아 반항 같은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리다고 봐주지도 않았다. 탈출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다. 그곳은,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 선감도였다.

원생 하나가 도망치다가 바닷가에서 잡힌 일이 있었다. 선생과 덩치 큰 형들이 몽둥이를 들고 바닷가로 몰려갔고, 겁에 질려 있는 아이 하나를 개패 듯 두들겨 팼다. 누군가 "눈 감아!"라고 속삭여서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그 무서운 광경이 머릿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어리다고 강제노동에서 제외된 것도 아니다. 머리통 두 배만한 큰 연탄도 날랐고 산과 들에서 풀을 베어 퇴비도 만들었다. 이런 이유 등으로 겨울이면 늘 동상에 시달렸다. 발이 퉁퉁 붓고 빨개져도 치료해 주는 이는 없었다. 아무리 어려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어린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따뜻한 물에 발을 담그는 것뿐이었다. 이 모든 게 10살도 안 된 어린아이가 겪어내기엔 너무나 참혹한 일이었다.

"밥 안 내놓으면 죽어, 모포 뜯고 죽은 이유"

선감학원피해자 허일용씨. 본래 이름은 허이동. 무덤에서 나온 꽃신 주인 고 허일동씨의 쌍둥이 동생.
 선감학원피해자 허일용씨. 본래 이름은 허이동. 무덤에서 나온 꽃신 주인 고 허일동씨의 쌍둥이 동생.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무덤에서 나온 꽃신 주인 고 허일동씨의 유일한 신상 기록.
 무덤에서 나온 꽃신 주인 고 허일동씨의 유일한 신상 기록.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꽃신의 주인, 그의 형이 죽은 것은 선감학원에 끌려간 지 2년 만인 1964년 4월 1일이다. 그 뒤 6개월 만에 그는 그곳을 떠나 인천에 있는 계성보육원이란 곳에 맡겨졌다. 어째서 그를 육지로 내보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생들이 대체로 목숨을 걸고 탈출해서 그곳을 벗어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무척 이례적인 일이다.

선감학원보다는 덜하지만, 그 뒤의 삶도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매질도 당했고 노동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래도 옥수수 가루 죽이나마 많이 먹을 수 있어 좋았다. 그나마 그가 6학년쯤 됐을 때 보육원이 망해 버려, 그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배움이 짧다는 것, 너무 어리다는 것도 힘겨운 일이지만, 그보다는 고아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을 견디는 데 더 힘들었다. 그래서 고아라는 사실을 어떻게든 숨기려 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취직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주민등록등본 같은 신상과 관련한 서류만 내면 들통이 나게 돼 있었다.

고아라는 것을 아는 순간 사람들 눈빛이 달라졌다. 도둑질하고 강도질하는 나쁜 사람 취급을 했다. 또한 "너 같은 놈은 때려죽여도 상관없다"는 잔인한 말도 거침없이 했다. 한때 친했던 사람이 그 말을 하면 서운함과 배신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어릴 때 겪은 선감학원의 끔찍한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사는 일도 무척 괴로웠다. 이 기억은 예순이나 된 지금까지 그를 괴롭히고 있다.

"선감학원을 겪은 뒤에는 기를 펴고 살 수가 없었어요. 늘 불안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 앞장설 일이 생겨도 나설 수가 없고, 사람 사귀는 것도 두렵고."

이런 불안함 탓인지 그는 평생을 성실히 일했는데도, 예순이란 나이가 됐는데도 현재 빈손이다. 사글셋방에서 살고 있다. 결혼을 못 해서 가족도 없다. 구두닦이, 식당 종업원, 막노동, 운전 같은 일을 했고, 중동 건설 붐이 불 때는 두 번씩이나 열사의 땅에도 다녀왔다.

현재 그의 처지는 당장 일자리를 찾아야 끼니를 때우고 유일한 친구인 담배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하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 보니 허드렛일 찾기도 쉽지 않다. 생활정보지 구인 광고를 찾아 전화를 걸지만 돌아온 대답은 "나이가 많아서 안 된다"는 말뿐이다. '중동까지 가서 돈을 벌었으면, 꽤 많이 모았을 텐데?'라고 묻자, 그는 피식 웃으며 "만홧가게 하다가 까먹기도 하고, 돈 벌기가 쉽지 않았어요"라며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그의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일까. 쌍둥이 형제의 비극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미아가 돼서 고아로 살았지만, 원망은 없어

 소년 유해와 함께 무덤에서 나온 꽃신, 손바닥 절반정도 크기로 아주 작다
 소년 유해와 함께 무덤에서 나온 꽃신, 손바닥 절반정도 크기로 아주 작다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작가들이 만든 선감 박물관
 작가들이 만든 선감 박물관
ⓒ 이민선

관련사진보기


선감학원에 끌려가기 전 쌍둥이 형제가 살았던 곳은 서울 미아리다. 아버지는 없었지만, 그래서 비록 가난했지만, 할머니, 엄마와 함께 행복한 유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쌍둥이 형제의 어머니는 부잣집에 가서 온종일 일을 하다가 밤늦게 집에 돌아왔다. 식모살이라는 것이다. 엄마가 일하는 낮 동안 쌍둥이와 놀아준 것은 할머니다. 맛있는 것을 사달라고 조르면 할머니는 눈을 곱게 흘기며 쌈짓돈을 꺼냈다. 대문을 여는 엄마 손에는 늘 무엇인가 들려 있었다. 사과 조각, 배 조각... 자식 입에 넣어주기 위해 이 눈치 저 눈치 봐가며 부잣집에서 싸들고 온 눈물겨운 음식이었다.

젊은 어머니는 재혼하면서도 쌍둥이 형제를 떼어놓지 않았다. 충청도에 있는 농가였다. 그러나 새아버지는 쌍둥이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았다. 엄마 옆에서 잔다고 생떼를 써대니 그럴 만도 했다. 결국, 쌍둥이는 엄마가 재혼한 집에서 쫓겨나 할머니와 살게 된다.

1960년 쌍둥이가 6살 된 해 어느 날, 그들은 할머니 손을 잡고 시장에 갔다. 달착지근한 것을 맛볼 기대감에 어린 것들 얼굴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기대했던 대로 두어 번 칭얼대자 할머니 속곳에서 돈이 나왔다.

"거기서 할머니 손을 놓친 거예요. 유별나게 그날 사람이 많았어요. 할머니가 사준 게 무엇인지는 기억에 없는데, 달착지근한 것이었어요. 정신없이 먹고 보니 할머니가 없는 거야! 그래서 울면서 정신없이 찾았는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6살짜리가 어디가 어딘지를 어떻게 알겠어?"

어둠살이 짙어질 때쯤 쌍둥이 형제는 시장을 벗어나 넓은 공터 부근에 와 있었다. 눈물도 말랐고 더는 울 기력도 없었다. 어디선가 제복을 입은 경찰이 나타났고, 경찰 손에 이끌려 파출소로 향했다. 며칠 뒤 '서울시립 아동보호소'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몇 개월 뒤인 1962년 선감도로 끌려갔다. 집을 찾아 주는 대신 보육원으로 보낸 것이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부모도 세상도 원망한 적은 없어요. 모두 내 운명이라고 그렇게 편안하게 생각하며 살았어요. 어머니도 할머니도 모두 자애로운 분이었고요."

타고난 성품이 바다같이 넓은 것인지, 해탈한 것인지 이렇듯 그의 마음에는 원망이란 게 없었다. 그러나 아쉬움은 깊었다. 할머니 손을 놓치지 않았다면, 선감학원에 끌려가지 않았다면, 분신과도 같은 쌍둥이 형을 잃지 않았다면 좀 더 나은 삶을 살지 않았을까! 이것은 나만의 상상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았겠지요. 불우했지만 (형과) 서로 의지하면서 도우면서 살았다면 결혼도 하고 자식도 키우는 평범한 삶을 누렸을 것도 같아요. 사는 동안 이런 생각 한두 번 해 본 게 아닙니다."

쌍둥이 동생 허일용씨 인생을 통해서 본 꽃신 주인의 인생은 역시 비극이었다. 무덤에서 나온 꽃신은 소년 강제수용소 선감학원이 소년들 영혼을 어떻게 갉아먹었는지를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태그:#선감학원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