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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없이 뚝 끊는 광고 전화.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말도 없이 뚝 끊는 광고 전화.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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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던 작가의 반가운 근황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을 때 일단은 받는다. 그중 절반은 통신사나 카드사에서 걸려온 전화다. 낯선 사람에게 전화해서 뭔가를 제안하고 수도 없이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짐작할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한 친절하게 대답한다.

예전에는 아무리 '괜찮습니다', '감사하지만 필요 없을 것 같아요'라고 말해도 끈질기게 전화를 끊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한 번만 거절하면 대부분 금방 전화가 마무리된다. 문제는 내 쪽에서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해도 그쪽에서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경우다.

- 안녕하세요, 고객님. 이번에 저희 OO에서 이런 상품이 나왔는데요~
"아, 죄송해요. 괜찮을 것 같습니다."
- 뚝.


필요하다고 한 적도 없는 상품을 소개하려고 멋대로 전화를 걸어 놓고, 사양하면 말도 없이 전화를 뚝 끊어 버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다가, 이런 일이 몇 번 반복되자 다시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을 정도로 기분이 나빴다. 그냥 '네'라고 한마디 대꾸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물론 그들도 피곤하고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매번 상대방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걸 마음 넓게 이해해주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 <매일이, 여행>에도 간혹 점원이나 택배 기사의 불친절함에 마음이 상했다는 경험담이 나온다. 그걸 보면서 나는 내심 안도했다. 음울한 마음마저 세계를 이루고 있는 응당한 감정처럼 세심하게 그려내는, 그 섬세하고 감성적인 작가도 일상의 불친절함에는 기분이 나빠지는구나. 그녀도 나와 다를 바 없이 불쾌함과 짜증을 느끼고, 비합리적인 일에 대한 답답함을 겪는, 같은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이구나. 물론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세이를 읽다 보니 새삼 그런 친숙한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의 에세이를 읽으면 그 작가를 사람으로서 좀 더 가까이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게 좋을 때도 있고, 물론 가끔은 별로일 때도 있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은 아마 20대 초반 무렵에, 거의 하나도 빠짐없이 읽었다. 나뿐만 아니라 그때의 또래 친구들은 누구나 무라카미 하루키나 요시모토 바나나 등의 일본 소설에 꽤 빠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우리의 삶과 다를 바 없지만, 그 내면에 있는 또렷하지 않은 것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더듬는 감성의 흐름은 내 신경 세포 하나하나를 예민하게 자극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그런 예민한 감성의 세계는 완전히 잊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래도 10여 년 넘게 친숙하게 생각해온 작가이기 때문인지 마치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낸 이웃 혹은 예전에 아주 좋아하던 배우의 근황을 듣는 것 같은 느낌으로 그녀의 신작 에세이를 반갑게 펼쳐 들었다.

개는 세상을 떠났고, 아기가 태어났군요
 개는 세상을 떠났고, 아기가 태어났군요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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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뒤에서 일상을 바라보면 

요시모토 바나나가 시베리안 허스키 종의 '러브'라는 큰 개를 키운다는 건 이전에 읽은 에세이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책에는 러브가 12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담겨 있어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아기가 태어났다고 한다. 몸이 약해 출산할 때 고생한 것 같지만, 아기를 키우면서 느낀 여러 가지 새로운 경험을 들을 수 있었다. 이를테면,

"(임신과 출산, 수유를 하는 기간은) 몸을 완전히 사용하기 때문에 정신 상태가 거의 짐승에 가까워 냉정한 판단을 도저히 할 수 없다." (262p)

그러나 그녀는 아기를 키우면서 알게 된다. 아기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소를 짓는다는 것. 아기란, 깨끗한 하루를 순수하게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녀의 에세이 <매일이, 여행>을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 갔던 일상의 모든 일들을 건반처럼 하나씩 짚어 되돌아보게 된다. 모든 일상을 여행처럼 생경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따라가 보는 것이 소소한 재미다.

더불어 세상의 모든 것은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듯 돌아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침대 맡에 놓은 식물에게 '아침에 눈이 부시니 쑥쑥 자라서 그늘을 만들어 줘'라고 부탁하자 정말로 무럭무럭 자라 그늘이 되어주었다든가, 실의에 빠져 있을 때 애써 온 힘을 다해 꽃을 피워준 선인장이라든가.

반려견 '러브'와 마지막 산책을 하며 함께 나가고 싶어 했던 러브의 메시지를 절절하게 느낀 것, 그리고 아기를 임신했을 때 아무 기척이 없었는데도 새 생명을 감지한 일 등이 그렇다. 세상이 그녀에게 수없이 많은 암시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세상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운이나 에너지가 작용하는데, 그것은 말 못 하는 동물이나 식물들에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우리 집 선인장은 평소 아무리 비료를 주고 공들여 보살펴 주어도 꽃을 피우지 않는데, 내가 울적해 하거나 실망에 젖어 있을 때면 반드시 꽃이 핀다. 그런 때는 식물에도 눈이 가지 않아 제대로 보살펴 주지 못하는데, 울적한 마음으로 얼굴을 문득 들어 보면 꽃이 있다. 그런 식이다, 늘." (244p)

"나는 울면서 말했다.

'그래, 우리 같이 산책했던 거, 평생 잊지 않을게.'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산책이 마지막이라는 걸, 아프도록 절절하게 알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함께 밖에 나가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해 준 것이 정말 기뻤다." (277p)

세상이 던지는 메시지나 인간 이외의 존재가 말을 걸어오는 것에 반응하는 것은 요시모토 바나나의 소설 주인공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주위에는 왠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그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지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혹은 안 좋은 일이 다가오려 하는지 '감지한다.'

그러나 이 작가가 그것을 매번 발견할 수 있는 건, 그 목소리 없는 메시지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는 일일 것이다. 단지 우리는 너무 바빠서, 그리고 스트레스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어서 누군가 보내는 순수한 메시지를 받아들일 여백이 부족한 거다.

<매일이, 여행>을 읽으며 잠시나마 한 걸음 떨어져서 일상을 여행처럼 보는 방법을 되뇌어본다. 내게 주어진 하루하루가 사실은 모든 여행의 첫날처럼 신선하고 설레는 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하면 나도 아기처럼 매일을 웃는 얼굴로 깨어날 수 있을까.


매일이, 여행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민음사(2017)


태그:#서평, #요시모토바나나, #매일이여행,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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