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발 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 양희은 '한계령'(1985) 중에서

'박근혜 퇴진'을 외치며 촛불집회를 시작한 지 어언 1년이 지났다. 지난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결정이 이뤄졌고 5월 9일 새 정부가 들어선 지도 반년이 지났다. 아직 도심 곳곳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 석방을 촉구하는 태극기 집회가 열린다.

'수구꼴통, 꼰대, 틀딱.' 젊은 세대가 중장년층 세대를 조롱할 때 부르는 이름이다. 중장년층은 "요즘 젊은것들이 뭘 아느냐"고 말한다. 대한민국이라는 같은 땅을 딛고 사는 이 두 세대의 평화적인 공존은 가능할까?

10월 26일은 우리나라 역사적으로 굵직한 사건이 몇몇 있었다. 1909년에는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역에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했고, 1979년에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 2016년에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국민적인 공분이 절정에 달하면서 박 전 대통령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리고 올해 10월 26일 한 영화가 개봉했다. 바로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다.

 지난 10월 26일 개봉,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포스터

ⓒ 인디플러그


순박하고 순수한 그들이 박정희를 사랑하는 방식

<미스 프레지던트>는 박정희·육영수와 박근혜를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영화다. 첫 번째 등장인물인 조육형씨는 청주에 사는 농부다. 그는 의관을 갖추어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을 향해 절을 하고 국민교육헌장을 암송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두 번째 등장인물은 울산에 사는 김종효씨 부부다. 이 부부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은 "배고픔을 해결해 준 일생의 은인"이다. 육영수 여사는 힘들게 살아가는 국민의 애환을 어루만져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심지어 가방 장신구의 앞·뒤 면에 박정희 부부의 사진을 새겨넣고 다닐 정도로 김종효씨 부부의 박정희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조육형씨와 김종효씨 부부는 '박사모 가족'의 회원이다. 박정희 시대를 온몸으로 겪었던 사람 중 하나다. 그러나 이들은 태극기 집회에 앞장서서 "빨갱이를 때려잡자"며 소란을 피우는 과격한 무리와는 거리가 멀다. 어쩌면 평생 남한테 험한 소리 한 번 못할 것 같은 착하고 순박한 소시민이다. 조육형씨는 박근혜를 구하겠다며 서울역의 태극기 집회에 나섰지만 현장의 거친 분위기에 압도당해 혼란을 느끼는 사람 중 하나다. 김종효씨 부부도 마찬가지다. 박정희 추도식 앞에서 격렬한 마찰을 빚는 박사모와 촛불시민들을 뒤로하고 조용히 추도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조육형씨는 매일 아침 박정희 사진 앞에 절을 올린다.

조육형씨는 매일 아침 박정희 사진 앞에 절을 올린다. ⓒ 인디플러그


박정희·육영수에 대해 생각만 해도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 매일 아침 박정희 사진 앞에 꾸벅 절을 하고 감사 인사를 하는 사람. 그들의 시선에서 박정희와 육영수는 어렵고 힘들었던 젊은 시절을 살아간 그들의 마음을 다독이는 근엄한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그들의 힘들고 아픈 마음을 위로받는 마음의 거처였다. 고로 박정희는 끝까지 자신들이 지키고 섬겨야 할 군주였다.

잊힌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2004년 총선 당시 정동영 의원이 던진 말은 노인들의 크나큰 공분을 샀다.

"미래는 20대, 30대들의 무대다. 그런 의미에서 한 걸음만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면 60대 이상 70대는 투표 안 해도 괜찮다. 꼭 그분들이 미래를 결정해놓을 필요는 없다. 그분들은 어쩌면 이제 무대에서 퇴장하실 분이니까."

'광주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한 영화 <26년>에서는 대통령 경호팀장인 '최 계장'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최 계장은 80년 광주민주화운동 현장에 투입됐던 전투경찰이었다. 그는 이후 대통령의 경호팀장이 되어 광주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에게 외친다.

"넌 끝까지 뻔뻔하게 살아서 내 삶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해!"

2017년 3월 1일, 박근혜 탄핵이 결정됐다. 영화 속 조육형 씨는 힘없이 입을 연다.

"더 이상 자꾸 이렇게 묻는 거, 이제 그만합시다."

그는 더 말을 이어갈 힘조차 없다. 박정희 세대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박정희, 육영수를 찬양하고, 박근혜가 죄가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일까? 박정희·박근혜가 부정당한 것에 대한 분노도 있겠지만, 그들이 몸부림치는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이유는 고달픈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다고 자부하는 자신들의 삶의 전부가 부정당했다는 생각에서다. 그리하여 밀려드는 모멸감과 부끄러움 때문이다. 영화 속 조육형씨의 힘없는 모습이 이를 잘 대변한다.

 2012년 대선 당시 유권자 인터뷰, 나이든 세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2012년 대선 당시 유권자 인터뷰, 나이든 세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 KBS 2TV


지난 8월 24일 울산에서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 시사회가 열렸다. 이날 시사회에 참석한 박사모 회원들은 영화를 단체 관람하면서 눈물을 쏟기도 했다. 영화를 제작한 김재환 감독에게 "이런 영화를 만들어줘서 고맙다"며 손을 꽉 잡고 여러 번 감사 인사를 표하기도 했다.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의 감독 김재환씨는 말한다.

"연세가 있는 분들은 정치 성향과 관계없이 우는 분들이 많아요. 당신들의 시대를 떠나보내는 눈물이겠죠. 젊은 관객들은 둘로 나뉘어요. 같은 하늘 아래 저렇게 다른 세상을 사는 분들이 있다니 하며 비판하는 분도 있고,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를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 <고발뉴스> "<미스 프레지던트> 영화로 보수층 결집? 우려 안하면 좋겠다"(10월 29일) 중에서

적폐세력. 박근혜와 그 부역자들이 적폐청산 대상이라는 것은 이제 더이상 논쟁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멋모르고 그들을 순수하게 지지했던 이 사람들도 적폐세력으로 제거해야 할 대상인 것일까? 영화에서 본 그들은 괴물이 아니었다. 어쩌면 우리와 너무나도 닮은, 그리고 우리의 이웃이고 가족일 수도 있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다.

아무리 옳은 선택이라도 답을 정한 채 선택을 종용하는 행동 그 자체의 모습은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잘못된 선택을 할 권리 또한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최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불행하지 않은 최악의 선택을 막는 도구다. 그들의 선택이 잘못됐다 하더라도 마땅히 존중받아야 한다. "너희들이 틀렸어!"라는 말은 그들이 온몸으로 살아온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어쩌면 뜨거웠던 지난날에 안녕을 고하고 다음 세대에게 새로운 세상을 물려줄 때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세상의 순리라면 담담하게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젊은 세대들은 그것을 종용하면 안 된다. 그들을 마땅히 기다려 줘야 한다.

마음의 거처를 잃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박근혜는 떠났다. 그러나 그의 나이든 지지자들은 어디로 떠나야 하는가?

박근혜는 떠났다. 그러나 그의 나이든 지지자들은 어디로 떠나야 하는가? ⓒ 인디플러그


김재환 감독은 "언제까지 가운데 선을 그어놓고 저쪽엔 괴물이 산다면서 서로 비난하고 욕하고 싸우며 살 순 없잖아요.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최선을 다해 다가가려는 노력, 그걸 먼저 하는 게 현명한 거예요. 어떻게 이분들의 마음을 듣고 원통함을 풀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해요. 이분들이 모욕감을 느끼는 방식으로 개혁이 진행된다면 그 개혁은 반드시 실패합니다"고 말했다.

양귀자의 소설 <한계령>에는 6남매를 키워낸 큰오빠가 나온다. 그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가족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세월이 흘러 가장의 역할이 다했을 때, 그는 삶의 허망함과 허무함에 몸부림치며 술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소설에 삽입된 양희은의 노래 가사〈한계령>의 한 구절이다.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의 OST로는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라는 노래가 쓰였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뿐이리"라는 가사와 함께 박근혜가 탄핵으로 집을 떠나는 모습을 끝으로 페이드 아웃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사람은 공감받고 위로받길 원한다. 우리가 나이든 세대를 향해 던져야 할 것은 과연 정죄의 칼날일까? 그들의 시대가 끝이 났다고 하여 "내려가라 내려가라"하며 뒤에서 등을 떠밀 수는 없다. 박정희, 육영수, 박근혜라는 마음의 거처를 잃어 방황하는, 어쩌면 너무나도 순수하고 순박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상처를 위로받고 치유할 마음의 거처가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지난 10월 26일에 개봉한 영화 <미스 프레지던트>의 감상을 마치고 쓴 기사입니다. 본 영화감독인 김재환씨의 말대로 이 영화는 해석의 소지가 다양한 영화입니다. 저는 고향이 경상북도 구미입니다. 고향에서 자라며 봤던 고향 어른들을 떠올리며 이번 기사를 작성하게 됐습니다. 우리 세대들에게 필요한 것은 증오의 칼날이 아닌, 반대 세력에게 내미는 따뜻한 악수라는 것이라는 생각을 전하고 싶습니다.
미스 프레지던트 박사모 박근혜 영화 박정희
댓글16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안녕하세요. 정치, 사회, 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은 청년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