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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대된 조직

청년 활동가의 대거 유입으로 활기를 띤 민청련은 1984년 4월 17일 서울 청량리 소재 신흥교회에서 2차 총회를 열었다. 창립 당시 집행부는 구속될 각오를 했고, 그에 대비해 차지 집행부를 구상해 놓을 정도였으나 모두 살아남은 것은 물론 복학조치로 조직이 크게 확대되기까지 했으니 감개무량한 일이었다. 이날 총회에 참가한 인원은 약 180명에 이르렀다.

총회는 내부 행사이므로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안을 유지해야 했다. 특히 많은 인원이 모일 넓은 장소를 기밀 누출 없이 마련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총회 직전 '계원'들에게 전달된 장소는 회원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청량리에 있는 신흥교회였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는 윤반웅이었다.

그는 장준하의 동료로서 기독교계에서 존경받는 원로이자, 1974년 민주회복국민선언, 1976년 명동3.1민주구국선언 등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서 여러 차례 옥고를 치른 투사이기도 했다. 1990년에 향년 8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런 그였으므로 민청련에게 기꺼이 총회 장소로 교회를 내주었을 것이다.  

 2차총회가 열린 신흥교회는 현재는 옛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이름도 동녘교회로 바뀌었다. 왼쪽 사진은 윤반웅 목사
 2차총회가 열린 신흥교회는 현재는 옛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이름도 동녘교회로 바뀌었다. 왼쪽 사진은 윤반웅 목사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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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에서는 조직이 확대된 것을 반영해 부의장직을 2명으로 늘려 창립 당시부터 관여해 왔던 이명준과 고려대 출신의 노동운동가 한경남(2014년 별세)을 부의장으로 추대해 집단지도체제를 갖췄다.

이명준은 천주교 사회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지냈고, 창립 당시부터 모임에 참여해온 인물이었다. 한경남은 고대 재학 중 1974년 민청학련 사건,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 노동운동에 관여해오고 있었다. 그는 민청련 활동 이후 말년에는 친박연합, 새누리당 등으로 옮겨 정치를 하다가 2014년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한경남을 부의장으로 추대한 것은 대략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고대 출신들이 창립에 기여한 바가 컸으므로 그 공헌을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하나는 노동운동 출신을 대표로 내세움으로써 노동운동 측의 지지와 지원을 기대한 것이었다.  

 2차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이명준(왼쪽)·한경남(오른쪽) 부의장
 2차총회에서 새로 선출된 이명준(왼쪽)·한경남(오른쪽) 부의장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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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부를 신설하다

2차 총회에서 또 하나 특기할 일은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이었다. 여성부를 맡을 책임자는 당시 집행부에서는 가장 낮은 학번인 77학번의 임태숙이었다. 다른 부서 책임자들과의 학번 차이가 커서 부장이 아닌 부장 대리로 임명했다.

집행부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은 당시 여성 운동의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한국의 여성운동은 다른 진보적 운동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러시아혁명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되면서 태동됐다. 그리고 해방 정국에서 좌우가 대립하는 국면에서 여성운동 역시 좌우로 분립됐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진보적 여성운동은 다른 모든 진보운동과 함께 거의 소멸됐다.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 아래서 보수적 여성운동은 집권세력의 보호 아래 일종의 봉사단체 수준에 그쳐있었다.

박정희 정권이 강권을 동원해 밀어붙인 경제개발 과정에서 억눌리고 짓눌린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운동에 나서게 되는데, 그 구성원의 상당수는 늘 여성이었다. 즉 70년대 노동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이 대단히 컸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 여성운동에 대한 모색이 새롭게 싹트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한국 여성운동의 모태 역할을 한 기구는 강원용 목사가 창설한 '크리스찬 아카데미'였다.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는 여성사회교육과정을 도입했는데, 이 교육을 이수한 여성 활동가들이 1970년대 말에 '여성유권자연맹'을 만들어 여성의 정치적 각성을 위해 활동했다.

한편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신의 일부 여성들은 당시 미국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이 사회적 이슈가 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폭력에 노출된 여성을 위한 운동을 주창하며 1983년에 '여성의 전화'를 설립했다. 이러한 여성운동 단체들은 대체로 중산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활동했다.

당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으로 무장한 학생운동가들, 특히 여성학생운동가들은 이러한 운동에 '부르주아적' 혹은 '프티 부르주아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불렀다. 계급적 한계를 지닌 운동, 민중을 외면한 운동이라는 시각이었다. 그리고 1980년에 여성학생운동가들의 인식을 확인해주는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 여성유권자연맹 대표는 우리나라 여성운동 1세대 대표주자라고 불리는 김정례였다. 김정례는 일제강점기에 초등학교를 다닌 것이 학력의 전부였지만 왕성한 활동력으로 '자수성가'한 여성운동가였다. 그리고 박정희 시대에는 김대중, 이희호 부부 등 재야 민주세력과 가깝게 지내며 활동했다. 그런데 전두환이 '광주 학살'을 저지르고 권력을 잡아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에 김정례가 여성 대표로 참여한 것이다.

이에 충격을 받은 젊은 여성활동가들이 여성유권자연맹을 탈퇴하고 별도의 조직을 만든다. 그것이 1983년에 창립한 '여성평우회'(약칭 여평)였다. 여평은 1987년에 여성민우회로 이름을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05년 호주제 폐지는 여성민우회가 이룬 큰 업적이다.

 (위 사진) 여성평우회(1983~1987)가 발행했던 기관지. (아래 사진) 1987년 9월 여성민우회 창립식
 (위 사진) 여성평우회(1983~1987)가 발행했던 기관지. (아래 사진) 1987년 9월 여성민우회 창립식
ⓒ 민청련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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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평은 비록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여성활동가들이 주축이 되었지만, 그 활동의 축은 이전 유권자연맹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많은 여성학생운동가들은 '여성의 전화' 및 여평과는 다른 '변혁운동으로서의 여성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그 시점인 1984년 4월 민청련 2차 총회에서 집행부 안에 '여성부'를 신설한 것이었다.

민청련의 여성운동론

따라서 민청련 여성부의 여성운동론은 청년운동론과 궤를 같이하게 된다. 청년운동론에서의 청년이 단순히 연령을 기준으로 한 구분이 아니었듯이, 민청련에서 말하는 여성은 단지 성별 구분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사회변혁에 앞장서는 존재로서의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여성부를 이끌 인물로 다른 부서와 달리 나이 어린 77학번의 임태숙이 발탁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민청련 여성부는 발족하면서 특별히 '여성부 발족에 붙여'라는 제목의 긴 결의문을 발표했다. 이 결의문에서는 "여성 대중들은 같은 계층의 남성들이 받는 경제적 억압과 더불어 성차별이라는, 이중적 억압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그러한 억압을 타파하기 위한 6가지 행동지침을 내걸었다. 그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립 분산된 여성 역량을 결집, 체계화하여 여성의 진정한 해방과 민주화운동을 위해 투쟁한다.
1. 기층여성들이 처해 있는 경제적·성적 억압의 현실을 폭로하고 이를 여론화하며, 이들의 운동을 지원한다.
1. 바람직한 여성운동을 지향하는 타 여성 세력과의 연대운동에 참여한다.
1. 우리의 현실이 요구하는 여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연구 및 조사 활동을 한다.
1.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의해 길들여지고 왜곡된 문화를 지양, 현실에 뿌리 내린 건강한 여성문화를 창조한다.
1. 민주화운동 세력 내부에도 온존하고 있는 여성 차별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이 중 특히 마지막 결의가 눈에 띄었다. 운동권 안에서도 성차별이 존재한다는 것을 '용기 있게' 폭로한 것이었다. 이는 이후 다른 단체의 여성운동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민청련 초대 여성부장을 역임한 임태숙.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수련회 당시 모습
 민청련 초대 여성부장을 역임한 임태숙. 2008년 10월 민청련동지회 강화도 수련회 당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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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곤의 등장

한편 민청련 조직의 강화는 공개된 집행부에만 적용된 것이 아니었다. 민청련은 창립 당시부터 공개된 집행부 이외에 공개되지 않은 조직으로 상임위원회를 두었다. 초대 위원장은 최민화였다. 상임위는 공개된 집행부의 공식적 활동과는 다르게 노동, 농민, 여성, 빈민 등 각 부문 운동과의 연대 및 지원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부서였다. 또한 정치, 경제, 국제관계 등 각 분야에 대한 정세를 분석하고 정책을 연구하는 기능도 있었다.

상임위는 이러한 일상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공개된 집행부가 구속되어 공석이 될 경우 빠른 시일 안에 그것을 복원해내는 임무도 맡겨져 있었다. 일종의 섀도 캐비닛이었다.

이러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상임위원장에 또한 매우 의미 있는 인물이 영입되었다. 그는 바로 김병곤이었다.

김병곤은 서울대 운동권을 이끌어온 지도자로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고 최후진술에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1980년 '서울의 봄' 때 서울대 운동을 이끈 인물 중 한 사람이기도 했다. 당시 서울대에서는 5월 1일 개교 이래 최초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 1만 명이 참석하는 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5월 15일, 서울역 앞에 20만 시위대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이 모든 집회의 기획에 그가 관여했다.

이후 광주 항쟁을 거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는 모처럼 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나 직장인이 되었다. 민청련 창립에 그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오랜 투쟁과 투옥으로 지쳐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 그는 운동을 외면할 수 없었다. 유화 국면을 통해 운동의 전선이 넓어지고, 경험 있는 운동가가 요청되는 국면이 조성되자 민청련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민청련 간부 및 회원들은 그의 참여를 크게 반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가 펼칠 지도력에 큰 기대를 걸었다.

이후 김병곤은 민청련 활동에 온 몸을 던졌고, 옥살이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키가 크고 기골이 장대했지만 그의 활동은 그 큰 육신이 감당하기에도 너무 벅찬 것이었을까, 1991년 38세 한창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87년 가을 홍제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을 당시의 김병곤 민청련 상임위원장
 1987년 가을 홍제동 성당에서 열린 시국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석했을 당시의 김병곤 민청련 상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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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는 이틀 앞으로 다가온 4·19 24주년을 기념하여 '민주화의 횃불을 드높이기 위하여'라는 시국성명서를 채택했다. 이 성명서는 4월 19일 서울 수유리 4·19묘지에서 거행된 기념식에서 공개적으로 낭독된다.

총회를 마칠 무렵 이미 정보기관은 눈치를 채고 정복 및 사복 경찰 200여 명을 교회 주변에 배치해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하지만 정보기관이 판단하기에 아직은 총회 자체만으로 연행할 상황은 아니었던 듯하다. 회원들은 긴장한 가운데 무리를 지어 청량리 로터리까지 행진을 했다. 이때 구호를 외치거나 했으면 당장 연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회원들은 침묵의 행진을 함으로써 그들이 연행할 빌미를 주지 않았다. 무언의 시위를 했다고나 할까.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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