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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서울시장, 그를 관찰한다. 이렇게.
 박원순 서울시장, 그를 관찰한다. 이렇게.
ⓒ 신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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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2018년 1월 6일 오전 11시 22분]

#1 퇴사

퇴사바람이 대한민국을 휩쓸고 간 요즘, 사실 너무 흔해져서 새로울 것도 없지만 나 역시 남들처럼 취준생을 거쳐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배가 불렀다느니, 제정신이 아니라느니 이런 류의 소리를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언제나 내일에 있을 내일'보다 오늘부터 행복하고 싶었다.

문제는 벌어둔 돈을 창업한다고 다니면서 꽤 많이 소진한 상태라 밥벌이가 필요했다. 파트타임으로 SNS 계정을 운영하다가 지금의 '사장님', 박원순 서울시장 귀에 소문이 들어갔고 미팅을 하게 됐다. 그리고 예상 외로(?) 그의 지적인 모습에 끌려 홀린듯이 그를 브랜딩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배금주의와 사대주의에 허우적거리며 사는 내 인생 궤적과 공공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박원순이라는 사람의 인생 궤적의 싱크로율이 너무 떨어지기에 선뜻 나서질 못했다.

#2 수구꼴통

아버지와 나.
 아버지와 나.
ⓒ 신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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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어릴 때 기억 하나로 대신하고자 한다.

아버지는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고등학교 후배란 이유로 그를 '각하'라고 불렀다. 특히 유치원 때로 기억하는데, 동문 체육대회에 갔을 때의 일이다. 행사가 시작되고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각 그랜저에서 그놈의 '각하'가 내릴 때 기립하던 아저씨떼 그리고 그가 단상에 오르자 일사불란하게 경례를 하던 그 광경을 아직도 기억한다. 30년 가까이 된 기억인데도 그날이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을 보면 꽤나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사실 할아버지는 본인이 정치적 야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 번이나 낙마를 했고, 차마 미련을 버리지 못해 친척의 정치참모로 방향을 틀었고, 그를 8대와 14대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그의 동생이 재선 국회의원이 되는 데에도 힘을 보탰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인해 할아버지는 자신이 출마했을 당시의 유세 현수막을 깔고 잤다고 한다.

아버지는 항상 <신동아>를 즐겨봤고, 한창 한글을 배우던 나에게 그 월간지를 여러 번 소리 내어 읽게 시켰었다(조기교육이 이래서 무섭다). 물론 당시엔 한자가 사이사이 많다 보니 내용에 대한 이해는 없었겠지만 삼김이 먹는 김이 아니란 건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알게 됐다.

확실한 것은, 나는 이승복 어린이보다 공산당을 싫어했다.

#3 욕망

몸짓패 시절.
 몸짓패 시절.
ⓒ 신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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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이 되고 대학에 입학하면서 나의 세계는 큰 충돌을 맞았다. OT라고 부르는 대신 새내기 새로 배움터, 이른바 새터란 이름의 행사에 참여하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설악산의 한 유스호스텔에서 지내며 '교양'이란 프로그램에서 선배들은 나의 바이블이었던 <조·중·동>을 권력집단의 이익을 대신하는 집단으로 묘사했다. 그렇게 내가 알던 근현대사와는 완전히 대치되는 이야기가 펼쳐졌다.

충격이었다. 진실이 궁금해졌다. 사실 가까운 선배들의 말에 더 혹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린 마음에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이후로 선배들이 집회에 가자고 하면 곧잘 따라갔다. (솔직히 미팅이 있거나 술자리가 있으면 몰래 도망가기도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노래패와 몸짓패를 하면서 우회적(?) 방법으로 접근하며 나름의 탐구생활을 했다.

워쇼스키 자매(당시는 형제)의 매트릭스에는 없지만 내가 속한 세상에는 술 사주는 선배가 있었고, 그리고 거기엔 항상 매력적인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명 학회실이라 불리는 과방에 밤마다 모여서 노래하고 울고 웃고 그렇게 20대를 보냈다. 꽁냥꽁냥해지는 진실게임과 '김광석 다시 부르기'는 빠질 수 없는 재미였다. 청계천 8가에 나도 모르게 바이브레이션을 넣다가 예비역 형들한테 혼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추억이 방울방울 하다못해 줄줄 흘러넘치는 곳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도 내가 원하는 정답은 없었다. 인정 많고 따뜻한 사람들이었지만 욕망을 표현하는 것을 깨어있지 않은 행동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이건 어디까지나 사견임을 밝힌다).

기본적으로 욕망을 억누르고 숨길 때 그 욕망은 오염되고 타인을 희생시킬 가능성이 농후해진다고 믿는다. 반대로 자신의 욕망을 인정하고 드러낼 때 발전적인 방향으로 갈 확률이 높아질 것이란 가설을 가지고 있다. 상대방에게 간파당한 욕망은 날카로워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욕망에 충실한 내게는 '그때'의 생활이 마냥 편치 않았다. "벗들이 있기에 투쟁은 더욱 아름다운 것"이었고, "농민의 아픔을 얘기하며~ 울어본 저~억"도 있지만 답을 찾을 수는 없었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코스프레만 하다 보니 엇박자만 계속됐다. 그리고 그렇게 조금씩 도망갔다.

#4 공무원

박원순,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은 충분히 욕망지향적이라는 내 가설을 확인하고 싶다.
 박원순,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은 충분히 욕망지향적이라는 내 가설을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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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이 됐다. 상대적으로 평등의 가치보다는 자유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사회 시스템의 개선보다 개인의 반성과 노력을 더 우선시하는 사람이 됐다. 그렇다고 "복지 따윈!" 이런 수준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대다수가 납득할 수 있는 상식의 선 안에서 내가 우선시하는 가치들을 지켜나가겠단 얘기다. 물론 아직 내 안에서 그것들이 여물지 못한 이유로 모순이 발생하기도 한다. 다양한 정치적 사안이 복합적으로 맞물릴 때는 보기에 따라 빨갱이도 됐다가, 수구꼴통이 되기도 한다. 그럼 나는 '틀린 사람'인 건가? 아니면 내가 잘못한 건가? 잘못 알고 있는 건가?

이러한 질문에 나름의 답을 찾는 것이 나만의 사회 참여이자 민주주의에 대한 적극적 개입이라는 생각에 그 답을 찾고자 박원순 서울시장의 비서관이 됐다.

나와 가장 먼 거리에 있을 것 같은 사람과 함께 있다 보면 뭔가 깨닫는 게 생기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 대학생 때 찾지 못했던, 그 때는 그렇게 도망쳤었지만 이제는 그 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그리고 그가 살아온 삶의 여정은 충분히 욕망지향적이라는 내 가설을 확인하고 싶기도 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욕망을 썩 괜찮은 방향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그의 옆에서 '닥치고 찬양'이 아닌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를 관찰하고자 한다. 물론 감동을 받을 때에는 '순비어천가'를 부를 수도 있다.

만약 그에게 설득 당할 수 있다면 그놈의 낡아빠진 색깔론에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다. 보수든 진보든, 좌빨이든 수꼴이든 결국 우리의 삶은 자신만의 욕망을 가지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 있다고 믿는다. 그 방향과 농도가 사람마다 다를 뿐이지 않을까?

박원순이 품고 있는 욕망의 방향과 농도가 어디를 향하고 얼마나 짙은지를 최대한 낱낱히 파헤쳐 보고자 한다. 과거 사회운동가로서의 업적이 아닌 현재 시장으로서 재선까지 한 박원순의 욕망이 향하고 있는 방향을.

혹여라도 그의 욕망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면, 아니 가려고 한다면 이를 막는, 이른바 공무집행방해를 할 수 있는 공무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신영웅님은 'Uncreative Director, 서울시장 비서실 미디어 비서관'입니다. 이 글을 포함해 신영웅 비서관의 다른 글 역시 필자의 브런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태그:#박원순, #서울시장, #비서관, #관찰기, #원순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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