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갈대와 물억새가 가득 피어난 만경강변.
 갈대와 물억새가 가득 피어난 만경강변.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이름만 들어도 넓디넓은 평야와 풍성한 들녘이 떠오르고 왠지 포만감이 느껴지는 우리나라의 강은 단연 만경강(萬頃江)이 아닐까싶다. 만경은 수만 개의 이랑이라는 뜻이니 '넓은 들' 혹은 '너른 벌'을 끼고 있는 강이라는 말이겠다. 완주, 전주, 익산, 김제, 군산옥구를 지나며 서해로 흘러들기까지, 그야말로 전북의 평야를 살찌우는 강이다.

만경강이 품고 있는 평야를 '징게 맹게 외배미들(김제·만경 너른 들)'이라고 부른다. '징게 맹게'는 전라도 사투리로 김제와 만경, '외배미들'은 이 배미 저 배미 할 것 없이 모두 한 배미로 툭 트인 땅을 의미한단다. 만경강 하류에 형성되어 있는 평야는 '김제'와 '만경'의 합성 지명으로 금만평야로 불리기도 한다.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지은 새만금방조제도 여기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만경강은 전북 익산의 먼 북동쪽인 완주군 원정산에서 발원하여, 고산천·전주천 등의 지류와 합쳐지면서 삼례를 거치고, 익산의 남쪽을 지나 서해(새만금)로 흘러가는 길이 약 80km의 큰 강줄기다. 모래가 많은 물줄기였는지 원래 모래 사(沙) 자를 써 '사수', '사탄' 등으로 불리던 것이 일제 강점기에 '만경강'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풍성한 오일장이 열리는 익산북부시장

익산역 앞 차도를 자연스레 지나가는 경운기.
 익산역 앞 차도를 자연스레 지나가는 경운기.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흥미로운 가게들이 많은 익산역 앞 '문화예술의 거리'.
 흥미로운 가게들이 많은 익산역 앞 '문화예술의 거리'.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너른 평야가 연상되는 간판을 한 전북 익산역에 내렸다. 익산역 주변엔 전통재래시장이 많아 식사도 할 겸 장터여행하기 좋다. 역 앞에 있는 중앙시장과 위 아래로 북부시장, 남부시장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시장 건너편엔 구도심 거리를 살리기 위해 조성한 '문화예술의 거리'도 있다. 새로 생겨난 공방과 갤러리 외에 갑을이용원, 동석전자, 한일양복점 등 오래된 가게의 간판들이 흥미로워 안에 들어가 보고 싶게 했다. 

그 가운데 매 4일, 9일마다 닷새장이 열린다는 북부시장에 찾아갔다. 역 앞 도로를 따라 북부시장 가는 길, 웬 경운기 한 대가 털털거리며 천천히 차도를 지나가는데 뒤 차량들이 빵빵거리거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익산이라는 동네가 좋아졌다.  

익산시에서 가장 큰 시장이라는 장터답게 시장통 안이 미로처럼 복잡하고 길이 많다. 익산 오일장엔 날 것 그대로의 옛 장터 풍경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특히 가게 밖에 붉은 고기를 통째로 걸어놓은 정육점들은 영화에서나 볼법한 풍경이었다. 시장 상인 아저씨가 싸고 맛있는 집으로 추천한 '초원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어르신들은 밥값이 3천 원이란다. 할아버지와 손자 혹은 3대 가족이 함께 나와 오일장 구경을 하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흐뭇했다.

날 것 그대로의 옛 장터 모습이 남아있는 익산북부시장.
 날 것 그대로의 옛 장터 모습이 남아있는 익산북부시장.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시장통에 이리신협, 이리반찬, 이리방앗간 등 '이리'가 들어간 가게가 많았다. 초원 백반집에서 1995년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되면서 익산시가 됐다는 걸 알게 됐다. 익산역도 원래는 이리역이었다고. 더불어 해방이후 최대 열차사고라는 이리역 폭발사고에 대한 얘기도 듣었다. 1977년 11월11일 이리역에 화약을 싣고 정차한 열차의 폭발사고가 나면서 사망자 59명, 부상자는 1343명에 달했다.

이 중 철도원 16명이 순직했다. 당시 역전 창인동 삼남극장에서 '화춘화 리사이틀' 공연장도 천장이 내려앉았는데 이때 당시 무명이었던 코미디언 고(故) 이주일이 가수 하춘화를 구출하여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젊은층에게 11월 11일은 '빼빼로 데이'로 기억되지만, 익산 시민들에게 이 날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공포의 날로 기억된다고.

문화재가 된 국내 가장 오래된 간이역, 춘포역

정다운 만경강 둑길.
 정다운 만경강 둑길.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근대문화유산이 된 국내 가장 오래된 기차역 춘포역.
 근대문화유산이 된 국내 가장 오래된 기차역 춘포역.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만경강 둑길을 타고 김제에 볼 일 보러 간다는 자전거 탄 동네 아저씨 뒤를 따라 강둑길을 찾아갔다. 강 하류 끝에 물길을 가로막고 서있는 새만금방조제가 있는 데다 하천정비공사가 한창인 만경강은 물줄기가 메말라 아슬아슬하게 흐르고 있었다. 강둑길에 종종 차들이 지나가서인지 둑길 옆에 따로 자전거도로를 깔아놓았지만, 나는 굳이 강둑길을 달렸다. 왼편의 마을 풍경과 오른편에 펼쳐지는 강 풍경을 모두 보면서 달릴 수 있어서다.

강둑길을 오가는 자전거탄 어르신들에게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면 환한 미소로 화답해주신다.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면 수줍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그럴 때면 세상도 뭐 그리 나쁘지 않구나 싶다. 오수면까지 19km의 긴 강둑길이 이어졌는데 무려 일제 강점기 때 쌓은 제방이라고 한다. 농토를 늘리기 위해 제방을 쌓으면서 원래 S자 형태의 곡류(曲流)로 흘렀던 만경강은 직강화됐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닐 텐데 메마른 강가에 갈대와 물억새들이 가득 피어나 여행자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눈부신 햇빛을 받아 강바람에 흔들릴 때면 은빛 파도처럼 출렁여 저절로 자전거 페달을 천천히 돌리게 했다. '춘포지구'라고 써있는 이정표를 지나면 왼쪽 마을 풍경이 모두 쌀 익는 누런 평야로 변모한다. 야트막한 언덕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방이 훤히 뚫려 있는 평야 지대다. 만경평야는 넓기도 넓지만 한가로움과 평화로움이 마음을 평온하게 해주었다.

만경강 둑길위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
 만경강 둑길위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익산시 춘포면(春浦面) 동네는 예부터 넓고 비옥한 곡창지대가 있던 마을이다. 한자어 춘포를 풀어보면 우리말로 '봄 나루'다. 옛날엔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던 나루터 마을이었다. 이곳에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 춘포역이 있다. 아쉽게도 2011년 기차가 더 이상 서지 않는 폐역이 되었지만, 다행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기차 간이역으로 보존 가치가 인정되어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1914년 만경강변의 춘포 마을에 작은 간이역사가 하나 생긴다. 넓디넓은 만경평야 한가운데로 철도가 들어선 것이다. 그 10년 전부터 일본의 거대한 농업자본이 익산 춘포로 몰려왔다. 만경강 일대 들녘은 일본인 거대 농장주가 독차지했고 수탈한 쌀을 운반할 교통수단이 필요했다. 쌀을 싣고 갈 춘포역은 그렇게 생겨났다.

간이역외에 지금도 춘포면 동네엔 호소카와 농장가옥, 대장 정미소, 호소카와 농장 주임관사(김성철 가옥) 등이 남아있다. 당시 역 이름은 대장역(大場驛)으로 마을 이름도 대장촌으로 바꾸었다. 대장은 '넓은 들(평야)'의 의미다. 1996년에야 현재 이름 춘포역으로 개칭했다. 마을엔 '대장 미용실', '대장 교회', '대장촌 식당' 등 당시 지명의 흔적이 남아있다. 

춘포역을 지키며 여행자를 맞이해 준 명예역장 아저씨.
 춘포역을 지키며 여행자를 맞이해 준 명예역장 아저씨.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일제강점기에 자행된 '쌀 수탈'을 '쌀 수출'이라고 주장하는 학자, 교수들이 있다. 당시 일본은 막대한 양의 쌀을 조선에서 사들여 자기 나라에 가서는 다섯 배의 값을 받고 팔았다. 이렇게 대량으로 쌀이 유출되자 조선의 쌀값이 오르게 된다. 세금을 내거나 고리대를 갚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헐값으로 일본인에게 쌀을 판 조선의 농민들은 다시 비싼 값에 쌀을 사먹는 악순환에 빠져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쌀 수출'을 주장하는 이들의 눈은 당시 배를 곯고 곯다가 살기위해 만주와 연해주로 떠난 수많은 동포들이 보이지 않는 외눈박이지 싶다. 

간이역답게 소담한 몸체와 맞배지붕(양쪽으로 경사진 지붕)이 정답다. 에메랄드 색으로 덮인 역사 안에는 그 옛날 춘포역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 등 추억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역 앞에 향나무도 멀쩡하고 간이역이 꽤 깔끔하게 보존되었구나 싶었는데 명예역장님이 관리를 하고 있었다.

철도공사를 퇴임한 동네 주민 아저씨가 명예역장으로 간이역을 관리하며 여행자들을 맞고 있다. 역장님은 춘포역의 전성기는 1960~70년대였단다. 전국 각지에서 만경강 모래찜질을 하러 춘포역을 통해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고. 방문 전 명예역장님께 연락을 하면 역 안내와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풍광 좋은 강변 정자, 비비정(飛飛亭) 마을

만경강과 관광지가 된 만경강 철교가 보이는 풍광좋은 정자 비비정.
 만경강과 관광지가 된 만경강 철교가 보이는 풍광좋은 정자 비비정.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푸근한 관광지 마을 '비비정 마을'.
 푸근한 관광지 마을 '비비정 마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막사발 미술관으로 옛 기차역을 양보하고 현대식 기차역으로 이전한 삼례역(전북 완주군)이 있는 삼례읍 강변에 들어섰다. 하구의 새만금 방조제 때문에 힘을 잃고 기운 없이 흐르던 강물은 강폭이 넓어지면서 비로소 만경강의 풍모를 드러낸다. 삼례를 지나는 만경강을 '한천(큰 물줄기)'이라 부를 만했다. 새만금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진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는 감조하천이었단다. 

강변에 흥미로운 이름을 가진 정자 비비정(飛飛亭)이 나타났다. 노을에 물든 황금빛 강물에 황포돛대가 떠 있고, 잔풀 하나 없는 깨끗한 백사장엔 기러기 떼의 그림자가 깃들던 곳이라니 상상만 해도 황홀하다.

유장한 강줄기와 함께 만경강 철교, 철교 위에 서있는 열차가 한눈에 펼쳐진다. '완산8경'에 오를 만 했다. 철교와 열차 모두 운행하지 않는 관광지로, 1928년에 지었던 만경강철교는 등록문화재(579호)가 됐다. 열차 안에 식당과 카페, 갤러리가 있는데 모두 창문을 통해 만경강이 보인다. 풍광 좋고 유서 깊은 정자가 있어서 그런지 동네 이름을 아예 비비정 마을로 지었다. 

옛 양곡창고를 살려 조성한 '삼례문화예술촌'.
 옛 양곡창고를 살려 조성한 '삼례문화예술촌'.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복선화된 전라선 삼례역사가 새로 지어지면서 옛 삼례역은 세계 막사발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우리에겐 흔하고 평범한 듯 보이지만 외국인들에겐 최고의 자연미, 인간미가 돋보인다는 격찬을 받는 막사발이 다양한 모양으로 전시돼 있다. 일본에선 국보로 대접받는 우리 조상들의 자랑스러운 유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장터에서 쓰는 듯한 막 만들어진 찻잔이 일본인들의 눈에는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연스러움이라며 경탄을 받고 있으니 예술의 세계란 알다 가도 모를 일이다. 막사발 박물관 옆엔 '삼례문화예술촌 (www.srartvil.kr)'이 있다. 광복 후 헐릴 뻔한 일제 강점기 때의 옛 양곡 창고를 살려 조성됐다. 미술관과 문화카페, 책공방, 목공소, 책 박물관 등 흥미로운 공간이 들어서 있다. 여행자를 위한 게스트하우스도 있어서 여유 있게 삼례여행을 할 수 있었다.

울긋불긋 감으로 물든 만경강 상류

이맘때 만경강변길은 진한 뜰깨 냄새가 진동한다.
 이맘때 만경강변길은 진한 뜰깨 냄새가 진동한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만경강길에서 마주친 귀여운 염소들.
 만경강길에서 마주친 귀여운 염소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삼례읍에서 봉동읍, 고산면 방면의 만경강 상류를 향해 이어지는 뚝방길 아래, '만경강자전거길'(21㎞)이 깔려있다. 차도처럼 만들어 놓은 2차선의 넓은 자전거길이 아닌 좁지만 풋풋한 기분이 드는 강변길이다. 이유는 강변 자전거 길에서 마주치는 재미있는 풍경 때문. 어디선가 진하고 고소한 들깨 냄새가 난다 했더니 논 옆에 앉아 들깨를 터는 주민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까맣고 귀여운 염소들이 길을 막고 서있어 지나가지 못하고 서로 쳐다만 봤다. 곧 아저씨 한 분이 어미 염소를 데리고 지나가자 다른 염소들이 뒤 따라 갔다. 염소는 어미 한 마리만 관리하면 방목을 해도 다른 염소들이 도망가지 않는단다.   
 
봉동읍 봉동교가 지나는 마을 강변에서 만경강 제일의 노거수 나무들을 만나 반가웠다. 수백 년 세월을 못 이겨 조금씩 허리가 굽었지만, 강과 마을의 수호신처럼 서있는 장대한 나무들이 마치 믿음직한 봉동읍 어르신들 같았다.

오리가족의 대화소리가 들려오는 고적한 만경강 상류.
 오리가족의 대화소리가 들려오는 고적한 만경강 상류.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상류로 갈수록 시골풍경이 이어지면서 인심도 더욱 후해지는 듯했다. 만경강 강둑길에 심어놓은 앙상한 벚나무와 달리 길섶 마을엔 주홍빛 감이 열린 감나무들로 풍성했다. 긴장대로 감을 따던 주민들이 큰 팽이 모양의 감을 건네주었다. 이맘 때 만경강은 온통 울긋불긋 감으로 물드는 물줄기다. 길쭉한 장대를 들고 감·밤·대추를 따는 주민들이 사는 강변마을,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는 호젓하고 정겨운 풍경이었다.

만경강의 상류 끝 동네 고산면엔 완주군에서 운영하는 큰 자연휴양림이 유명하다. 마을 안 작은 광장에 조성한 고산미소시장엔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예쁜 카페와 가게, 음식점이 들어서 있다. 오일장날엔 작은 동네가 장터로 꽉 찬다. 익산북부시장과 같은 장날이라 운좋게도 하루에 닷새장을 2번이나 구경하게 됐다.

닭장에 못 들어갈 정도로 커서 개처럼 목줄을 한 수닭이 장터에 나와 큰 목청을 자랑하고 있는 가운데 마을에도 강에도 해가 저물어 갔다. 만경강은 최상류에서 고산천과 합류하면서 대아저수지를 향해 오리가족과 함께 느긋하게 흘러갔다.

* 주요 자전거 여행길 : 익산역 - 익산북부시장 - 만경강 둑길 - 춘포면 춘포역 - 삼례읍 비비정 마을, 삼례문화예술촌 - 고산면 미소시장 (약 35km)

덧붙이는 글 | 지난 10월 14일에 다녀왔습니다.
제 블로그(sunnyk21.blog.me)에도 송고했습니다.



태그:#만경강, #익산북부시장, #만경강자전거여행, #춘포역, #비비정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