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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관장 박명림 교수)은 박정희 대통령 서거 38주년을 맞이하여 1979년 10.26 사건 이후 당시 재야 인사 김대중이 발표했던 애도 성명서를 최초로 공개한다. 1979년 10월 28일자로 발표된 김대중의 애도 성명은 영문으로 작성되었으며 미국에서 발표되었다. 국문으로 번역한 김대중의 애도 성명 전문은 다음과 같다.

1979년 10월 28일

고(故) 박정희 대통령 서거에 관한 성명

먼저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 저는 또한 정치적인 차이를 떠나 한국 국민 전체가 단합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북한이 현 상황을 오판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내부 혼란을 피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어려움은 오로지 우리 국민이 원하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의 회복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모든 국민의 지지와 협력을 확보할 수 있는 민주 정부만이 국민의 행복과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

김대중

한국, 서울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작성된 김대중의 애도 성명서 1979년 10월 28일 작성된 김대중의 애도 성명서
▲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작성된 김대중의 애도 성명서 1979년 10월 28일 작성된 김대중의 애도 성명서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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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애도 성명의 형식과 내용을 보면 당시 시대적 상황과 그에 대한 김대중의 인식과 전략이 잘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군사 독재 정권에 의해 형성된 김대중에 대한 음해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김대중에 대한 음해는 광주민중항쟁을 왜곡하는 극우 세력들의 입장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서 반박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발표된 김대중의 애도 성명서의 사료적 가치는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 현대사 최대의 정치적 라이벌이자, 현재까지도 한국 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두 역사적 인물에 관한 자료는 그 자체로 대중적인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위에서 제기한 몇 가지 대상에 초점을 맞춰 분석을 하려고 한다.

김대중은 왜 미국에서 영어로 발표했을까?

먼저 애도 성명의 형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성명은 영문으로 작성되었으며 미국에서 발표되었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런데 왜 국내가 아닌 미국에서 성명서를 발표했을까. 이는 당시 김대중이 처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그 당시 김대중은 연금을 당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으로 수감생활을 하다가 형집행정지로 2년 10개월만인 1978년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런데 석방 이후에도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될까지 1년여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동교동 자택에서 연금당하고 있었다.

연금 기간 동안 김대중은 동교동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고 외부인의 출입도 제한되었으며 심지어 금지되기도 하였다. 연금 기간 중에 김대중이 외부 세계와 간접적으로나마 통할 수 있었던 통로는 외국 특파원들의 방문과 전화 통화 두 가지뿐이었다.

당시 국내 언론은 김대중을 접촉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으며 심지어 관련 기사를 쓰려고 해도 김대중의 이름을 제대로 쓸 수도 없었다. 당시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언론에서 거론되는 것조차 금지된 상황이었다. '동교동 모씨' 등으로 불리우고 있었을 정도로 김대중에 대한 언론통제는 엄격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애도 성명을 영어로 미국에서 발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 김대중과 전화로 주로 연락을 했던 인물은 1972년 김대중의 1차 미국 망명때부터 인연을 맺어 김대중의 미국 비서실장 역할을 했던 재미인권운동가 이근팔이다.

이번에 공개한 이 사료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2005년 미국에 거주중인 이근팔 자택을 방문하여 직접 기증받은 자료 중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이근팔은 김대중 관련 수 많은 1차 자료를 자신의 미국 자택에 보관하고 있다가 이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에 기증했었다.

그렇게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 김대중과 이근팔이 통화하면서 김대중이 애도 성명의 내용을 구두로 전달했고, 이것을 이근팔이 영어로 번역해서 미국에서 발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김대중의 애도 성명서를 제대로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도 확인되고 있지만 당시에 언론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면 김대중에게 가한 군사 독재 정권의 여러 음해는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문제는 뒤이어 나타나는 광주민중항쟁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데, 이것은 지금 나타나고 있는 역사 왜곡과 연결되는 것이다.

1978년 12월 석방 직후의 모습 2년 10개월 여 동안 투옥된 직후의 모습. 감옥에서 다리 부상이 악화되어 이 때부터 지팡이를 짚게 되었다.
▲ 1978년 12월 석방 직후의 모습 2년 10개월 여 동안 투옥된 직후의 모습. 감옥에서 다리 부상이 악화되어 이 때부터 지팡이를 짚게 되었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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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경계하고 있었던 김대중

그 다음으로 살펴볼 부분은 애도 성명 내용이다. 이 성명서에서 주목할 부분은 바로 김대중이 제일 먼저 북한의 오판 가능성을 경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부분은 2가지 함의가 있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실제 북한에 대한 경고다.

북한은 1968년부터 1969년까지 매우 호전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시기 북한은 한국을 상대로 1.21사태와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미국을 상대로 푸에블루호 납치, EC-121기 격추 등 매우 위험한 군사적 도발을 무차별적으로 감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조가 영향을 주어 1976년 8월 판문점도끼만행사건까지 일으켰다.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은 북한의 이러한 위협을 국내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고 있던 김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조성될 민주화 국면에서 북한 변수는 매우 걱정되는 지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북한이 오판하지 말 것을 먼저 경고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 세력을 용공 세력으로 몰고 가려는 당시 군사 정권과 그 지지 세력에 대한 견제 의미도 담겨 있다. 그래서 한국의 민주화 세력은 친북도 아니고 용공도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한 것이다. 이것은 김대중이 훗날 햇볕정책의 원리를 제시할 때 '튼튼한 안보'를 제일 먼저 강조한 것을 연상시킨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극우 세력들이 광주항쟁과 김대중을 북한과 연계시켜서 음해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김대중은 이미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부터 이와 같은 독재 세력들의 음모를 간파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기도 하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

그 다음으로 김대중이 강조한 것은 한국의 민주화다. 한국의 민주화가 이뤄져야 혼란을 종식시키고 진정한 안정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그의 메시지는 미국을 향한 것이다.

냉전시기 미국은 반공을 이유로 우익독재 정권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미국을 향해서 진정한 반공을 위해서라면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었다. 이것은 1970년대 반유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면서 김대중이 일관되게 강조한 논리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김대중은 미국이 한국의 군사 독재 정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동북아 지역의 반공 국제연대를 위해서 한국의 군사 독재를 용인한다고 지적했다.

김대중은 미국을 상대로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우익 독재 정권의 존재야말로 미국이 중요시하는 반공국제연대에 걸림돌이라는 점을 지적하면서, 미국의 대한정책 전환을 촉구했었다. 한국 문제가 국제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반공'과 관련해서 강조하여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렇다고 김대중이 한국의 민주화를 미국이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김대중은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비판했을 뿐, 한국의 민주화는 한국 국민 스스로 쟁취해야 하는 과제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1979년 12월 8일 연금이 해제된 직후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이희호 달력에 X표시된 날이 1979년 연금당한 날을 의미한다.
▲ 1979년 12월 8일 연금이 해제된 직후 동교동 자택에서 김대중-이희호 달력에 X표시된 날이 1979년 연금당한 날을 의미한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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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에 의한 평화적인 민주화 이행을 지향했던 김대중

군사 독재 정권은 김대중을 과격한 선동을 일삼는 정치인으로 음해했지만, 김대중은 안정 속에서 변화와 개혁을 지향한 민주주의자였다. 김대중은 독재 정권이 민주화 조치를 거부하면 이에 맞서 국민의 힘으로 민주 혁명을 성공시켜 민주화를 쟁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렇게까지 가기 전에 독재자들이 상황을 인식하고 민주화 조치를 취해서 타협을 통한 민주화 이행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었다. 1986년 건대 사태 이후 김대중이 전두환 대통령에게 개헌을 요구하면서 '조건부 불출마 선언'을 한 이유도 그것과 관련이 있다.

1986년 '조건부 불출마 선언'은 많이 알려진 내용이지만 김대중은 1979년에도 그랬다. 김대중은 1979년 5월에 그 당시 측근인사였던 예춘호, 양순직, 박종태 등을 통해서 박정희 대통령과의 대화를 시도했었다. 예춘호 등이 차지철과 만나 김대중-박정희 회담 성사를 위해 노력했지만 결국 대화는 이뤄지지 못한 채 10.26이 발생한 것이다.

그 때 만일 대화가 성사되었다면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개헌을 비롯한 '민주화 이행'에 대한 로드맵을 공동으로 만들고 그 이후 박정희 대통령은 자연스럽게 퇴진하는 방식의 민주화 이행안을 두고 논의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김대중은 북한의 존재, 미국의 영향력, 우익 독재 세력 힘 등을 고려할 때 직선제 개헌을 통해서 선거에 의한 평화적인 정권교체를 지향했었다. 김대중이 비폭력, 비용공, 비반미를 강조한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다. 이처럼 김대중은 안정적인 방식의 민주화 이행을 구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군사 독재 세력은 김대중을 '과격한 선동분자', '파괴주의자' 등으로 악의적인 음해를 자행했다. 그러나 박정희에 대한 애도 성명 그리고 1979년에 보여준 김대중의 정치적 행동 등을 놓고 보면 이와 같은 군사 독재 세력의 음해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터무니없는 거짓임을 알 수 있다.

김대중이 지향했던 통합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김대중은 박정희 정권 시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망명과 투옥, 연금 등 한 인간으로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박정희 정권에 의한 김대중의 탄압과 그로 인한 김대중의 수난의 역사를 여기서 간단히 언급하기 힘들 정도다.

김대중은 10.26 직후 박정희 대통령이 자신의 구상을 받아들여 민주화 이행의 결단을 내렸다면 10.26과 같은 불행한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그런 점에서 김대중 애도 성명 첫 번째 문장에는 정적이자 자신을 모질게 탄압했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그와 같은 정적의 죽음 앞에서 깊은 애도의 뜻을 밝히는 당시 김대중의 모습을 통해서 그가 용서와 화해를 통해 진정한 통합과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훗날 정치적 자유를 획득한 김대중은 박정희 세력을 포용하고자 하였다.

김대중은 정치적 노선과 가치에 대해서는 원칙을 지켜가며 불굴의 의지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정치 이외의 측면에서는 최대한 포용하고 함께 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 외연을 점차적으로 확장해간 것이다.

김대중은 포용을 통해서 잡탕을 만들려고 한 것이 아니라, 포용하려는 세력의 적대감을 완화시키고 우호적인 관계로 변모시켜 궁극적으로 자신이 지향하고자 했던 정치적 가치와 노선을 실현시키는 데에 정치적 동력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이 김대중이 지향했던 통합의 진정한 의미이며, 박정희 대통령 서거 직후에 나온 애도 성명서에도 그와 같은 인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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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박사입니다. 올 해 2월에 '진보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반노무현주의, 탈호남 그리고 김대중 노무현의 부활'을 냈습니다. 뉴라이트 세력에 의해서 형성된 진보 내부의 의식의 식민화 현상을 분석한 책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왜 진보는 무능하고 보수는 유능하다고 생각하는가'(2016),'이인제는 이회창을 이길 수 없다-노무현 필승론'(2002) 등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