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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고양이였던 제이는 우연히 내 품에 왔다. 함께 살기 시작한 지 겨우 6개월 남짓, 입양 당시에 분명 병원에서 건강하다고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바로 병원에 데려가서 몇 가지 검사를 진행했지만 선생님은 계속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일 큰 병원으로 가서 CT를 찍어봐야 할 것 같다는 것이 최종 결론이었다.

그날 밤, 제이를 산소방에 입원시키고 집에 가야 했다. 제이는 좁고 투명한 병실에 들어가 여기가 어딘지 당황하는 것 같더니, 내가 '제이야, 내일 올게' 하니까 숨이 가쁜 와중에도 몇 걸음을 걸어 문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얼굴을 바싹 붙이고 나를 향해 다가오려는 듯 '냐아앙' 울었다. 그 작고 약한 동물을 낯선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서야 했던 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괴로웠는지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 후 제이는 큰 병원으로 옮겼다. 나는 '마취하다가 불의의 사고가 있어도 받아들이겠다'는 요지의 동의서에 몇 번인가 사인을 했고, 어쩌면 제이는 나를 만나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일년 넘게 병원을 드나들며 거의 팔백만 원 넘는 비용을 병원비로 썼고, 다행히 지금 제이는 내 곁에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새근새근 잘 자고 있다. 나는 제이에게 자주 내 곁에 남아줘서 '고맙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보호소의 늙은 개가 가족을 만날 확률 

유기동물 보호소에 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해도 즐겁게 떠올리기 어렵다. 시에서 운영하는 보호소는 열흘 남짓의 공고 기간이 끝나면 아이들을 안락사 시키고, 안락사가 없는 개인 보호소는 늘 자리는 비좁고 손길은 부족하다.

한 살 이내의 어린 강아지나 고양이, 그중에도 품종이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입양 갈 기회가 조금 있지만, 보호소에서 몇 년을 지낸 경우라면 사실상 보호소에서 삶을 마치게 된다고 봐야 한다. 나이 들고 병치레도 잦은 보호소 개를 입양하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일도 가을이야> 표지
 <내일도 가을이야> 표지
ⓒ 헤르츠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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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림 작가의 <내일도 가을이야>는 바로 그 보호소의 늙은 개를 입양하고 나서 일어난 일들을 담은 에세이다. 유기동물 보호소에서 무려 10년을 머물러 살았던 '가을이'에게 가족이 생겼다는 건 무슨 의미였을까. 한순간도 사람의 손길을 혼자서 독차지할 수 없고,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고, 맛 좋은 간식도 조를 수 없는 보호소가 세상의 전부였던 가을이는 어느 날 차에 태워져 낯선 집으로 향하게 된다.

그곳에는 이제 가을이에게 온 신경을 쏟아 주고, 매일 산책을 시켜 주고,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주는 반려인과의 삶이 기다리고 있다. 어릴 때 보호소에 버려진 가을이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은 어쩌면 당장 마음을 열고 적응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보호소가 아닌 가족의 품에서 살아갈 기회를 얻었다는 건 앞으로의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이자 온기이기도 했으리라.

'한 평 남짓 견사에서 최소한 10년을 지냈다고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똑같은 사료, 똑같은 벽. 잠시 왔다 가는 봉사자들. 추위, 더위, 엄청난 소음. 개의 즐거움인 달리기나 땅파기는 절대 할 수 없는 상태로 긴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더군다나 가을이는 품에 안길 크기도 아니고, 이름 있는 종류도 아니고,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라 이렇게 보호소에서 여생을 마칠 확률이 높았다. 남은 날들이라도 따뜻하게 지내게 해주자 마음먹고 채비를 서둘렀다.'(19페이지)

물론 가을이와 함께 사는 건 입양자인 박혜림 작가에게도 새로운 도전이다. 더구나 노견이라 병치레가 잦은 가을이. 가을이는 집에 오자마자 심장사상충 판정을 받아 또 몇 번의 입원과 치료를 반복해야 했다.

"한 달은 케이지에 가두세요. 그동안 매일 처방약을 먹입니다. 그 후 석 달은 집안에서만 활동합니다. 한 달 한 번 예방약을 먹입니다. 그 후 6개월까지는 산책할 때 어깨줄 필수, 달리기는 금지입니다.(중략)" 10년을 갇혀 살았는데, 입양 오고 채 두 달도 뛰어놀지 못했는데, 다시 가두라니……. (29페이지)

그런 가을이를 지켜보며 얼마나 마음이 타들어갔을까. 가족을 만나 이제 막 꽃길이 펼쳐져야 하는데 자꾸 아픈 가을이를 보며 나까지 속이 상했고, 동시에 가을이가 보호소가 아닌 가족의 품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 안다는 듯이 의젓하게 굴면서도 처음에는 한 뼘 정도 떨어져 등을 돌리고 자던 가을이가 언제부턴가 엄마 품에 붙어서 의지하는 모습을 보일 때는 내 가슴이 다 벅찼다.

행복뿐 아니라 슬픔도 함께 나누는 사이가 된 거야 

내 작은 동물이 나를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우리가 만난 인연에 감사하고, 또 놀랍다. 반려견 가을.
 내 작은 동물이 나를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우리가 만난 인연에 감사하고, 또 놀랍다. 반려견 가을.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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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동물을 키우는 것은 귀엽고, 또 귀엽다. 네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고 엉뚱한 몸짓을 하는 걸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웃음이 비실비실 새어나오고, 휴대폰 갤러리는 어느새 아기 동물의 깜찍한 사진들로 가득 찬다.

그러나 아픈 동물, 늙은 동물을 키우는 것은 조금 다르다. 내 눈에는 여전히 아기 같고 사랑스럽지만, 같이 고통을 참거나 함께 울음을 터트릴 날들이 많다. 내가 뭘 해주어야 좋을지 몰라 답답하고, 그 답답함을 견디고 있을 반려동물에게 때로는 한없이 미안해진다.

그럼에도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시간이 늘어나고 같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은 정말 놀랍고 생경한 경험이다. 유기동물이라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말도 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다른 종족이다. 그런데도 함께 살아가면서 우리는 서로의 습관을 알아가고 서로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게 된다. 내 작은 동물이 나를 신뢰하고 좋아한다는 사실을 느낄 때마다 우리가 만난 인연에 감사하고, 또 놀랍다.

가을이는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기어코 실외 배변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산책을 하면서 엉뚱한 걸 집어 삼켜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한다. 뽀뽀는 하루에 한 번만, 타고난 밀당으로 애간장을 녹일 때도 있다. 박 작가는 가을이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몇 번이고 궁금해하고, 답을 찾아내고, 귀를 기울인다. 갇혀 지낸 10년 동안 딱딱하게 얼어붙은 가을이의 세상에 엄마의 사려 깊은 마음이 스며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리라.

내게도 그렇게 가족이 되는 과정이 있었다. 아팠던 내 고양이 제이가 고통스러운 항암 치료를 견뎌낼 수 있을지, 나를 원망하지는 않는지, 어쩌면 그냥 보내주는 게 제이를 위한 일은 아닐지, 어쩌면 길고양이로 살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지 고민스러운 날들도 있었다.

제이는 병원을 너무 자주 가다보니 수의사 선생님이 손을 못 댈 정도로 하악질을 하다가도 내가 다가가면 도대체 어디 있었냐는 듯 가만히 내 품에 안겼다. 집에 오면 비로소 홈그라운드라는 듯 당당하게 내게 방석 역할을 요구했다. 때로는 더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고, 때로는 뭐가 불편한지 말을 못 하니 답답해도 우리는 서로를 만나서 다행이라고 지금은 분명하게 생각한다.

<내일도 가을이야>는 2013년 <오마이뉴스>에서 '유기견 입양기 시리즈'로 연재된 바 있다고 한다. 한 페이지씩 기록해간 그들의 시간이 앞으로도 충분히 남아 있기를 바란다. 가을이도 자신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들어주는 엄마가 생겨서 분명 내일은 오늘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다. 내일의 산책은 아마 하늘이 더 새파랗고 단풍이 더 아름다운 가을날일 것이다.


내일도 가을이야 - 유기견 가을이.방랑묘 스밀라.비지구인 그녀의 애정행각 반려생활기

박혜림 지음, 헤르츠나인(2017)


태그:#강아지, #유기견, #서평, #내일도가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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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개 고양이 집사입니다 :) sogon_about@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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