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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 조직의 확대

1984년 대학가는 새학기는 전두환 정권의 복학조치로 제적생들이 복학을 할 것인가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특히 민청련 구성원들에게 복학 여부는 각 개인의 판단에 맡겨진 셈이 되었는데,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대체로 복학을 거부한 회원이 다수였다.
또한 복학조치가 정권이 의도한 대로 운동권의 약화라는 효과를 가져 오지도 못했다. 오히려 그 논쟁의 과정에서 학교를 떠난 뒤 흩어져 생활현장으로 돌아가거나 운동을 지속하더라도 소그룹 단위의 지하조직에서 활동하던 이들을 토론의 광장으로 불러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리고 그들 상당수가 민청련의 틀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즉 전두환 정권의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에 밑거름을 제공한 격이었다.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1984년 1월 연세대 제적생들이 개최한 제적학생총회 모습
 복학조치는 민청련 운동의 밑거름이 됐다. 사진은 1984년 1월 연세대 제적생들이 개최한 제적학생총회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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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창립 당시에는 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반 학번의 소수 활동가들을 주축으로 했지만, 복학 국면을 거치면서 70년대 중·후반에서 80년대 초반 학번 사이의 수많은 청년 활동가들을 회원으로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민청련은 이들을 각 학교, 학번 별로 조직했는데, 기존의 기별 모임을 대신해 '계모임'의 이름을 모방해 '계반'이라고 불렀다.
계반은 서울의 주요 대학을 망라했고, 규모가 큰 서울대의 경우엔 각 단과대학 별로 나아가 각 학번 별로 모임이 만들어졌다.
당시 성균관대 79학번으로 계반 모임에 참석했던 최경환(현 국민의당 국회의원)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성균관대의 제적생을 중심으로 한 운동권에서도 민청련에 조직적으로 참여하기로 하고 79학번에서는 내가 참석했다. 나는 낮에는 출판사 일을 하고, 저녁에는 민청련 일을 했다. 그때 우리 계반에는 은행원도 여럿 있었고, 이름 있는 건설회사 직원 등 나와 같은 직장인이 많았다. 대부분 학생운동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주' 모임은 모든 활동방향과 노선이 논의되는 대의원회의 같은 성격의 모임이었다. 또한 '계반'을 이끌며 시위와 집회에 참여하고 선전물을 배포하는 실천단위였다. 밤을 세워 토론하고 집회에 나가고 유인물을 뿌리고 하는 일들을 했다. 그리고 '계주'와 '계반'은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비공개 조직이었다. 민청련이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오랫동안 조직을 유지하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계주'와 '계반'과 같은 조직적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이 풍미하다

그러나 이 시기에 민청련 조직이 확대되었다고 해서 민청련 내부의 분위기가 한껏 고양돼 있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선 우선 그때 학생운동에 뛰어든 청년들의 고민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1970년대에서 80년대 초반까지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던 담론은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었다. 이른바 사적 유물론이라는 것으로, 간략하게 말하자면 인류의 역사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던 원시 공산사회가 붕괴된 뒤 고대 노예제 사회, 중세 농노제 사회, 근대 자본제 사회로 단계적 발전을 해왔다고 보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와 [공산당산언] 및 [자본론] 초판. 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이런 사진과 책의 소지는 곧바로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재해석한 일서들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했다
 칼 마르크스와 [공산당산언] 및 [자본론] 초판. 80년대 학생운동권에게 이런 사진과 책의 소지는 곧바로 국가보안법에 걸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이 재해석한 일서들을 통해 마르크스 사상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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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관의 근본 뼈대는 역사는 발전한다는 테제이다. 노예제, 농노제, 자본제가 모두 서로 대립하는 두 계급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의 자유와 평등의 정도는 단계적으로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고 있는 현재의 자본제 사회는 그 다음 단계로 발전해서 마침내 계급이 소멸된 사회에 도달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학생운동가들이 모두 사회주의자였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사회주의로의 이행 이전까지의 역사에 대한 발전사관은 대체로 받아들였다. 즉 우리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므로 기본적으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대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대립을 극복할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라는 것에 동의했다.
따라서 사회운동의 기본 축은 노동운동이어야 했다. 학생운동은 우리나라에서 4·19혁명을 주도했고, 80년 광주항쟁에서도 주력을 담당했던 고도로 정치적인 세력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만으로는 사회를 발전시키지 못한다, 근본적인 변혁을 이끌 주체는 노동자 계급이다. 따라서 학생운동가들은 노동자 계급을 각성시키고 조직하는 데 투신해야 한다는 것이 이때의 시대정신이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학생운동가들은 노동 현장에 투신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운동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이때 대학 학력으로 공장 노동자로 취업하는 것은 이상한 눈초리를 받기 십상이었기 때문에 고졸 학력으로 속이고 이른바 '위장 취업'을 했다. 주로 구로 공단과 경인지역 공단의 제조업 기업에 취업한 그들은 노동자들의 소그룹을 만들어 함께 노동법 등을 학습하며 의식을 일깨우고, 그들과 함께 노동자 권익을 위한 '경제투쟁'을 벌여나갔다.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출신으로 나중에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한 심상정이 이 당시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이라는 의류생산업체에 위장 취업하여 이러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1986년 구로공단 동맹파업 사건으로 수배된 시절의 심상정
 1986년 구로공단 동맹파업 사건으로 수배된 시절의 심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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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민청련 '계반'에서는 민청련 활동에 대한 일정한 비판의 분위기도 존재했다. 그것은 민청련 운동은 기본 계급 즉, 노동자 계급에 기초하지 않은 상층에서의 정치운동이므로 결과적으로 야당 등 제도 정치권의 아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라는 냉혹한 평가였다. 당시 야당은 민주한국당으로 김영삼, 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가 정치활동이 금지된 상태에서 정부의 간섭 아래 만들어진 것이었다. 따라서 학생운동 측에서는 그들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2중대에 지나지 않는다는 혹평을 하고 있었다. 민청련 운동이 그들과 같은 종류의 활동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모욕과도 같았다.

청년운동론을 정립하다

민청련 지도부에서는 이러한 상황을 방치해서는 구성원들을 붙잡아둘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학교를 떠난 학생운동 즉 청년운동의 개념을 정립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 임무는 서울대 출신의 이론가 이을호에게 맡겨졌다. 이을호는 전북 전주고등학교 출신으로 서울대 미학과 74학번이었는데, 이미 학창시절부터 천재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민청련 창립에 적극 참여하고 정책실장으로서 자기 역할을 맡았다. 그를 중심으로 정리하여 틀을 갖추어 모습을 나타낸 것이 민청련 판 '청년운동론'이었다.
주로 이범영을 통해 회원들에게 전파된 청년운동론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청년운동에서 청년이라 함은 반드시 연령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개념은 아니라는 것이다. 청년의 특성은 나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혈기 넘치는 활동성에 있다. 이러한 활동성은 곧 진보적인 흐름을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진보적 감수성으로도 연결된다. 즉 청년운동에서 청년은 새로운 이념을 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발할 활동으로 표출하는 이들을 가리킨다.
다음으로 청년운동은 전체 운동에서 '전술적 단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전술적 단위란 '전략적 단위'에 상대되는 개념이다. 운동의 궁극적 목표는 사회의 변혁이다. 그런데 사회 변혁을 이루어낼 운동체나 조직이라고 하면 그 형태는 전 계급을 아우르면서 그 운동을 총체적으로 지휘하는 '전위적 정당'이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운동가들의 인식이었다. 청년운동이 비록 높은 활동성을 가지고 정권에 맞서 싸우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운동의 지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전략적 단위'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질문이 자연스럽지만, 80년대 중반 당시의 운동권 안에서 이런 질문이 공식적으로 제기된 적은 거의 없다. 왜냐 하면, 그런 조직체라면 당시 법규상 국가보안법상의 반국가단체일 것이므로 지하에서 활동할 수밖에 없는데 그런 것을 입에 떠올린다는 것 자체를 금기시했다고 볼 수 있다. 또는 그런 조직체는 우리의 운동 수준상 아직 존재하지 않으므로 논의의 대상에 올리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노동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심부 역할이어야 했다. 86년 구로 동맹파업 당시 공장 창밖으로 현수막을 내거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노동운동은 전체 운동의 중심부 역할이어야 했다. 86년 구로 동맹파업 당시 공장 창밖으로 현수막을 내거는 대우어패럴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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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청련은 스스로를 '전술 단위'라고 한정함으로서 노동운동으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즉 민청련의 운동이 정권과 맞서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지만, 스스로를  전체 운동의 지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민청련 운동은 어디까지나 전체 운동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선언이었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에 기초하지 않은 민청련 운동의 효용성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것은 '선도적 정치투쟁'에 있었다. 노동운동은 비록 기본계급의 운동이고 장차 전체 운동의 지휘부가 되어야 할 '전략적' 운동이다. 그렇지만 아직은 미성숙하여 당장의 부당한 정권에 맞서 싸울 능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노동운동이 정치적으로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가.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청년들이 나서서 정권에 맞서 정치투쟁을 벌여나가야 한다. 거기에서 정치적 긴장이 조성되고, 민주화를 위한 공간이 열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운동의 발전을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할 것이다. 바로 그 임무를 민청련이 떠안는다는 것이었다.
민청련이 선도적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지하에 숨은 익명의 존재여서는 곤란하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 공개적으로 당당하게 활동해야 한다. 그것이 민청련이 공개적으로 창립대회를 열고, 시내에 공개 사무실을 개설하며 활동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렇지만 민청련이 모든 조직 전체를 공개할 경우 정권의 탄압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직은 공개된 부분과 공개되지 않은 부분으로 나뉘어야 했다. 즉 집행부는 대중과 정권 앞에서 공개적으로 활동하되, 집행부가 탄압으로 구속될 경우 그를 대체할 차기 지도부 및 그들을 충원할 회원 조직은 비공개로 운영되어야 했다. 이것을 민청련에서는 '반(半)공개 조직'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청년운동론을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민청련은 '청년들이 전술적 단위로서 선도적 정치투쟁을 수행하는 반공개 조직'이었다. 

반공개 조직 민청련에서 공개 및 비공개로 활동한 간부들. 윗줄 왼쪽부터 장준영, 박순섭, 한 사람 건너 장영달. 둘째줄 왼쪽부터 김병태, 유기홍, 박우섭, 김재승. 아랫줄 왼쪽부터 원혜영, 김근태, 최민화, 이을호, 임태숙. 사진은 1988년 김근태 석방 당시의 모습
 반공개 조직 민청련에서 공개 및 비공개로 활동한 간부들. 윗줄 왼쪽부터 장준영, 박순섭, 한 사람 건너 장영달. 둘째줄 왼쪽부터 김병태, 유기홍, 박우섭, 김재승. 아랫줄 왼쪽부터 원혜영, 김근태, 최민화, 이을호, 임태숙. 사진은 1988년 김근태 석방 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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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민청련, #청년운동론, #김근태, #심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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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저항하기 위해 1983년에 창립하여(초대 의장 김근태) 6월항쟁에 기여하고 1992년까지 활동한 민주화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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