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국은 우리나라에 AI에 대한 관심을 크게 불러일으킨 계기가 되었습니다. AI의 무한한 학습 능력과 기억력에 비하면 인간의 한정된 능력은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지요. 그 활용 분야 또한 다양해서 그동안 인간이 해왔던 많은 일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생전 모습을 모사한 AI가 등장하는,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입니다. 치매로 점차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 마조리(로이스 스미스 분)를 위해 테스(지나 데이비스 분)와 그녀의 남편 존(팀 로빈스 분)은 돌아가신 아버지 월터의 젊은 시절 모습을 한 AI '월터 프라임'(존 햄 분)을 들인 상태입니다. 월터 프라임은 다양한 정보를 바탕으로 마저리에게 좀 더 친밀한 상대가 되어 줍니다.

연극 원작 영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한 장면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한 장면 ⓒ 싸이더스, 아이 엠


이 영화의 원제는 < Marjorie Prime >으로, 2015년 퓰리처상 최종 후보에 오르기도 한 동명 연극이 원작입니다. 원작자 조던 해리슨은 명성 있는 극작가로서, 최근에는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의 각본 작업에 합류하기도 했습니다.

연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 만큼 생생한 대화 장면들이 인상적입니다. 영화라는 매체에서만 사용 가능한 시청각 효과와 편집 기술은 현실감을 더합니다. 특히 언뜻 듣기에 단순하게 사용된 것 같은 음악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존재감이 커집니다. 인물이 현실에서 느끼는 위화감과 쓸쓸함을 표현하고, 과거의 상념에 잠길 때 느끼는 기분을 한껏 북돋습니다.

AI가 등장하는 영화이지만, 이 영화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등장인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팽팽한 긴장감입니다. AI와 대화하고 그를 훈련시키며 그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하는 동안 마저리와 테스, 존이 가족으로서 기존에 유지하고 있던 관계의 양상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미묘한 갈등 관계는 극 전체를 끌고 나가는 중심 동력이 됩니다. 그 변화에 집중한다면 더 흥미진진하게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주요 배역을 맡아 열연한, 출중한 경력의 배우들은 자신의 개성을 담아 영화 속 인물들을 빚어냅니다. 특히 오랜 경력에 비해 지명도가 낮은, 마저리 역의 로이스 스미스나 오랜만에 스크린에서 만난 지나 데이비스처럼 백전노장 여배우가 중심이 되는 영화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남자 배우들은 아무리 늙어 빠져도 영화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게 어렵지 않지만, 여자 배우들은 조금만 나이 먹어도 힘든 일이기 때문입니다.

공감을 바라는 인간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스틸컷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스틸컷 ⓒ 싸이더스, 아이 엠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동물 행동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종의 동물적 본성은 각자도생을 외치며 개인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무리 지어 살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도모하는 쪽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안전'은 생명과 관련된 신체적인 차원의 것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관계를 통해 마음의 평안 같은 심리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와 연락을 계속하며 가끔 얼굴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인간적인 접촉을 유지하는 것도 그 사람을 통해 자신의 심리적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대와의 공감입니다. 자기가 겪은 일을 말해 줬을 때, 상대가 자기와 똑같이 반응하거나 은근히 기대했던 반응을 보여 주면 그 자체만으로도 위안이 됩니다.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AI에게 원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자기 기분을 알아주고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의 취향을 인정해 주기를, 필요하다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서라도 그저 공감을 표시해 주기를 원하지요. 이런 바람을 이해한 AI는 완벽한 대화 상대이자 삶의 동반자가 돼 줍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인간 대 AI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 대 인간의 관계는 늘 상호적이라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무조건 맞춰 줄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 또한 상대에게 공감받기를 원하니까요.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대부분 '한 쪽이 공감받기만을 원하고 공감하려고 하지 않을 때' 생깁니다. 

우리나라같이 서열 의식이 강한 사회에서 손윗사람의 횡포가 늘 문제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부모나 언니라고, 조직의 윗사람이라고 해서 상대가 나에게 맞추기를 바라서는 관계가 좋아질 리 없습니다. 또한 사회 통념상 어쩔 수 없이 상대가 공감을 표시한 것을 두고 특별한 호의로 착각해서도 안 되겠지요.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상대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줄 알아야 인간관계를 의미 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가족 관계에서 손아랫사람이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는 이유는 '가족인데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는 생각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족이라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상처를 줄 수 있고 또 얼마든지 나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미련을 갖지 않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런 사람과는 과감하게 선을 긋고, 진심으로 공감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행복하게 지내는 쪽을 선택해야 합니다. 우리는 AI가 아니라 '인간'이니까요.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포스터

영화 <당신과 함께한 순간들>의 포스터 ⓒ 싸이더스, 아이 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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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음악이 주는 기쁨과 쓸쓸함. 그 모든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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