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발칵 뒤집혔다. 유명 영화 제작자 하비 웨인스타인의 성폭행 사건이 줄줄이 터지면서 개인의 범죄에 그치지 않고 연예계 성불평등 문제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하비 웨인스타인은 지난 수십 년 간 수많은 오스카 상 수상 영화를 배출한 거물급 인사다.

처음 그의 성폭행 기사를 접했을 때는 뻔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할리우드에 그런 난봉꾼이 한둘이겠으며, 힘 있는 권력자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약자를 폭행하는 이야기는 익숙하다 못해 진부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할리우드 유력 인사 상당수가 그의 만행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했다는 점이다. 그는 탁월한 능력으로 승승장구했고, 얻게 된 더 큰 힘으로 더 많은 약자를 괴롭혔다. 대외적으로는 진보적(그는 민주당의 주요 후원자이기도 하다) 인사로 자신을 치장했고, 심지어 '페미니스트'인 척 하며 대중을 속였다.

자신이 웨인스타인의 피해자라고 밝힌 여배우들 명단을 보면 소위 '금수저'라고 불리는 배우들도 많다. 아무리 유명 제작자라고 해도 기죽지 않을 만큼 연예계·영화계에서 이름 있는 집안의 그녀들도 포식자 앞에서 무력했다. 그녀들은 그가 자신의 커리어를 망칠까봐 두려웠다고 고백했다. 다행히(?)도 그녀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했기에 이렇게 나설 수 있었다. 그렇지 않은, 무명의 피해자들은 셀 수도 없이 많을 테다.

절실함을 이용한 자들

 20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前) 배우 헤더 커(오른쪽)와 변호사 글로리아 알레드(왼쪽)가 하비 웨인스타인 성추문과 관련해 자신도 과거 웨인스타인에게 당한 적이 있다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20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前) 배우 헤더 커(오른쪽)와 변호사 글로리아 알레드(왼쪽)가 하비 웨인스타인 성추문과 관련해 자신도 과거 웨인스타인에게 당한 적이 있다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할리우드는 젊고 아름다운 배우 지망생들이 몰리는 곳이다. 재능이 있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름답다고 다 성공하는 것도 아닌 환경에서 그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모든 노력을 다 했을 테다. 하비 웨인스타인은 자신이 배우 지망생들의 절실함을 충족시켜 줄 수 있었다고 합리화했지만, 사실은 그 절실함을 이용해 여성들을 희롱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의 디자이너 도나 카렌은 "젊은 여배우들의 행실이 성추행을 자초했다"고 비난했다. 물론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획득하거나, 성추행을 역이용한 여자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요지는 그게 아니다.

웨인스타인은 어리고 아름다운 여성들의 인생을 볼모로 협박했다. 그들의 절실함과 간절함을 이용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문제 제기를 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힘을 다시 한 번 이용했다. 자신은 그럴 능력이 되니까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입밖으로는 웨인스타인을 욕하면서도 그와 같은 행동을 일삼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웨인스타인은 좋은 영화들을 많이 만들었고 진보 정당을 후원했으며, 사회적 이슈에도 목소리를 높였다. 재능 있는 여배우들에게 기회를 주니 여배우들을 추행하는 것쯤이야 상관 없다는 것일까. 사람을 죽인 것도, 때린 것도 아니고, 배우들도 원하는 것을 가졌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역겨운 발상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런 성추행을 별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여겼을 지도 모르겠다. '할리우드에서 성공하고 싶다면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겠어?'라며 말이다.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일은 세계 어디에서든 언제고 일어난다. 그리고 무서운 것은 강자의 폭행을 알면서도 '우리는' 모르는 척 한다는 것이다. 다수의 이런 반응이 '권력만 가지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옳지 않은 걸 알지만 권력자는 그래도 되니까'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아닐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줄 안다

영화 <부당거래>에서 주양 검사(류승범)는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고 했다. 이는 권력자가 약자들을 얕잡아 하는 말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권력자들을 향한 말이 될 수도 있다.

 20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前) 배우 헤더 커(오른쪽)와 변호사 글로리아 알레드(왼쪽)가 하비 웨인스타인 성추문과 관련해 자신도 과거 웨인스타인에게 당한 적이 있다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20일(현지 시각) 미국 로스엔젤레스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전(前) 배우 헤더 커(오른쪽)와 변호사 글로리아 알레드(왼쪽)가 하비 웨인스타인 성추문과 관련해 자신도 과거 웨인스타인에게 당한 적이 있다는 내용의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바꿀 수도 있는 권력자가 자신의 방에서 술 한 잔 하자고 했을 때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배우들이 몇이나 될까. 그의 추잡한 명성을 알면서도 피하지 못한 여자들을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오히려 용기 내 고백한 피해자들을 욕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강간당한 여성에게 "네가 그렇게 야하게 입고 다니니 제가 자초한 일이야"라고 비난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웨인스타인의 피해자뿐만 아니라 많은 배우들이 연예계에서 겪은 성추행 경험을 SNS를 통해 고백했고, 이는 사회 각 분야로 번지고 있다. 피해자 증언이 가장 힘든 것 중 하나가 성폭력 사건이다. 용기를 낸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결국 피해자들의 용기가 이 사건을 수면위로 올린 것이다.

그래도 그녀들은 이미 성공한 배우들이다. 회사에서 혹은 사회에서 혼자 아파하고 있을 성폭행 피해자들이 자신의 직업과 안전에 위협을 느끼지 않고 용기를 내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힘을 가진 자들의 권력을 이용한 폭행이 없어지는 날은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추행이 추행인지도 모르는 인간들을 감안하면 더더욱.

이번 웨인스타인 사건은 단순히 유명 배우들이 개입된 스캔들이 아니다. 명백한 성범죄이고, 약자를 대하는 권력의 태도와 권력자를 대하는 사회의 태도를 명백하게 보여준 하나의 사례다. 이번 사건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모르겠지만 몇몇 배우들의 고백과 웨인스타인의 법적 처벌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

추신. 이와는 비교도 안 되게 충격적인 사건이 몇 년 전 한국에 있었다. 한참동안 온 나라가 들썩일 만큼 시끄러웠던 이 사건은 유야무야 묻혀 버렸는데 그때 그 가해자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지 묻고 싶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비 웨인스타인 할리우드 거물제작자 성추행 성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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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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