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포스터 왼쪽부터 주인공 데커드와 그의 '레플리칸트' 연인 레이첼.

▲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포스터 왼쪽부터 주인공 데커드와 그의 '레플리칸트' 연인 레이첼. ⓒ 워너 브라더스


<블레이드 러너>라는 영화는 오래된 영화다. 35년 전인 1982년에 개봉했으니 말이다. 이번에 개봉한 후속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전작의 설정과 주제를 잘 가져왔다. 영화는 '레플리칸트'라는 복제 인간과, 그들을 사냥하는 인간 간의 대립구도로 이루어져 있다. 작중에서 레플리칸트는 인간과 겉모습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인간은 레플리칸트를 차별하고, 없애려 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레플리칸트를 좇는 사냥꾼을 뜻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소수자'의 위치에 있다. 정치적으로 억압받거나 소외된 사람들, 페미니즘과 젠더문제가 떠오르기도 한다. 이러한 물음은 관객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1편과 2편은 이야기 진행이 살짝 다르다. 1편이 레플리칸트와 인간 사이의 차별, 그들과 나는 왜 다른가에 대해 묻는다면, 2편은 레플리칸트와 인간 사이의 차이, 그들과 나는 다른 점이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철학자로 치면 니체와 데카르트의 차이로 구분할 수 있다.

철학적 물음

니체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1882년의 저서 <즐거운 학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은 채로 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해자 중에서도 가장 극악무도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 위로할 것인가?'

이 말은 어려워 보이지만, 굉장히 쉽다. 신이 죽었다는 것은, 우리가 알던 신이 원래 없다는 걸 뜻한다. 한마디로, 신에 의존하지 말고 자신을 믿으라는 뜻이다. 영화에선 레플리칸트 중 한 명이 이런 말을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은 데카르트가 주장한 것 중, 가장 유명한 말이다. 아마 평소에 나는 누구인지에 대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고 있는 순간만큼은 자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을 작중 인물이 언급했다는 건 데카르트의 철학을 빌리겠다는 뜻일 테다. 영화에선 비아냥거리는 태도로 언급하니 좋은 뜻은 아니다.

데카르트의 말은 이성이 있는 것에만 통한다. 동물과 인간을 갈라놓는 게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바로 '이성적인 사고'다. 따라서 레플리칸트가 데카르트를 비웃는 건, 자신들을 인간 취급 하지 않는 인간에게 던지는 야유다.

니체를 인용한 건, 그가 데카르트를 비웃었기 때문이다. 니체는 전통적인 서양 철학에 반기를 들었는데, 그 중 데카르트의 철학도 포함되어 있다. 니체는 신이 없다고 말하며 인간이 인간으로 바로 설 것을 주장했다. 신에게 의지하는 것도 인간을 억압하는 요소라고 본 것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에게 이성이 있는 건 신이 부여한 축복이라 보았으므로 두 철학이 대립하는 게 당연하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중 한 장면 레플리칸트 '로이'

▲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중 한 장면 레플리칸트 '로이' ⓒ 워너 브라더스


데카르트는 인간에게 '이성'을 부여했기에, 1편의 물음은 데카르트로부터 온다. 니체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기에, 2편의 물음은 니체로부터 온다. 

1편에서 넥서스 6라는 모델명을 가진 레플리칸트들은 수명이 4년이다. 그래서 수명 연장을 꿈꾸며 지구로 온다. 그러나 그들을 만든 회사 CEO '타이렐'조차 수명을 늘려주지 못하자, 타이렐을 죽여 버리고 만다. 그를 죽인 게 바로 레플리칸트 '로이'다.

타이렐은 레플리칸트를 만들었으니 그들의 '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타이렐을 죽인 로이를 표현하는 문장은 앞서 언급했던 "신은 죽었다!"가 된다. 로이는 타이렐을 죽임으로써 자신을 차별하던 인간과의 관계에서 자유로워진다. 니체의 말처럼, 그는 자신을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이는 그 믿음과 함께, 일련의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들은 여태껏 데카르트의 말을 비웃으며 인간만이 이성을 지닌다고 여기는 행태를 비난했지만, 이제 그들이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수명이 연장된' 레플리칸트가 아니라, 인간으로 대우받음을 말이다.

이것이 앞서 말한 소수자 문제와 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으로 대우받지 않는 경우를 너무 많이 보아왔다.

두 작품 1편과 2편의 결말은 소수자에 대한 생각을 하도록 여지를 남긴다. 1편에서 로이는 타이렐을 죽이고 인간의 위치에 올라선다. 마지막으로 수명이 다하기 전에, 그동안 그들을 죽이기 위해 좇아왔던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를 죽이려 한다.

그러나 사실 로이에게는 데커드를 죽이려는 의도가 없다. 대신, 로이는 데커드에게 어떠한 사실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것이 바로 위에서 말했던 '그들과 나는 왜 다른가?'라는 소수자 문제에 대한 물음이다. 로이는 다 잡은 데커드를 옥상 끝자락에서 끌어올리며 이런 말을 한다.

"상상도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 전투에 참가했었고,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를 봤어. 그 기억은 모두 사라지겠지. 빗속의 내 눈물처럼. 죽을 시간이야."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인간인 너보다 내가 더 많은 것을 보았다. 따라서 나는 표면적으로는 계급이 낮지만, 내부적으로는 너보다 계급이 높다.'는 뜻이며, 다른 하나는 '이토록 많은 경험을 했어도, 결국 삶은 유한하다. 그러니까, 블레이드 헌터 짓을 그만두고 네 사랑을 찾아 떠나라.'라는 뜻이다.

로이는, 데커드에게 '레플리칸트와 인간의 차이는 없음'을, '살아있음에 감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데커드는 그동안 고민해왔던 '레플리칸트' 연인, 레이첼과의 관계에 대해 깨달음을 얻게 된다. 관객이 해석하는 속뜻은 아마 각각 다를 것이다. 어떠한 소수자도 '레플리칸트'에게 대입할 수 있다.

소수자의 규정

2편의 주인공 K는 전작의 주인공 데커드처럼 블레이드 러너다. 아이러니하게도, K는 레플리칸트 임에도 레플리칸트를 죽이는 위치에 있다. 이건 바로 신세대 레플리칸트와 구세대 레플리칸트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기본적으로 K는 신세대 레플리칸트이기에 인간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 1편에서와 같이 인간에게 반기를 드는 레플리칸트가 없도록, 설계 단계에서부터 그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K는 자신이 맡은 사건에서 레플리칸트와 레플리칸트가 결혼을 해서 인간을 낳았고, 생식이 불가능했던 레플리칸트가 생식이 가능해짐으로써 인간과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 부분에서 K는 일련의 깨달음을 얻는다. 구세대는 신세대가 하지 못하는 생식에 성공함으로써 인간과 별 차이가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간 대 레플리칸트의 갈등이 신 레플리칸트 대 구 레플리칸트로 바뀐 것이다. 1편의 주제가 '그들과 나는 왜 다른가?'였다면, 2편의 주제가 '그들과 나는 다른 점이 무엇인가'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K는 그동안 인간에게 복종만 했던, 같은 레플리칸트를 죽이는 자신을 의심하게 된다.

'인간은 나보다 신체적으로 열등한데도 나를 노예로 삼는다. 그 근거는 영혼의 유무다. 그리고 그 영혼은 출산이라는 생식행위를 통해 만들어진다. 그런데 레플리칸트가 생식이 가능하다면, 레플리칸트에게도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레플리칸트는 왜 인간에게 차별받고 있는가. 그리고 그 영혼조차 없는 나는 왜 동족을 죽이고 있는가.'

작품에선 이러한 의심이 현실이 되어버린다. K는 자신의 기억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이 '생식으로 태어난 레플리칸트', 즉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사실을 깨닫고 K는 인간이나 다를 바 없이 태어난 자신이 왜 인간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불만을 품게 된다. 이 부분에서 2편의 주제는 전편처럼 '데카르트'의 철학을 답습하게 된다. 로이가 말했던 것처럼, '이성'의 유무가 그들의 계급을 갈라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이 진행되면 이러한 의심에 다시금 변화가 일어난다. K의 기억이 사실 누군가가 실제로 가진 기억을 복사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평범한 레플리칸트일 뿐이고, 자신이 가진 기억의 원래 주인인 '레플리칸트 사이에서 태어난 여자'는 살아 있었다.

이것은 차이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K는 이제 레플리칸트 사이에서 태어난 것의 복제, 즉 복제의 복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벤야민(Walter Benjamin)이 주장했던 '아우라'의 개념, 그러니까 영혼은 복제되는가에 대한 물음도 될 수 있을 것이다. 벤야민은 예술 작품에 아우라라는 것이 있다고 말하는데, 이 아우라는 작품이 가진 고유의 분위기다. 우리가 프린터기로 뽑은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보며 만족하지 않듯이,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원본만이 가지는 그 느낌이 아우라다.

말하자면, 인간은 원본이고 레플리칸트는 가본이다. 레플리칸트는 복제 인간이지만, 겉으로는 인간과 구분이 가지 않는다. 그들을 갈라놓는 건 출산이다. 따라서 출산이 영혼을 만드는 것으로 생각되어졌다. 그런데 가본사이에서 태어난 것은 인간처럼 영혼이 있을까? 영혼이 있어야만 이성이 있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게 데카르트의 물음이었다.

K는 공장에서 나온 양산형 개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런데 인간(레플리칸트 사이의 자식)의 기억을 이식 받자 인간처럼 사고하게 된다. 이게 벤야민의 아우라가 지니는 물음이다. 기억, 영혼을 이식받자 인간처럼 사고하게 되었다면, 영혼은 이식되는 것일까.

K는 인간의 기억을 가지지만 레플리칸트의 몸을 가진 소수자가 된다. 영화는 이러한 것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또한 1편과 2편에서 레플리칸트들은 각각 소수자다. 그리고 1편의 주인공 '데커드'는 인간, 2편은 주인공 'K'는 레플리칸트이기에, 우리는 소수자가 아닌 상태(인간)로, 소수자인 상태(K)로 영화를 보게 된다. 영화는 내외적인 시선을 통해 그들을 관찰한다. 그렇다면 과연 소수자를 규정하는 건 무엇인지, 소수자라는 건 누가 정의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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