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주 바다(자료사진)
 제주 바다(자료사진)
ⓒ flickr

관련사진보기


"사진에서 밝은 불빛은 뭐야?"

아이의 목소리에는 궁금함이 담겨 있었다.

"응, 배야, 고기 잡는 배. 요즘은 한치 잡는다고 하더라."

답을 하는 내 목소리는 한 옥타브쯤 높아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마주한 바다, 모든 것을 삼켜버린 바다에 어선의 밝은 불빛들이 마치 가로등을 켜 놓은 것처럼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손을 뻗으면 잡힐 듯한 불빛은 반짝이는 물결을 풀어 놓은 채 밤을 녹이고 있었다. 그동안 밤이 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검은 바다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나는 우리 부부가 운영하는 카페 밖에 서서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봤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여기저기 뒤져 찾아낸 플래시를 터트리며 몇 번을 찍은 후에 그 중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 아이에게 보내줬다. '밤바다'라는 제목으로.

"아, 멋있겠다. 엄마, 그래도 배들 때문에 바다가 환해져서 좋겠다."

"응, 너무 좋아, 바람도 잔잔하고. 불빛이 밝아서 정말 대낮 같아. 여기저기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누가 아니? 인어공주가 파티를 벌이는지도…."

"인어공주? 후후, 엄마…."

아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응,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정말 오는 밤바다는 너무 좋아서. 장사가 안 돼서 속상하지만 이런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 너는 오늘 어땠어?"

나는 바다를 마주한 채 한동안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주시 구좌읍. 남편과 내가 이곳에 자리 잡은 지 반년이 넘어간다. 아직 간판도 제대로 달지 못한 채 손님을 맞고 있는 카페는 우리 부부의 제2의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기대보다는 우려가 더 컸다. 그도 그럴 것이 전에 하던 사무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인 데다가, 처음 해보는 카페 운영은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화요일이면 제주도로 내려갔다가 토요일이면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데, 처음에는 남편 혼자 내려와 지냈고 나는 아이들과 집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만 손님처럼 왔다 가곤 했다.

그때의 바다는 하늘에 흩어져 있는 바람을 모아 쏟아내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파란빛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어 그저 바라볼 뿐 다가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12월 초에 제주도에 내려왔을 때 나는 남편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결벽증을 의심할 정도로 깔끔한 체를 하던 모습과는 달리 더부룩한 머리에, 정리 안 된 수염, 퀭한 눈빛, 그리고 거칠어진 손등에 마디마다 갈라지고 그 틈 사이로 까맣게 타들어 간 손끝을 보는 순간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코끝이 싸해졌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 너머로 보이는 바다는 숨어버린 수평선으로부터 솜사탕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하얀 눈을 바람에 실어 보내며 회색빛 손을 내밀었지만 선뜻 잡을 수 없었다.

그 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텅 빈 겨울 바다를 시린 가슴에 조금씩 채우며 익숙해져갔고, 유채꽃 노란 꽃물을 머금은 비가 녹아들 무렵에는 발끝 바로 앞까지 다가온 바다를 마주할 수 있었다. 지금은 부드러운 바다 속살을 맨손으로 만지며 마음을 풀어놓곤 한다. 어느새 바다는 보여주고 바라보는 데면데면한 관계에서 벗어나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제주 바다
 제주 바다
ⓒ 정순옥

관련사진보기


변함없이 그 자리에 펼쳐진 바다는 늘 다른 얼굴로 마주하게 된다. 숨 가쁜 하루를 주홍빛으로 물들이며 지는 해를 품어주는 바다를 보면, 온종일 목을 빼고 손님을 기다리던 막막함은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리라는 희망으로 변하고, 잔잔한 물결로 배를 품고 있는 바다를 보며 마음의 쉼표를 얻는다. 수 없이 오고 가는 차들에 눈길을 둔 채 투덜거리다가 하늘마저 휘감아버린 채 거친 파도로 성을 내는 바다 앞에 서면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굴곡진 삶의 너울을 마주하게 된다. 느닷없이 이어지는 손님의 발걸음에 들뜬 웃음은 눈이 시리도록 파란 웃음으로 해녀들의 놀이터가 돼주는 바다를 보며 접어두었던 용기로 솟아오른다. 내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바다는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바다를 다른 이들에게 선물하게 된 때가. 일찍이 남편과 사별한 후, 혼자 힘으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도 늘 당당한 이십 년 지기의 친구에게는 서너 척의 배를 품고 있는 사진을. 외무고시 준비로 이십 대를 오롯이 책상 앞에 앉아 보내는 큰아이에게는 눈이 부시도록 투명한 햇살에 물결이 반짝이는 사진을. 새내기 직장인으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막내에게는 오늘처럼 설레는 밤바다를. 나 혼자 마주하기에는 너무 큰 바다의 마음을 함께 하고 싶은 바람으로.

선물 받은 이들은 바다의 아름다움에 기분이 즐거워지는 것은 물론 가끔은 지친 마음과 몸을 다독이게 되고 때로는 자신을 돌아보며 부족한 부분을 채우기도 하고 한 번쯤은 직접 찾아와 설렘을 나누기도 하고, 그리고 깨닫게 된다.

삶이라는 게 내가 중심이 돼 살아갈 때도 있고 내가 뜻하지 않아도, 내가 중심이 아니어도 살아지는 때가 있다는 것을, 지금의 나는 살아지는 때를 보내는 것으로 언젠가는 다시 내가 중심으로 살아가는 때가 오리리라는 것을. 그때를 기다리며 작은 것 하나라도 감사하는 날을 보내야 한다는 것도. 저 바다처럼.

"내일은 손님이 좀 많았으면 좋겠어. 이제 그만 들어갑시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내일은 유리창 청소를 해요. 해무가 낀 것 같아서."

카페 문을 닫고 남편과 함께 숙소로 걸어가며 나는 뒤로 고개를 돌렸다. 바다는 어선들의 환한 불빛으로 가로등을 켠 채 잔잔한 물결로 꿈을 풀어내고 있었다. 살아 숨 쉬는 어부들의 꿈을….


태그:#바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