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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나는 과외교사 노릇을 하며 밥벌이를 해왔다. 그러던 중 지난 달부터 담당해온 어느 가정의 과외 수업을 그만두게 되었다. 주변에선 밥줄의 하나를 상실했으니 아쉽지 않느냐고 걱정했지만, 나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도리어 후련했다.

사실 나는 그동안 과외 수업차 해당 가정을 방문할 때마다 내심 불편한 마음이 앞섰다. 해당 가정은 어느 초고층 주상복합아파트로 대구에서 두 번째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이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버스를 타고 20분만 가면 동대구역이고, 동대구역 근처에는 쪽방이 널려있다. 물론 외관이 불빛으로 화려한 주상복합아파트와 달리 쪽방은 '모텔'이니, '여인숙'이니 하는 상호명에 가려 모두 숨어 있다. 쪽방 주민들은 세상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인 셈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선 해당 아파트 정문에 들어갈 때마다 과연 이 호화판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불과 수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쪽방 사람들의 힘겨운 삶과 처지에 얼마만큼 공감할 수 있을까라는 상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쪽방과 주상복합아파트로 대비되는, 단군 이래 가장 불평등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더 나아가선, 나 자신 알게 모르게 '부(富)의 대물림'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다. 나로선 현재 돈을 벌기 위해 과외교사라는 노릇을 하고 있지만, 결국 한국사회에서 부의 대물림이란, 필연적으로 자녀가 어릴 때부터 사교육에 엄청난 돈을 투자해 상위 성적을 유지하게끔 만들고, 좋은 대학에 입학시키는 경로를 밟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어릴 때부터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는 세태를 배우고, 집안의 경제적 후원으로 시험에서 좋은 성적 점수를 받은 후 선생님과 부모님으로부터 칭찬받으며 '우등생'을 자부하고, 그것이 마치 세상의 전부인 줄 알면서 성장한 아이들이 과연 훗날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저 체제에 순응하거나 혹은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지 못한 채 '싸가지 없는' 행동으로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당장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더라도 그러하지 않은가? 나는 일전에 어느 일간지에서 '판사는 왜 가진 자들에게 무한 공감하는가'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해당 기사에 따르면, 사법부가 재벌에 유리한 판결을 지속하는 이유에 대해 어느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고 한다.

"검사들도 마찬가지겠지만, 판사 대부분이 부잣집과 결혼한다. 아니면 부잣집 자녀들이다. 원래 부자였기 때문에 친부자적인 판결을 하고, 부잣집 사위가 됐기 때문에 친부자적인 판결을 한다. 서민의 주거 불안이나 노동자의 고용 같은 걱정은 모르고 사는 이들이다. 친재벌 논리로 피고인들을 봐주게 되는데, 이 친재벌 논리가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는 논리와 차이가 없다. 결국 자신들의 이해관계와 일치하기 때문에 (재벌에 대한) 봐주기 양형을 남발하는 것이다." (<한겨레> 2017년 9월 3일자)

문제는, 현재 대한민국의 시스템과 사회 구조상 그렇게 부유한 집안에서 우등생으로 성장한 아이들이 사회 상층부에 진입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한국사회의 급선무 중 하나는, '인재에 대한 규정'과 '인재양성 시스템'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개혁해나가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기실 지성은, 타인에 대한, 더 나아가 약자에 대한 '공감'으로부터 출발한다. 한 사람이 가진 지식의 수준이나 양이 곧 지성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성의 부분적 요소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지성의 절대적 평가기준을 시험에만 둔다. 그런 속에서 우리는 학교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일생동안 시험과 성적의 노예로 살아가게 된다.

나는 예전, 본인이 이른바 '지잡대' 출신이라는 점에 열등감을 가지고, 한국사능력검정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며 울상인, 아는 동생에게 이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지금까지 역사에서 세상을 망쳐온 건 가난하고 힘없고 못 배운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부유하고 힘 있고 공부 잘 한 엘리트들이었다고. 만일 공부 잘 한 사람들이 정말 훌륭한 사람들이라면 왜 오늘날 우리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겠느냐고. 우리사회 주류층에 서울대를 비롯한 상위권 대학 출신자들이 포진해있지만, 결국 이 나라를 이렇게 망쳐온 건 그 사람들이 아니냐고."

물론 내가 이 말을 한 시기는 박근혜 정권 말기여서 더욱 이와 같이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지금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 진행 중인 적폐청산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고 나면, 이후 한국사회는 인재양성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작업에 착수해야 할 것이다.

우선 아이들에게 성적으로 '우열'의 딱지를 붙이는, 그 잔혹한 짓부터 중단해야 한다. 흔히 한국의 학부모들은 자녀에게 "학생의 본분은 공부"라는 담론을 내세우며, 학습 강요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말처럼 폭력적인 말이 없다. 어떤 존재를 '학생'이라는 말 속에 사장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학생이라는 존재 규정 자체가 어른들의 일방적 규정이기 때문이다.

학교 공부가 하기 싫고, 자기에게 맞지 않다고 여기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이 같은 담론과 태도는, 자기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어쩌면 한국 사회의 어른들은, 여태까지 10대들에게 고문을 자행해온 것이 아닐까?

그런 만큼, 이제 우리는 10대 청소년들을 '학생'이라 규정하지 말고 '사람'으로 바라볼 때가 되었다. 학교는 단지 그러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인간관계를 맺고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으로 거듭나야 한다. 즉, 대학입시를 향한 경쟁의 장이 아닌, 다양성을 존중하며 아이들이 진정 자신만의 존재 가치와 행복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육과 인재 양성 기조를 '우열 경쟁'과 '배제'가 아닌, '공감'과 '협력'으로 전환하는 일이 될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선 대학 서열화와 노동시장에서의 학력 차별에 대한 발본적 개혁이 우선되어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을 것이다.

교육과 시험 성적이 계급 격차를 지탱하는 수단이 되는 현실은, 더 이상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 뿐이다. 그건 부유층 집안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비록 그들이 상대적으로 사회 상층부에 진입할 가능성이 높다고 할지라도, 현재와 같은 엘리트 코스를 밟아 주류사회에 진입한 이들 중 진정 자신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그리고 스스로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타인에게도 스트레스를 줄 확률이 더 높지 않을까? 스스로 행복하지 않은 이들이, 그리고 오직 시험 성적만을 우열의 기준으로 삼아 자신의 높은 점수를 자부하며 그것만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이들이 사회 상층부를 장악한다면, 그 사회는 대체 얼마나 불행해질 것인가? 그러니 이제 우리는, '시험 성적'보다 우리 모두의 '행복'을 우선시하는 세상을 상상해보아야 할 것이다. 세상은 여러 상상들이 모일 때 바뀔 수 있다. 시험 지옥은 우리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


태그:#입시경쟁, #과외, #부의 대물림, #학생,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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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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