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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자료사진)
 가을(자료사진)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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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빚어지고 있다. 산도, 하늘도, 들도 곱게 곱게 피어나고 있다. 이 계절에 잠기기까지 강은 얼마나 많은 물을 날랐을까. 산이 놓아버린 푸른빛들은 또 얼마나 될까. 검푸르렀던 가로수의 잎새들은 붉고 노랗게 물들어가고, 결국에는 낙엽이 되어 이리저리 쓸려 다니며 스산한 가을 거리를 고독과 허무로 가득 채울 것이다.

가을은 시(詩)의 계절이다. 가을이 되면 누구나 시인이 된다. 나뭇잎 한잎 두잎 떨어지는 공원 벤치에 앉아 가을을 노래하는 시 한 편 읊조려 보는 건 어떨까. 옛날부터 시와 노래는 한 몸이었다. 지난해에는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Bob Dylan)'이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스웨덴 왕립과학원 노벨상위원회는 "노래 속에서 시적 표현을 창조해 냈다. 그는 '귀를 위한 시'를 쓴다"며 극찬했다.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부터 노래와 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의 경우도 그러했다. 고조선 시대 백수 광부의 아내가 지었다는 <공무도하가>를 비롯해서 고구려 유리왕이 부른 <황조가>, 백제 시대 노래 <정읍사> 신라의 향가와 고려의 속요 모두 음악을 바탕으로 한 시였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시조와 가사 문학이 발달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와 노래가 결합됐다. 최근에는 조선 영조 때 가인(歌人) 김천택이 발간한 시가집, <청구영언(靑丘永言)>의 원본이 공개돼 화제가 되고 있다.

가을이 되면 으레 듣고, 읊조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노래와 결합하여 문학 그이상의 감동을 주고 있는 시가 있다.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
 노래하는 시인 박인희
ⓒ 지구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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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환☓박인희, 가을의 영원한 노스탤지어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청춘시 절을 보낸, 이른바 '7080 세대' 들에게 박인희는 요즘 말로 '아이돌'이었다. '청바지·통기타·생맥주'로 대변되던 '청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박인희 하면 자동으로 떠오르는 시구가 있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일약 국민 애송시로 만든 건 박인희의 토크 송(talk song)이었다.

깊어가는 가을밤, 풀벌레 소리와 함께 맑은 시냇물 같이 청아하고도 시적 감성에 젖은 박인희의 토크 송은 수많은 청춘의 오금을 저리게 만들었다. 스무살 언저리, 불면의 가을밤에 트랜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박인희의 <목마와 숙녀>는 '오르페우스의 하프'처럼 하늘로 올라가 수많은 별자리가 됐을 것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한 잔의 술을 마시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하는 '흰머리 소년·소녀'들이 많을 것이다. 가을은 그런 계절이다.

박인희는 박인환의 또 다른 시 <세월이 가면>을 노래했다. 먼저 한번 읊조려 보자.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 창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서 /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클라이맥스 부분인 이 대목에 들어서면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막연한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 가슴을 적시게 만든다. 자질어질 듯 이어지며, 전율이 느껴지는 박인희의 노래와 함께 가을의 허무적 감상을 담고 있는 시 <세월이 가면>의 탄생 배경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한국 전쟁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면서 서울을 폐허의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한국 전쟁 직후인 1956년의 이른 봄날 저녁, 서울 명동에는 쓸쓸함을 달래기 위해 예술인들이 모였다. 이들의 아지트 역할을 하는 '은성'이라는 주점이었다. 이 주점은 탤런트 최불암 선생의 모친인 이명숙씨가 운영했다. 박인환과 극작가 이진섭, 소설가 송지영, 가수 나애심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고 취기가 오르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청한다. 나애심은 꽁무니를 빼며 좀처럼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명동 백작' 박인환 시인(1926~1956)
 '명동 백작' 박인환 시인(1926~1956)
ⓒ 박인환 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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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써 내려 가기 시작했다. 옆자리에 있던 이진섭이 시를 보고 악보를 만들어 냈다. 나애심은 악보를 보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허름한 술집에서 즉흥적으로 탄생한 시와 노래가 오늘날까지도 널리 애송되고 애창하는 <세월이 가면>이다. 박인환(1926~1956)은 이 시를 쓰고 일주일 후 천재 시인 이상(李箱)의 추모식에 다녀온 다음 세상을 떠났다. 그의 나이 31세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의 암울한 현실을 허무적 감성으로 위로했던 시인 박인환과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문학적 감수성으로 노래했던 가수 박인희는 <세월이 가면>과 함께 많은 인구에 회자되며 이 가을의 노스탤지어로 남아있다.

고은☓최양숙, 가을엔 편지하겠어요

매년 가을이 되면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노래 중의 한 곡은 아마도 고은 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든 <가을 편지>가 아닐까 싶다. 고은 시인의 시 <가을편지>는 시보다는 노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시의 작가가 고은 시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그리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을 편지>, 이 시는 일반적인 고은의 시와는 결이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주로 민주화·통일문제 등 인간의 근원에 대해 질문해 온 시인이 가을이라는 서정적 감성의 옷을 입은 시를 쓴 것은 의외이기 때문이다.

이 시 또한 사연이 있다. 사연을 알고 나면 의문이 해결될 것이다. 이시는 애초에 노래를 위해 만들어졌다. 1960년대 말쯤의 일이다. 서울대학교가 있던 동숭동 어느 허름한 막걸리 집이다. 그 자리에는 고은 시인, 대중음악 평론가 최경식, 그의 누이동생인 최양숙과 친구 김광희가 있었다. 최양숙과 김광희는 서울대학교 성악과와 작곡과에 재학 중인 학생이었다. 술에 취하자 최경식은 고은에게 시 한 편을 읊어달라고 한다. 그때 고은 시인이 흥얼거리며 읊은 시가 바로 <세노야>였다. 타령조의 시에 김광희가 즉석에서 곡을 붙이고 최양숙이 노래로 불렀다. 훗날 양희은이 불러서 유명해졌다.

그런 인연으로 가끔 술자리를 하게 된 최경식이 어느 날 술 취한 고은 시인에게 음반을 내기로 한 누이동생 최양숙을 위해 노랫말을 써줄 것을 부탁한다. 이에 고은 시인이 즉석에서 써준 시가 <가을 편지>다. 이 가을편지는 김광희의 1년 후배인 김민기가 서울대학교 미대에 재학 중 작곡해 <세노야>와 함께 최양숙의 데뷔 앨범에 수록되게 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 낙엽이 쌓이는 날 /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주세요 / 낙엽이 흩어진 날 / 모르는 여자가 아름다워요 //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 모든 것을 헤매인 마음 보내드려요 / 낙엽이 사라진 날 / 헤매인 여자가 아름다워요

 가수 최양숙
 가수 최양숙
ⓒ 지구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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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누구라도 좋으니 '그대'가 돼 달라고 애원하는 고은 시인은 한때 승려였다. <가을 편지>는 '종교의 길'에서 '문학의 길'로 환속한 젊은 파계승의 가슴에서 우러나온 '구원을 염원하는 간절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최양숙이 최초로 부른 <가을 편지>는 아픔이 있었다. 운동권 노래의 상징, <아침 이슬>을 작곡했던 김민기가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앨범은 압수당하고 금지곡이 됐다.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나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 들어서 최양숙이 다시 오케스트라 반주에 맞춰서 녹음했고, 그 뒤 구수한 중저음의 이동원이 리바이벌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93년에는 작곡자인 김민기가 막걸리처럼 텁텁한 목소리로 직접 불러서 젊은 층에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여러 버전 중에서 샹송 스타일로 부른 최양숙의 가을 편지가 으뜸이다. <가을 편지>가 이토록 사랑받는 이유는 아름다운 시를 바탕으로 노래를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
 으악새 슬피 우는 가을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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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가을이 되면 누구나 너그러워지고 감성이 풍부해진다. 사물과 사실들을 연민의 감정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정서적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이란다. 평소 무의미하게 지나치는 것들도 가을에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바야흐로 '통장 잔고'보다는 마음 따뜻하게 덥혀줄 '추억과 감성'의 잔고를 가득 채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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