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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오후 3시, 여수삼일중학교에서는   유엔이 정한 '세계 소녀의 날'을 맞이해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11일 오후 3시, 여수삼일중학교에서는 유엔이 정한 '세계 소녀의 날'을 맞이해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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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UN)이 정한 '세계 소녀의 날'을 맞이한 11일(수) 15시, 여수삼일중학교(교장 이승종) 교정에서는 '삼일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열렸다. 제막식에는 김연식 여수교육장을 비롯한 동문·학생 100여명이 참석했다.

삼일중학교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세운 것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1953년 6월  개교한 삼일중학교는 여수시 삼일동(三日洞)에 건립됐다. 동의 명칭을 따라 교명을 '삼일중'으로 내세웠지만 한자는 다르다. 삼일정신을 의미하는 '삼일중(三一中)이기 때문이다. 삼일중학교에서 1㎞쯤 떨어진 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의승수군의 중심사찰인 흥국사가 있다.

여수삼일중학교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가한 내빈들이 소녀상 앞에 섰다.
 여수삼일중학교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참가한 내빈들이 소녀상 앞에 섰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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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설립했던 설립자는 "이 충무공의 얼과 삼일독립정신을 이어받아 애국·애향인을 길러내자는 교육이념으로 교명을 삼일중학교(三一中學校)로 정하자"고 했다. 설립자가 국가에 기부채납한 학교는 2012년 여수 죽림지구로 이전했다.    

학생회에서 소녀상 건립추진 제안해

'100개 학교 100개 소녀상 세우기 운동'에서 시작된 평화의 소녀상 세우기 운동은 6월 1일 학생회에서 의결됐다.  학생들이 움직이자 교직원, 학부모, 동문회와 여수평화의 소녀상 건립추진위원회가 동참했다.

9일 동안(6.12~6.20) 모은 성금 5,526,720원으로 동상을 만들어 이날 제막식이 열렸다. 건립과정에 어려움을 겪었던 학생회장 허지예양의 건립소감이다.

학생회장 허지예 양이 평화의 소녀상 건립 소감을 말하고 있다.
 학생회장 허지예 양이 평화의 소녀상 건립 소감을 말하고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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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소녀상 세우기 운동은 학생회와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진행되었습니다. 비록 적지 않은 어려움도 있었지만 우리 손으로 의미 깊은 일을 한다는 뿌듯함과 보람이 더 컸습니다. 또한 잊고 지냈던 우리의 아픈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기억하며 우리나라의 역사를 바로 알아가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발적 모금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학생과 교직원 및 학부모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한 이승종 교장의 감사말씀이다.

"학생들 스스로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고 자발적인 모금활동을 통해 현실로 만들어 가는 모습은 저를 비롯한 기성세대에게 놀라움 그 자체였고, 동시에 우리 아이들이 이끌어갈 밝고 희망찬 미래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건립된 소녀상이 우리 삼일중학교 학생들을 비롯한 미래세대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장이자 역사의 장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일본군부가 '위안부' 강제 연행하고 위안소 운영한 자료는 차고 넘친다"

도서관에서 열린 식전강연(13:30~14:30분)에는 3학년 3반 학생 34명이 참석했다. 부산외대 명예교수이자 한일문화연구소장인 김문길 교수가 '위안부' 강의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여수삼일중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김문길 교수의 위안부 강연회 모습.
 여수삼일중학교 도서관에서 열린 김문길 교수의 위안부 강연회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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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교수지만 젊을 적에는 고등학교 교사였어요. 일본사람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고 '위안부' 강제연행이 없다고 해서 이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연구해보자는 취지로 일본에 유학가서 박사학위를 따고 한일문제를 연구했습니다. 영토문제, '위안부' 문제는 일본정부의 문서를 가지고 정확히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간된 사료는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김문길 교수는 일본군이 '위안부'를 강제연행하고 군부대에서 위안소를 차린 증거를 열거했다. 일본군의관 '아사오 도라오'는 당시 일본군인들의 전장심리연구소에서도 일을 했다. 그가 쓴 '전장에 있어서 특수현상과 그 대책'이라는 글 속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일본군 군의관이었던 '아사오 도라오'가 쓴 '전장에 있어서 특수현상과 그 대책'이라는 문서에는  "일본군의 사기를 돕기 위해 위안소를 차렸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일본군 군의관이었던 '아사오 도라오'가 쓴 '전장에 있어서 특수현상과 그 대책'이라는 문서에는 "일본군의 사기를 돕기 위해 위안소를 차렸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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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장에 나가는 병사들이 오랫동안 성욕을 억제하면 자발적으로 부인을 성폭행하게 된다. 성폭력을 하면 황군의 이미지를 추락하게 되니 황군의 위신을 세우고 군인들의 사기를 돕기 위해 위안부소를 차려놓았다"

일본군부가 조선인을 비롯해 동남아여성들을 연행해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일본정부는 이 사실을 조사하라는 프로젝트를 민간단체에게 주었다.

위원회가 6개월간(1991.12~1992.6) 조사한 위안부 자료(종군위안부관계자료집. 1권~5권)에는 260여장의 사진과 많은 자료가 있다. 조사보고서 2권(59P~75P)에는 "위안부소는 황군의 권위와 군인들의 사기를 돕기 위해 군부가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해 병참부대에는 위안소 1호가 있었다. 위안소 정문 오른쪽에는 '성전대권용사대환영'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어 '거룩한 전쟁의 대세를 가진 용사를 환영한다'는 의미이다. 왼쪽의 '신심봉대화무자의 서비스'라는 글귀는 '일본인들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는 영광된 여자'라는 의미다
 상해 병참부대에는 위안소 1호가 있었다. 위안소 정문 오른쪽에는 '성전대권용사대환영'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어 '거룩한 전쟁의 대세를 가진 용사를 환영한다'는 의미이다. 왼쪽의 '신심봉대화무자의 서비스'라는 글귀는 '일본인들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는 영광된 여자'라는 의미다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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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일본 마이니찌 신문이 보도한 위안부 모습 . 종군기자가 찍어 '불허가'판정을 받았던 사진이 해제되어 보도됐다.
 1977년 일본 마이니찌 신문이 보도한 위안부 모습 . 종군기자가 찍어 '불허가'판정을 받았던 사진이 해제되어 보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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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길 교수가 제공한 사진자료를 보면 위안소 1호는 상해 병참부대에 있었다. 위안소 정문 오른쪽에는 "성전대권용사대환영(聖戰大捲勇士大歡迎)"이란 간판이 걸려있다. 이 글은 "거룩한 전쟁의 대세를 가진 용사를 환영한다"라는 의미이다. 왼쪽 간판에는 "신심봉대화무자(身心棒大和撫子)의 서비스"라 쓰여져 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일본인들에게 몸과 마음을 바치는 영광된 여자"란다.

'마이코'는 당시 일본군인들이 붙인 조선위안부란 뜻이다.  주로 16세 소녀들로 남자경험이 없는 순수한 마이코는 일본군인들에게 대인기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안부는 8만명으로 군인 40명당 위안부 한 명이 배당되었다고 한다.

"위안소를 일본 군대가 아니라 민간에서 운영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일본군의 문서도 보여줬다. 일본군 보병 21연대 7중대에서 작성한 '진중일지(陣中日誌)(1942.3.1.~3.31) 내용이다.

일본군부가 발행한 위안부 연행문서 모습.
 일본군부가 발행한 위안부 연행문서 모습.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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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보병 21연대 7중대에서 작성한 진중일지로 "병참에서 지정한 위안소 외에 사창가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일본군 보병 21연대 7중대에서 작성한 진중일지로 "병참에서 지정한 위안소 외에 사창가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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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참에서 지정한 위안소 외에 사창가(私娼家)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한다. 위안소에 출입하는 군인은 출입증을 가진 자만 출입시키고 출입증이 없는 자는 순찰하여 신고할 것"

김문길 교수는 "이 문서를 보면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명백하게 허위입니다"라고 말했다.  문서의 표제부에는 군사기밀이라는 내용과 함께 공식 문서임을 증명하는 연대장의 도장이 찍혀 있다. 아래는 강의를 들은 허민경양의 소감문이다.

"강의를 통해 위안부를 증명할 수 있는 동영상 자료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동영상 속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두려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화가 났고 여태껏 무관심했던 내 자신이 미웠다. 소녀상 제막식과 강의를 통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기억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 더욱이 잊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자발적인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덧붙이는 글 | 전남교육소식지와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여수삼일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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