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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공공 도서관에서 지난달 28일, 야무진 인문학 강의 강사로 시인 안상학을 초청했다. 강의는 7시 무렵에 시작되었지만, 나는 그보다 조금 일찍 도서관 앞 서림 공원에 도착했다.

달빛 하나 비추지 않는 공원으로 한 사내가 꼿꼿하게 걸어왔다. 꼿꼿하다고 해서 위엄이나 강단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살짝 허술하기도 하고, 헐렁하기도 한 걸음에 시인의 나이는 보이지 않았다. 땅을 걷는다기 보다 하늘의 허방을 짚고 서 있는 듯한 시인의 품세에서 '하늘도 바닥이 있다'(<바지랑대> 중, 30p)는 시 구절이 떠올랐다.

시인의 인문학 강의를 듣기 전, <아배 생각>이라는 시집이 있다 정도만 알뿐, 그의 시집을 제대로 읽어본 적은 없었다. 기억이 왜곡되지 않았다면, 내가 안상학 시인을 처음 본 것은 아마도 군을 제대하고 나서다.

2007년 혹은 2008년 무렵 고등학교 은사이신 김경윤 선생님을 쫓아 따라간 김남주 시인이 영면한 망월동 묘지가 아니었나 싶다. 그 기억이 강렬하거나 의미 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사람의 만남이라는 것이 때론 죽음이라는 살강에서도 이어진다는 것이 이상 야릇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6)
 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6)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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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날, 시인의 강의는 춘하추동(春夏秋冬)에 따른 사계의 절기와 관련한 동식물의 아스라짐과 역동성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강의 중간에 시인이 암송하는 시는 또 다른 재미를 더했다. 그리고 한가위 연휴 동안,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라는 시집을 찾아 읽었다. 바지랑대라는 시도 이 시집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시집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 나는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노루가 고개를 넘어갈 때 잠시 돌아보듯/ 꼭 그만큼이라도 거기 서서 기다렸어야 했네/ 그때가 밤이었다면 새벽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면 봄을 기다렸어야 했네/ 연어를 기다리는 곰처럼/ 낙엽이 다 지길 기다려 둥지를 트는 까치처럼/ 그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어야 했네// 해가 진다고 서쪽 벌판 너머로 달려가지 말았어야 했네/ 새벽이 멀다고 동쪽 강을 건너가지 말았어야 했네/ 밤을 기다려 향기를 머금는 연꽃처럼/ 봄을 기다려 자리를 펴는 민들레처럼/ 그때 그곳에서 뿌리 내린 듯 기다렸어야 했네/ 어둠 속을 쏘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을 찾아 눈 내리는 들판을/ 헤매 다니지 말았어야 했네// 그 사람이 아침처럼 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그 사람이 봄처럼 돌아왔을 때 나는 거기 없었네/ 아무리 급해도 내일로 갈 수 없고/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어제로 돌아갈 수 없네/ 시간이 가고 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니었네/ 계절이 오고 가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게 아니었네/ 그때 나는 거기 서서 그 사람을 기다렸어야 했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전문, (20~21p)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나간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다. 가을에 추곡(秋穀)이 끝난 들판이 얼기설기 보인다. 인연의 자리도 그와 같지 않을까. 화자의 말처럼 아무리 급해도 내일도 어제로도 돌아갈 수 없이 남는 오늘의 미련은 무엇을 물어보는 것일까. 진중히 인연을 기다릴 수 없는 삶의 안타까움은 무엇일까.

해남공공도서관. 9월 28일, 안상학 시인 인문학 강의 장면
 해남공공도서관. 9월 28일, 안상학 시인 인문학 강의 장면
ⓒ 해남공공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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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이 지나고, 동네 어귀에 걸린 고향 방문 환영이라는 플래카드가 바람에 펄럭인다. 아마 저것도 며칠 후면 언제 있어냐는 듯 내려질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내 것인 줄 알았던 공간도 사실 누구의 것도 아닌 것임을 안다. 내가 떠난 자리, 네가 떠난 자리, 그것들을 메우는 오늘의 소리는 장구나 징 소리처럼 경쾌하지 않다.

시인은 하룻밤 더 해남에서 머물고, 목포로 해서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다. 그 만남이 아쉬운 몇몇의 사람은 시인과의 그리움을 달랜다고 했다. 그중 몇은 '미황사 그늘 속 깊은 자궁으로 돌아간' (<어느 물푸레나무 시인의 죽음> 중, 62p) 김태정 시인을 생각했다.

다시, 시인의 걸음을 생각한다. 허술하고 헐렁하다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손을 준다' (<호박에게 손을 준다는 것> 중, 89p) 는 것이다. 그러면 누구는 그 누가의 손을 잡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빈자리를 내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삶의 자세일까. 아직 어떠한 삶의 태도나 가치도 세우지 못한 내게 시인은 떠난 자리에 질문만 덩그러니 놓았다. 아주아주 은밀하게 그리고 철없이 웃으면서 말이다.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안상학 지음, 실천문학사(2014)


태그:#안상학,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아배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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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생. 전남대학교 일반대학원 문화재협동학 박사과정 목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졸업. 융합예술교육강사 로컬문화콘텐츠기획기업, 문화마실<이야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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