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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동 고분군 전경이다. 대가야인들은 이곳 주산 위에 고분을 조영했다.
▲ 지산동 고분군 전경 지산동 고분군 전경이다. 대가야인들은 이곳 주산 위에 고분을 조영했다.
ⓒ 윤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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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당간지주 옆 양지바른 곳에 백구가 잠들어 있어 사진을 찍었더니 그만 깨고 말았다.
▲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보물 제54호)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 당간지주 옆 양지바른 곳에 백구가 잠들어 있어 사진을 찍었더니 그만 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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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살아간 사람들은 어떤 형태로든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은 후대인들이 과거를 깨울 수 있는 매개물이다. 그런데 야속한 시간은 아련한 자취만을 남긴 채 여전히 잠들어있는 흔적을 양산할 때가 있다. 특히 역사의 주역이 아니었던 경우는 더 그렇다. 역사를 '주인공', '지도자',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새롭게 조명하려 할 때 후대인들은 그 흔적의 아련함에 아쉬움을 금할 길이 없을 때가 많다. 사실 역사에는 주인공이 없다. 역사란,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함께 일구어가는 과정이리라.

이런 시야를 가진 채 나는 대가야(大加耶)의 터전이었던 고령의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으로 향하는 길을 걸었다. 먼저 사람들의 발길로 활기가 넘치는 장터(고령장은 4, 9일장이다)를 지났다. 거대 자본의 독점욕이 닿지 않은 장터에는 오순도순 함께 살아가는 생명력이 살아있었다. 무척 반가웠다. 어쩌면 이는 예전 백제, 신라의 국가적 팽창욕에 소멸된 가야인들이 오늘날 이곳을 찾은 방문객들에게 던져주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계속 길을 걷다가 도로 한 가운데서 보물 54호인 고령 지산리 당간지주와 마주쳤다. 홀로 우뚝 선 당간지주는 낯선 방문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신라 하대에 조성된 이 당간지주 주변에는 원래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지금은 흔적조차 없다. 당간지주가 서있는 곳은 겨울의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양지바른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당간지주 옆 누런 잔디 위에 백구 한 마리가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개 팔자 상팔자! 고 녀석이 하도 귀여워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주변 개들이 왈왈 짖으며 한바탕 난리다. 결국 백구도 단잠에서 깨고 말았다.

미소를 머금은 채 좀 더 길을 걸으니 이내 산 위의 고분들이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대가야박물관 옆의 산책로를 따라 주산(主山)에 올랐다. 지산동 고분군은 대체로 5∼6세기경에 조영되었다. 이 시기 대가야는 섬진강 일대로 진출해 뱃길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고, 신라와 대치할 정도로 성장했으나, 530년대 이후 백제와 신라의 팽창에 직면해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대가야인들은 이곳 주산의 줄기를 따라 무덤을 조영하고 산성을 쌓았다. 이처럼 주산은 대가야 사람들의 의지처였다. 산성이 산자들의 의지처였다면, 무덤은 죽은 자들의 의지처였다.

주산 동남쪽 능선 자락 끝에는 지산동 30호분이 단독으로 있다. 이 고분을 축조한 사람들은 이전시대 사람들이 그린 암각화가 새겨진 돌을 하부 덧널의 덮개돌로 사용했다. 이는 이제 더 이상 암각화가 신앙의 대상이 되지 못했음을 증언한다. '시대의 변화'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고분 속 덮개돌의 암각화는 그 점을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이처럼 역사는 과거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망각되는 과정이다.

구릉 위에는 크고 작은 고분들이 밀집되어 있었다. 대가야통문 위를 지나자 지산동 1호분과 2호분이 웅장한 자태로 맞이했다. 그런데 규모가 큰 왕릉급 고분일수록 가까이에서 다 담을 수 없어 멀리서 촬영해야만 했다. 이게 왕릉의 속성인 것일까? 이곳의 고분들은 외형상 화려하지도 소박하지도 않아 그 어떤 색채도 드러내지 않았다. 이점이 곧 이곳의 매력이리라. 얼마 전 지산동고분군은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다. 이로써 지산동고분군은 '상실된 역사의 상징'에서 '상실된 역사를 깨우는 흔적'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태그:#고령, #지산동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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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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