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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멀쩡하다고 해서 국가의 부름을 받은 아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유공자 혹은 보훈보상대상자로 '인정받기' 위해 엄마는 직접 아들의 사체검안서를 들고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실 엄마는 보상금을 주겠다는 종이 쪼가리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게 있습니다. 철저한 조사, 투명한 정보공개, 진심어린 사과, 따뜻한 위로,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 말입니다. 웃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일상이 그들의 가슴에 콕콕 트라우마를 새겼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국가 차원의 군트라우마센터를 만들자는 의미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바로가기)에서 국가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군피해치유센터 함께'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 아들은 왜 거수경례를 한 채 철로 위에 섰을까
ⓒ 안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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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자신이 사랑하던 철길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자신이 사랑하던 철길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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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일터로 향하는 길에 아들이 죽은 자리를 매번 지나야 했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일터로 향하는 길에 아들이 죽은 자리를 매번 지나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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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2일 전, 휴가 나온 아들이 죽었다. 아들은 집앞 기찻길에서 거수경례를 한 채 생을 마감했다.

아들 이야기를 하는 엄마의 손은 자꾸 가슴으로 향했다. 연신 손바닥으로 가슴을 짓이겨봤지만, 콱 박힌 바윗돌은 좀처럼 내려앉지 않았다. 눈물과 말이 뒤섞인 엄마의 응어리가 자신도 모르게 끊임없이 쏟아졌다.

"아이고 이놈아, 엄마보고 평생 잊지 말라고 집 앞에서 이렇게... 이렇게 돼 버렸냐..."

2015년 5월 27일은 고 김대웅 일병(가명, 살아 있다면 25세)의 휴가 마지막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야 했던 엄마는 현관문을 나서기 전 아들을 꼬옥 껴안았다.

"엄마가 (부대에) 못 데려다 줘서 미안해. 아들, 엄마가 사랑해."

아들은 평소처럼 답했다.

"네, 엄마. 알았어요."

엄마는 그렇게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흰 천을 든 순간 '내 새끼구나...'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기차를 좋아했다. 주인을 잃은 김 일병의 방에는 직접 찍은 기차와 철도 사진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기차를 좋아했다. 주인을 잃은 김 일병의 방에는 직접 찍은 기차와 철도 사진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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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사진을 엄마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사진을 엄마가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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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에 나온 엄마는 자신이 평소와 다름을 느꼈다.

"제가 십몇 년 일하면서 그런 적이 없었거든요? 손님하고 싸운다든가, 물건을 던진다든가... 근데 그날따라 가슴이 콩닥콩닥한 게 뭔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아서..."

사실 엄마의 가슴엔 이미 근심의 싹이 움터 있었다. 휴가 첫날 만난 아들은 살이 쏙 빠져 있었다. 엄마는 "너 왜 이렇게 살이 빠졌어?"라고 반복해 물었다. 아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밥을 잘 못 먹어서 그래요"라고 답했다. 엄마는 "저녁에 맛있는 거 해줄게"라며 아들의 등을 토닥였지만, 하루 종일 아들의 야윈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들이 생을 마감하기 전날, 엄마는 아들의 머리카락을 보며 또 한 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머리 한 켠엔 큰 구멍 두 개가 숭숭 뚫려 있었다.

아들 : "엄마, 머리가 이상해요."
엄마 : "어디 봐봐. 어? 이거 원형탈모 아냐? 부대에서 무슨 일 있었니?"
아들 : "아니에요."
엄마 : "뭐가 아니야? 이거 왜 이런 거야?"
아들 : "이발병이 머리를 찝었나 봐요."
엄마 : "머리를 찝었으면 까끌까끌한 거라도 남아야 하는데, 이건 완전 뽑힌 거잖아. 부대에서 무슨 문제 있니?"
아들 : "아니에요."
엄마 : "말을 해야 부대 쪽이랑 이야기해서 문제를 해결할 거 아냐?"
아들 : "아니에요. 괜찮아요, 엄마."

엄마의 불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일이 손에 안 잡히던 와중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휴가 복귀하는 애가 군복을 벗어놓고 나갔어. 이상해... 자기 방에 물건들을 싹 다 정리해놓고 나갔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는 아들이 탈영한 것으로 생각했다. 황급히 집으로 돌아오던 중, 남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경찰에서 연락이 왔네. 병원에 시신 한 구가 있는데 와서 확인해 보래..."

병원까지 운전하고 가는 길, 엄마에게 그 15분 정도의 시간은 새까맣게 지워져 있다. 다만 자신이 수도 없이 외쳤던 말, 엄마는 그것 하나만큼은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제발 아니기를... 제발 아니기를..."

흰 천을 들추기 전, 엄마의 손은 이미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시신의 얼굴이 많이 망가져 있었지만, 엄마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내 새끼구나...'

엄마는 "꿈일 거야, 사실이 아닐 거야"라고 울부짖으며 병원 벽에 머리를 박아댔다. 남편이 겨우 아내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내 새끼, 다시는 돌아올 수 없구나'라는 생각이 엄마의 가슴에 지그시 물들기 시작했다.

아들의 유서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아들이 떠난 자리를 지나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아들이 떠난 자리를 지나는 기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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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가 아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아들이 죽은 후, 기찻길을 따라 사람 키보다 높은 굵은 철조망이 설치됐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가 아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아들이 죽은 후, 기찻길을 따라 사람 키보다 높은 굵은 철조망이 설치됐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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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휴가 마지막날 기찻길로 나와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 생을 마감했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휴가 마지막날 기찻길로 나와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 생을 마감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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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마지막 날, 아들은 부대 대신 기찻길로 향했다. 집에서 걸어가면 15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기찻길 앞 중국음식점에 달려 있던 CCTV는 살아 있는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서성이던 아들은 결국 CCTV 밖으로 걸어 나갔다. 기찻길 방향이었다.

기관사의 증언에 따르면, 아들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기차를 정말 좋아했던 아들이었다. 장난감을 고를 때, 아들의 손은 오로지 기차를 향했다. 아들이 선택한 꿈도 철도기관사였고, 대학에서도 철도기관사과를 다니던 중이었다.

아들의 방은 그가 기차와 함께 했던 흔적으로 가득했다. 엄마는 아들이 잔뜩 인화해 둔 기차 사진을 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좋아했던 거라, 마지막에도 기차를 선택했나 봐요."

아들이 죽은 후, 기찻길을 따라 사람 키보다 높은 굵은 철조망이 설치됐다. 그 철조망을 볼 때면, 엄마는 또 다시 괴로움에 시달린다.

'진작 저 철조망이 있었다면...'

아들은 죽기 전 유서를 남겼다. 길지 않은 유서였지만, 아들이 안타까운 선택을 한 이유를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군생활 한 지 거의 1년이 다 돼 가는데 너무 힘들다. 나의 행동 하나하나를 한심하게 보고, 답답하게 보고. 그 동안 참을 만큼 참았고, 울기도 울었고,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지쳤다. 겉으로 괜찮은 척, 좋은 척 하는 것도 이젠 한계다. 초반에 어리버리해서 욕도 많이 먹었다. 간부나 선임들이 하라는 대로 해서 여기까지 왔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 정비관의 변덕스런 성격도 싫고, 다른 정비 간부들에게 피해주고 그러는 것도 싫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고 했듯이 피해 줄 바엔 내가 떠나야지. 가족들한테 죄송합니다. 먼저 가게 돼서..."(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유서 중에서)

국방부는 아들의 죽음을 '순직'으로 인정했다. 아들이 다른 장병에 비해 "개인적 취약성"을 띠고 있었지만, "병영생활 자체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 "소속 부대에서의 부적절한 대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사고가 발생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아들은 유서에도 나오는 정비관(사망 5개월 전에 전입)으로부터 잦은 질책을 들었고, 부대에서 진행한 검사에서 위험군으로 분류됐었다. 하지만 부대는 가족에게 연락하거나 전문가 면담 등의 필요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가보훈처의 생각은 국방부와 달랐다. 국가보훈처는 국방부로부터 순직 처분 받은 아들을 '보훈보상대상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아들의 죽음을 위로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다.

아들 때문에 아들이 죽었다는 보훈처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아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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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는 아들의 죽음을 개인 탓으로 돌렸다. 정비관의 잦은 질책과 부대의 미흡한 대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아들의 죽음과는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

"고인이 일반적인 군복무의 범주를 벗어나 다른 동료들에 비해 특수한 근무여건 하에서 과중한 업무를 수행해 왔다거나, 도저히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극도의 육체적 과로와 정신적 스트레스 환경에 처해 있었다고 볼 만한 객관적인 사정이 확인되지 않는다."(국가보훈처)

그러면서 국가보훈처는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때 세 차례 받았던 정신과 상담을 문제삼았다. 이는 국방부가 순직 처분을 내리는 과정에서 이미 고려했던 사안이었다. 그럼에도 국가보훈처는 사망으로부터 7년 전 일을 들고 나와 "입대 전 발병 병변도 재해 사망의 한 원인으로 보여진다"라고 적시했다. 엄마는 자신이 아들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뿐만 아니라, 이러한 국가의 무책임한 태도에도 트라우마를 느끼고 있다.

"아들이 중학교 3학년 땐가... YMCA가 길거리에서 청소년 상담 캠페인을 벌이고 있더라고요. 아들이 내성적이고, 한창 사춘기여서 상담을 받았죠. 그때 상담사가 전문 상담가를 찾아가 보라고 하더라고요. 이후 병원에서 1시간씩 총 세 번 상담을 받았습니다. 이후 추가 상담도 없었고, 약 같은 것도 처방받지 않았어요. 멀쩡한 남자라고 해서 군대에서 데려간 것 아닙니까. 근데 왜 죽고 나면 멀쩡하지 않은 이유가 자꾸 만들어지는 건데요? 어떻게 죽었든 군대가 죽인 겁니다."

엄마의 절규와 함께, 국가보훈처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 있다.

"90% 이상의 사람이 적응하는 곳이라고 해서 그곳이 문제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중략)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불면의 밤을 보낸 젊은이들이 견디다 못해 택한 마지막 결정인 자살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이영문 아주대 인문대 특임교수(정신과 전문의, 해병대 인권위원), <군 피해자 치유·지원센터의 필요성과 한계>, 2017년 4월 12일)

엄마의 가슴이 다시 두근거리는 이유

아들의 죽음 후, 엄마의 일상은 무너졌다. 군에서 현장 조사를 한다며 동네를 휘젓고 다닌 통에 아들의 죽음이 이곳저곳 알려지게 됐다. "대웅이가 여자친구 때문에 죽었다더라"는 거짓 소문도 엄마의 귀에 들려왔다.

"집 밖엘 나가지 못하겠더라고요. 어쩌다 나가게 되면 모자를 푹 눌러 쓰고 나갔어요. 난 하나도 잘못한 게 없는데 마치 죄인마냥..."

엄마는 흰 천을 들어 아들의 죽음을 확인하던 순간이 지금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한 동안 심한 두통에 시달렸는데, 아들의 얼굴이 기차에 부딪혀 함몰된 부위, 딱 그곳에 지진이 난 듯 통증이 몰렸다. 항상 강건한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펑펑 우는 모습을 보는 것도 엄마에겐 힘든 일이었다.

엄마의 짐은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재판도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엄마가 재판을 진행하는 이유는 단순히 아들을 보훈보상대상자로 만들어 지원을 받으려는 게 아니다. 엄마는 아들의 죽음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명확히 짚고 싶다. 그 와중에 "자식 몫숨값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조심스레 움직이는 것도 엄마의 어깨를 짓누른다.

이러한 고통에, 한동안 엄마는 술로 밤을 지새웠다. 많을 땐 소주 4병을 마시고 인사불성이 돼서야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둘째 아들의 호소에 엄마는 정신을 차렸다.

"엄마, 저는 안 보여요? 형아만 자식이고, 저는요?"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남아 있는 둘째 아들의 사진을 핸드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해놨다. 둘째 아들은 곧 군대를 가야할 나이가 되어 입대를 앞두고 있다.
 고 김대웅 일병(가명)의 엄마는 남아 있는 둘째 아들의 사진을 휴대폰 배경화면으로 지정해놨다. 둘째 아들은 곧 군대를 가야할 나이가 되어 입대를 앞두고 있다. 휴대폰 뒤 종이는 엄마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소송의 소장이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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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아차' 싶었다. 술을 줄였고, 운동을 시작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이는 '군피해치유센터 함께'에도 자주 나갔다. 그곳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다른 엄마들과 대화를 나누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았다.

"겉으론 웃어도 속에선 진짜 썩어 문드러지거든요. 아들이 죽기 전으로 돌아갈 순 없겠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일상을 찾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데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은연중에 마음이 좀 편해지더라고요."

그런데 엄마는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들을 잃었던 군대에 둘째 아들을 또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둘째만 생각하면 어휴..."

엄마의 군대 밖 전쟁은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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