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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尹伊桑, 1917~1995)을 아시는가? 독일에 머물던 1967년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고문 끝에 '동베를린 간첩단'으로 조작된 사람, 조국의 통일과 민주주의를 위해 모든 걸 바쳤지만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눈을 감은 비운의 음악가.

올해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했지만 우리는 아직 그를 온전히 알지 못한다. 분단과 냉전의 기득권 체제가 그의 '인간'과 '음악'을 질식시키고 일그러뜨렸기 때문이다.

 윤이상, 그는 20세기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힌다
 윤이상, 그는 20세기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힌다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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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20세기의 세계 5대 작곡가로 꼽힌다는 사실은 표면적인 찬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958년 다름슈타트(Darmstadt) 음악제에 참가, 음악인지 아닌지 모를 존 케이지의 퍼포먼스를 목격한 윤이상은 "산더미를 준다 해도 이런 짓을 하기는 싫다"고 했다. 그는 슈토크하우젠, 루이지 노노, 피에르 불레즈의 음악에 매료됐지만, "교묘한 형태의 현대식 고층건물" 같은 이런 작품들을 쓸 생각이 없다고 했다.

대신 그는 동양 음악의 '주요음(Hauptton)' 기법을 도입, 노자의 철학과 같은 환상의 세계를 그렸다. 서양음악은 점과 점을 연결하는 직선으로 이뤄진 도형이지만, 동양음악은 한 획으로 이뤄져 있으며 굵기가 계속 변한다.

1959년 다름슈타트에서 발표한 <일곱 악기를 위한 음악>과 1966년 도나우에싱엔(Donaueschingen) 음악제에서 선보인 <예악>은 '주요음' 기법을 사용한 걸작이다. 그는 궁지에 몰려 비틀거리던 서양음악에 동양의 혼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력을 창조했다.

지난 봄, 햇살 따뜻한 남쪽 통영의 푸른 바다에서 그를 느낀 게 기억난다. 그의 기념관에서 한참 선 채로 <낙양>의 아득한 선율에 마음을 맡겼다. 윤이상은 자신의 음악은 모두 통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고향에서 들었던 소리가 그의 음악 모티브였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물색, 가끔 파도가 칠 때도 그 파도소리는 내게 음악으로 들렸고, 그 잔잔한 풀을 스쳐가는 초목의 바람도 내겐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39세 때 독일로 떠나서 78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국땅에서 통한의 세월을 보내는 동안 아름다운 고향의 소리는 언제나 그의 마음에 사무쳤다. 이 통영 거리에서 그의 이름을 지우고, 생가에 그의 이름을 쓸 수 없게 한 야만의 레드 콤플렉스, 그것이야말로 분단과 냉전이 낳은 가장 깊은 적폐 아니었을까.




윤이상을 정치적으로 만든 사람은 박정희였다. 1964년, 박정희가 서독을 공식 방문했을 때 환영 행사에서 본(Bonn) 시립교향악단이 윤이상의 <낙양(洛陽)>을 연주했다. 이어진 커피 타임, 뤼프케 서독 대통령이 좌중에게 윤이상을 소개하자 박 대통령은 아무 표정도 없이, 한마디 말도 없이 손만 내밀었다.

윤이상, 박정희, 뤼프케의 순서로 자리가 배치됐는데, 음악에 식견이 있던 뤼프케 대통령은 박정희를 가운데 두고 윤이상을 향해 자꾸 <낙양>에 대해 얘기했다. 박정희는 그 시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윤이상과의 첫 만남을 불쾌하게 여긴 게 분명하다. 4·19혁명 때 피에 묻혀 뒹구는 청년 학생들을 생각하며 라디오 앞에서 펑펑 울었던 윤이상,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은 5·16쿠데타의 주역 박정희…. 두 사람은 아무래도 서로 좋아할 수 없었다.

불길한 첫 만남은 3년 뒤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으로 비화됐다. 1967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동시에 치렀는데, 부정선거 시비가 끊이지 않자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조작하여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고문에 굴복할 수 없었던 윤이상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책상 위의 묵직한 유리 재떨이로 자신의 뒤통수를 여러 차례 강타하여 자살을 기도했다. 철철 흐르는 피를 손가락에 묻혀서 벽에 유언을 썼다. "나의 아이들아, 나는 스파이가 아니다." 인류의 지성과 문화를 부정하는 한국 군부의 폭거에 세계의 음악가들이 팔을 걷어붙였고 박정희는 윤이상을 석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납치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 것" 등을 요구하고, 이를 무시할 경우 "적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고 협박한 뒤 윤이상을 한국에서 추방했다.

윤이상은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①

"그때까지 나의 예술적 태도는 비정치적이었다. 그러나 1967년의 그 사건 이후 박정희와 김형욱은 잠자는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은 격으로 나를 정치적으로 각성하게 하였다. 나는 그때 민족의 운명을 멸망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악한(惡漢)들이 누구인가를 여실히 목격하였다."

진정한 예술가는 당대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며,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끌어안아 내적으로 성숙시켜 예술로 꽃피운다. 윤이상은 분단과 독재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예술을 기꺼이 바쳤다.

5·18의 참상을 듣고 몸부림치며 <광주여, 영원히>를 작곡했고, 1987년에는 남쪽 시인들의 노랫말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작곡, 북쪽 예술가들과 함께 평양에서 초연했다. 그는 고향 땅을 밟고 싶었고, 음악으로 민족을 하나 되게 만들고 싶었지만 전두환 군부정권은 그의 입국을 한 번도 허용하지 않았다.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한국 정부의 인식 수준은 여전히 저열했다. 윤이상은 방한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하는 편지를 대통령 앞으로 보냈는데, 총리는 "지난 날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서 미안하다는 것, 앞으로 예술에만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윤이상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내용이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 윤이상에게 국가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기는커녕, 오히려 반성문 제출을 요구하는 꼴이었다. 이리하여 윤이상이 고향땅을 밟을 마지막 기회는 사라졌다. 그는 이듬해, 1995년 11월 3일, 머나먼 이국 땅 베를린에서 78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윤이상의 영혼은 지금도 한반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너무 몰랐다. 무엇보다, 그를 분단의 감옥에 가뒀기 때문에 제대로 알 수가 없었다. 그를 이념의 잣대로 재단하여 금기시 한 것이야말로 적폐였다. 자기가 태어난 땅에서 유배된 예술가, 분단의 벽에 머리를 짓이기고, 통한의 한반도를 끌어안은 채 음악으로 울부짖은 윤이상…. 그의 탄생 100년을 맞아 이제 온전한 마음으로, 자랑스런 마음으로 그의 음악을 받아들이자.

① 이수자 『내 남편 윤이상』 하, p.14~p.15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채훈님은 MBC 해직PD, 클래식 해설가입니다. MBC에서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클래식 음악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 2012년 해직된 뒤 <진실의 힘 음악 여행> 등 음악 강연으로 이 시대 마음 아픈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저서 『클래식, 마음을 어루만지다』, 『클래식 400년의 산책』 등이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참여사회>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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