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0년 2월 15일 제일제당 문선기 부사장과 대한제과협회 비상투쟁위원회 김지정 위원장은 "제일제당이 운영하는 제과점 뚜레주르를 현수준에서 동결한다"는 합의문을 발표했다. CJ는 오늘 날 종합엔터테인먼트 기업의 성격이 강하지만 CJ의 전신이었던 제일제당은 밀가루와 설탕 등 식료품사업을 주로 영위하던 회사였다. 당연히 제일제당의 최대 고객은 제과점이었다.

제일제당이 프렌차이즈 제과 브랜드인 뚜레주르를 론칭한 것은 1997년이다. 당시는 지금과 달리 동네에 저마다의 빵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빵집 사장님들은 꼭두새벽부터 일터에 나와 반죽을 하고 빵을 구웠다. 밀가루 시장은 대한제분과 제일제당 등 몇 개 되지 않는 회사들에 의해 과점된 상태였다. 제일제당은 그중 가장 큰 회사였다.

빵집 사장님들은 제일제당에서 밀가루와 설탕을 사다 빵을 만들었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이 팔아주었던 밀가루회사가 직접 빵을 팔겠다고 나선 것이다. 빵집 사장님들은 "열심히 팔아 회사를 키워줬더니 이젠 우리 밥그릇을 넘본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한제과협회는 제일제당에게 불매운동에 나서겠다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제일제당은 동네마다 있는 빵집에서 밀가루와 설탕을 팔아주지 않는다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었다. "뚜레주르를 현수준에서 동결한다"는 합의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17년이 지난 오늘, 2000년 대한제과협회와 제일제당의 합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되었다. 동네빵집들은 모두 사라졌고, 그 자리는 뚜레주르나 파리바게트 같은 대기업 프렌차이즈 제과점들이 차지했다. 회원이 턱없이 줄어든 대한제과협회는 명맥만을 유지할 뿐이다. 제일제당과 같은 대기업과 얼굴을 붉히며 협상을 하던 대한제과협회의 모습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요리사로는 프렌차이즈를 할 수 없다

맥도날드화(McDonaldization)라는 용어가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만들던 동일한 제품이 나올 수 있도록 모든 것을 규격화하는 맥도날드의 방식을 일컫는 말이다. 대부분의 프렌차이즈 업체는 맥도날드화를 도입했고 이를 통해 시장을 장악했다.

맥도날드화의 핵심은 숙련의 박탈이다. 요리사는 감각적으로 기름의 온도를 느끼고 눈으로 맛있게 튀겨진 감자의 상태를 파악한다. 감각에 의지해 맛있는 감자튀김을 만들어 내는 기술은 한 두 번의 시도로 얻어질 수 없다. 오랫동안의 시행착오를 거치는 숙련과정을 통해야 비로소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이다.

그러나 숙련된 요리사들로는 패스트푸드점을 운영할 수 없었다. 맥도날드는 튀김 통에 온도계를 설치하고 감자가 맛있게 튀겨지는 시간을 알려주는 스탑워치를 통해 감자튀김에 필요한 숙련을 제거했다. 이젠 누구라도 자동으로 온도를 맞춰주는 튀김 통 안에 감자를 넣고 알람이 울릴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맛있는 감자튀김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제과 프렌차이즈는 조금은 다른 방식을 취했다. 숙련의 배제가 아닌 저숙련을 택한 것이다. 동네빵집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이었을 것이다. 프렌차이즈 업체로써 제과점의 모든 숙련을 없애 버리고 싶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동네빵집을 이길 수 없었다. 소비자들의 기억 한 편에는 매일 아침마다 빵을 굽는 냄새로 주민들의 식욕을 자극하는, 오븐에서 갓 꺼낸 따끈따끈한 빵이 진열대에 오르는 빵집의 모습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오븐에서 직접 빵을 꺼내지 않고는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만들기 어려웠다. 하지만 오븐을 운영하려면 제방사가 있어야 했고 감자튀김과는 달리 제빵사의 숙련은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다. 제빵사를 고용하지 않으려면 공장에서 만들어져 납품되는 빵만을 팔아야 하는데 공장의 빵으로는 동네빵집에 비해 싸구려라는 이미지를 피할 수 없다. 고급 제과시장에서 동네빵집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냉동생지를 통해 날조된 고급빵집의 이미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파리바게뜨 제빵사는 프렌차이즈 제과업체가 숙련의 제거와 고급화 사이에서 적절한 타협을 이룬 결과다. 오븐으로 직접 빵을 구울 정도의 숙련을 갖춘 제빵사를 사용하면 비용도 문제지만 제빵사 인력 수급의 어려움 때문에 매장을 확장해 나가는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이 전국에 걸쳐 수천 개의 매장을 운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오븐을 포기할 수도 없다. 결국 그들은 공장에서 발효시킨 냉동생지를 납품받아 매장에서는 오븐으로 익히기만 하는 방법을 택했다. 오븐에서 빵을 꺼내는 이미지가 중요할 뿐 반죽을 어디서 했느냐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빵사도 생지를 오븐으로 구울 수 있는 정도의 숙련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러나 냉동생지는 제빵사에게 요구되는 숙련도를 낮췄을 뿐 완전히 없앨 수는 없었다. 맥도날드의 감자튀김에는 단시간·임시직 노동자를 필요할 때만 탄력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만 제빵사는 그럴 수 없었다. 일정수준 숙련을 갖춘 제빵사를 고용하기 위해서는 프렌차이즈 업체가 직접 고용해야 했다.

하지만 직접고용 근로자를 사용하면 가맹점의 증감에 따라 인력을 조절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제빵사를 가맹점에서 직접 고용하도록 할 수도 없었다. 빵의 품질을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서는 제빵사들의 적절한 숙련도를 유지해야 한다. 가맹점에서 제빵사를 직접 고용해서는 제빵사들의 숙련도를 통일 시킬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품질이라는 프렌차이즈의 핵심가치가 깨지는 것이다.

프렌차이즈 제과업체가 찾아낸 방법은 파견업체를 통한 제빵사의 공급이었다. 직접고용을 하지 않으니 가맹점의 증감에 따라 얼마든지 제빵사의 수도 조절할 수 있었다. 제빵사들이 일정한 파견업체에 소속되어있음으로써 통일된 숙련도 확보할 수 있다. 제빵사의 파견은 맥도날드화와 고급화 사이에서 프렌차이즈 제과업체가 찾아낸 묘수였다. 파리바게뜨의 제빵사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하지만 빵집의 핵심 업무인 제빵을 완전히 파견업체를 통해서만 관리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리바게뜨가 근로를 감독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불법 파견으로 이어졌다. 파견이 불법이라면 직접 고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파리바게뜨는 난색을 표하고 있다. 겉으로는 경제적 어려움을 호소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파견을 통한 저숙련 제빵사의 공급을 포기한다는 것은 프렌차이즈 제과업을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구조를 유지하는 한 파리바게뜨에게 제빵사의 직접고용이라는 선택지는 존재할 수 없다.


프렌차이즈 제과업체는 저숙련 제빵사의 파견을 통해 지금의 위치에 올라섰다. 그 뒤에는 십여 년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동네빵집 사장님들의 고통이 있었다. 제빵사의 불법파견이라는 부당한 방식이 없었다면 아직도 동네 곳곳 저마다의 빵집들은 매일 새벽마다 빵굽는 구수한 냄새를 풍기고 있을 것이다. 파리바게뜨의 불법파견 문제는 단순히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넘어 동네빵집의 씨를 말려버린 프렌차이즈의 횡포에 대한 문제다. 이를 기회로 동네상권을 초토화 시키는 대기업 프렌차이즈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태그:#파리바게트, #제빵사, #프렌차이즈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법률사무소 사람사이 대표 변호사다. 민변 부천지회장을 역임했고 현재는 경기도 의회 의원(부천5, 교육행정위원회)으로 활동 중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