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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 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3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양치했으면 물 잠가야지!"

기분 좋게 밥 먹고 와서는 또 잔소리를 쏟아대고 있다. 2학기 중순을 향해 가는 마당에 여전히 양치컵 사용이 잘 안 된다. 사물함에 멀쩡히 컵을 모셔 두고, 가져가지 않는다. 체육관 갈 때 전등 안 끄기, 다 쓴 풀 뚜껑 열어두기, 반찬 추가로 받아 놓고 남기기... 어째 나눗셈 원리 가르치기보다 생활 지도가 더 힘들다. 상담주간에 부모님께 물어보면 집에서는 알뜰살뜰하게 한다는데 학교에만 오면 왜 그럴까?

이어지는 미술 시간, 무궁화 모빌을 만드는데 필요한 색종이는 4장이다. 색종이 한 묶음을 나눠주며, 쓸 만큼 쓰고 남은 건 반납하라 일러줬다. 회수율은 70%, 쓰레기통에서 포장용 비닐에 싸인 색종이가 뭉터기로 발견되었다. 구겨진 종이를 펴고 있자니 혈압이 상승한다. 어쩌겠는가. 평소에 제대로 다잡지 못한 담임 책임인 걸. 말은 충분히 했으니, 이번에는 책이다.

"얘들아, <물고기를 지킨 갈매기 할아버지> 읽자!"

할아버지는 갈매기와 동업자다
 할아버지는 갈매기와 동업자다
ⓒ 내인생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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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다 낡아 빠진 배로 필요한 만큼만 물고기를 잡고 산다. 할아버지는 날마다 갈매기들에게 먹이를 주는데, 하늘 높이 먹이를 '숑' 던지면 갈매기가 '슉' 날아와 냉큼 낚아챈다. 그런데 이 할아버지는 동료들의 웃음거리다.

"저럴 시간에 배 수리나 좀 하지!"

맥 아저씨가 빈정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깔깔댄다. 그들은 최신식 탐지기를 앞세워 닥치는 대로 물고기를 마구마구 잡아 올린다. 촘촘한 그물코로 치어들까지 깡그리 잡아서일까? 바닷속 물고기가 몽땅 사라져 버린다. 마을의 고기잡이배들은 하릴없이 항구에 매여 있다.

"탐지기로 잡으면 물고기가 모두 없어져요?"

보희가 눈을 왕방울만 하게 뜨고서 물었다. 이야기니까 그렇잖아, 아니야 없어질 수 있어 하며 옆에 앉은 성욱이랑 승표가 옥신각신. 어찌 됐건 할아버지가 사는 마을 사람들은 심심해서 죽을 지경이다. 선장 아저씨는 텅 빈 바다를 쓸쓸하게 바라보고, 어시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들은 뜨개질로 시간을 때운다. 이런 시기에 붐비는 곳이라곤 오직 프레드 아저씨네 카페뿐이다.

"저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지?"
"물고기를 싹쓸이해서 그런 거니까 벌 받은 거야."

수민이가 어촌 사람들 생계를 걱정하자 다한이가 쌤통이라는 표정을 지으며 심술궂게 대꾸했다. 일리가 있는 언사라 은비와 가현이도 턱을 까딱거리며 동의한다는 몸짓을 보냈다.

"바다 물고기에 주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대로 잡으면 안 되는 걸까요?"

물고기가 사라져 무료해진 주민들
 물고기가 사라져 무료해진 주민들
ⓒ 내인생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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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딴지를 부려보았다. 좋은 의견이라고 칭찬할 줄 알았던 선생님이 반론을 펼치자 다한이는 옆머리를 긁었다. 잠시 어색한 순간이 찾아왔다. 그 잠깐이 답답했는지 상윤이가 눈알을 디굴디굴 굴렸다.

"당연히 다 잡으면 안 되죠. 바다에 물고기가 없으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못 먹잖아요."

채연이가 빈약한 담임의 논리를 단박에 깨트렸다. 그제야 뭔가 말하고 싶은데 눈치가 보여 숨죽이던 아이들이 깨어났다. 공기는 주인이 없지만 심한 매연을 내뿜으면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기 때문에 처벌받는다. 마찬가지로 바다는 주인이 없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모두가 주인이다. 그래서 식량을 독점하면 안 된다. 쫙! 여기까지 이해가 다다르자 두뇌가 상쾌해진 지환이가 손뼉을 쫙 쳤다.

할아버지 마을에서는 물고기 실종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아침마다 싱싱한 생선을 즐겨 먹던 시장님은 삶은 달걀을 먹다 말고 큰 결심을 한다. 첨단 기기를 소유한 물고기 전문가들이 마을에 초청된다. 그들은 사무실에 틀어박혀 플라스크에 알 수 없는 액체를 부글부글 끓이고, 지도에 난해한 기호를 그린다. 하지만 결국 물고기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지 못한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바다에 나가려 하지 않는다. 오직 할아버지만이 바다로 향한다. 무심히 키를 잡은 할아버지 앞에 늙은 갈매기 한 마리가 다가와 끼룩끼룩 운다. 일평생 갈매기 소리를 듣고 살아온 탓일까? 할아버지 귀에는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저를 따라오세요!"로 들린다.

물고기 떼 위치를 알려주는 갈매기
 물고기 떼 위치를 알려주는 갈매기
ⓒ 내인생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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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는 할아버지를 안내하듯 수면 위를 낮게 날며 앞서 간다. 확신에 찬 할아버지는 갈매기 꽁지를 따라 힘껏 배를 몬다.

"설마, 물고기 떼 나오는 거 아니야?"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저 멀리 갈매기 무리가 보이더니 바다에 엄청난 물고기 떼가 헤엄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물을 던지자 눈 깜짝할 사이에 그물이 묵직해졌다. 그러나 늘 그랬듯 할아버지는 꼭 필요한 만큼의 물고기만 끌어올리고 어린 물고기는 도로 바다에 풀어주었다.

"역시 사람은 동물에게 먹이를 줘야 해!"

산하가 반백년 산 사람처럼 말했다. 선생님은 흉어기에 만선을 포기하고 안분자족하는 할아버지를 칭송하려 했건만, 산하는 할아버지가 갈매기에게 먹이를 제공했으니 당연히 보답을 받는 거라고 또박또박 답변했다. 뜻밖의 결론에 좌중이 술렁였다.

"그럼 기계로 물고기를 쓸어가는 어부도 갈매기에게 먹이만 주면 괜찮은 사람인가요? "
"어부도 돈을 벌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분위기가 묘해졌다. 그림책의 결론이 기브 앤 테이크가 최고니 전략적으로 먼저 베풀라가 될 판이었다. 이대로 말려들 수 없었다. 순수한 선의로 행동한 할아버지를 '어부 스타일 처세술 대가'로 내버려두기 싫었다.

"물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서, 어장이 사라지면 갈매기도 떠날 거예요. 그럼 남은 사람들은? 그 자식들은 어떻게 될까요?"

생활이 단순한 갈매기는 훌쩍 떠나면 그만이지만 사람은 옮기는 게 쉽지 않다. 물론 산하가 주목했듯 갈매기에게 호의를 베풀었으니 돌려받았다는 견지도 옳다. 세상에 공짜 없다. 적당한 선에서 베풀고 무리하지 않을 만큼 편익을 취하는 게 보편적 인간의 삶이다.

문제는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 적정 수준을 넘는 어리석음을 자주 범한다는 점이다. 실제 어른이 사는 사회에서 탐욕자가 망쳐놓은 자연과 사회 제도를 약하고 선량한 다수가 감당해야 하는 사례가 얼마나 많은가?

정의로운 행위가 실익을 보장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되는 세상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 오히려 일찍이 세태를 파악하고 자기 살 길을 도모하는 산하가 현명하지 않은가? 내면이 뒤죽박죽 뒤엉켰지만, 표 내지 않고 행복한 일상으로 복귀한 마을을 보여줬다. 이제 어부들은 물고기를 필요한 만큼만 잡아야 한다는 할아버지 철학에 따라 적당히 고기를 끌어올린다.

할아버지 덕에 활기를 되찾은 마을
 할아버지 덕에 활기를 되찾은 마을
ⓒ 내인생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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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 양치질 물 안 잠갔다고 혼난 사람 손 들어봐요."

상추만 한 손바닥이 쭈뼛쭈뼛 힘없이 올라온다. 학교 물이 공짜라고, 색종이를 그냥 제공해준다는 이유로 막 쓰면 할아버지네 마을처럼 언젠가 자원이 똑 떨어질 거라고 부드럽게 타일렀다.

"갈매기 할아버지처럼 필요한 만큼만 쓰기로 해요."
"필요한 게 많으면 많이 써도 되겠네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누군가 스쳐가듯 말했다. 필요한 만큼은 얼마만큼을 뜻하는 걸까? 누군가는 개인의 욕망을 최대치로 키워 어마어마한 양을 요구할 수 있다. 그것도 필요한 만큼으로 인정해야 하는 걸까?

아이들에게 검소하라 가르치는 교사도 욕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30평형 아파트로 이사 가고 싶고, 둘째 태어났으니 카시트 두 대 넉넉히 들어가는 차로 바꾸고 싶고, 가끔 로또 당첨을 꿈꾸는 나는 필요한 만큼만 챙기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그럼에도 선생님 역할을 위해 위선적으로 거짓말을 한다.

갈매기 할아버지는 평생 어떻게 소신을 지켰을까? 책을 덮고 나니 할아버지와 같이 배 타고 나가서 그물질하며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물고기를 지킨 갈매기 할아버지 - 1960년 케이트 그린어웨이 수상작

엘리자베스 로즈 글, 제럴드 로즈 그림, 강도은 옮김, 내인생의책(2013)


태그:#물고기를지킨갈매기할아버지, #내인생의책, #그림책, #케이트그린어웨이,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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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교사입니다. <선생님의 보글보글> (2021 청소년 교양도서)을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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