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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선감학원 피해자 김철화(67세, 가명)씨.
 선감학원 피해자 김철화(67세, 가명)씨.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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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가 가장 중요해요. 사람은 애어른 할 것 없이 모두 재미를 따라가게 돼 있어요."

족집게 과외 선생으로 성공한 비결을 묻자 그는 "그게, 성공인가요?"라며 고개를 갸웃하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곧바로 "그럼, 유머 감각을 길러야 하겠네요?"라고 묻자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이해하기 쉽게 가르칠만한 실력이 뒷받침돼야 해요"라고 답했다.

김철화(67세, 가명), 그는 한때 족집게 과외 선생으로 이름을 날린 이다. 배움이 짧아, 선감학원 출신들이 대부분 육체노동을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대단히 특별한 경우다. 놀랍게도 그의 가방끈(학력) 역시 초등학교 3학년 중퇴다. 그 남다른 이력에 이끌려 지난 22일 오전 서울 종각역 인근에서 그를 만났다.

그의 성공 비결은 꽤 흥미로웠다.

"이해하기 쉬워야 수업이 재미있어요. 그런 가운데 약간의 유머를 섞는 거죠. 아이가 어딘가에 걸려 넘어지려 할 때 '넘어질라. 조심해 아닌, 야 조심해서 넘어져!' 하는 식이죠. 그러면 대번에 교실에 웃음이 돕니다. 웃으면, 선생한테 정감이 붙게 돼요. 그리고 칭찬도 아주 중요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늘 칭찬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잘 한다고 칭찬을 하면 긴가민가하면서도 마음이 공중에 붕 뜹니다. 학습에 의욕이 붙는 거죠. 그러다 보면 잘하게 돼 있어요."

아이들한테 인간적인 신뢰를 얻는 것도 중요한 성공 비결이었다.

"다른 사람을 낮춰서 내가 높아지려 하지 말아야 해요. 다른 학원이나 학교에서 잘못 배워 온 게 있어도 '그 선생님이 틀렸어!'라고 무시(비난)하면 안 됩니다. '다른 반 학생들은 이런 거 잘하지 못해!'라는 식으로 깎아내려도 안 되고요. 그러면 인간적인 신뢰가 떨어져요. 교육적으로도 안 좋고요. 애들은 그것도(무시, 비난) 따라 하거든요."

가장 중요한 성공 비결은 스쳐 지나가는 듯한 말에 들어 있었다.

"저는 애들이 참 예뻤어요. 교실에 쓰레기를 어질러 놓고 가면 그 쓰레기까지도 예뻤어요."

성공 비결이 실타래에서 실 풀리듯 술술 풀리는 것을 보니 왕년에 잘 나가던 과외 선생인 것이 분명했다.

가난해서, 어린 나이에 구두통 메고 있던 게 죄라며 죄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생 사진
 경기 창작센터에 전시된 선감학원생 사진
ⓒ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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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년 11월 24일자 인천신문에 난 선감학원 관련기사. 인천 3개 경찰서가 부랑아 일제단속을 해서 33명을 선감학원에 수용 했다는 내용.
 1962년 11월 24일자 인천신문에 난 선감학원 관련기사. 인천 3개 경찰서가 부랑아 일제단속을 해서 33명을 선감학원에 수용 했다는 내용.
ⓒ 정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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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3학년이 학력 전부인 그가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족집게 과외 선생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일까? 그의 일대기를 들어야 풀릴 수 있는 궁금증이었다.

그는 1963년경에 박정희 쿠데타 정권이 실시한 부랑아 일제 단속(일명 후리가리)에 걸려 납치되다시피 외딴 섬 선감도에 있는 선감학원에 끌려갔다. 그의 나이 13살 즈음, 그를 끌고 간 것은 경찰이었다. 부모 형제가 있고 집도 있었으니 그는 결코 부랑아가 아니었다. 죄를 짓지도 않았다. 끼니를 잇기 힘들 정도로 가난해 평택역에서 그 어린 나이에 구두통을 메고 있던 게 죄라며 죄였다.

끌려갈 때, '제발 집에 보내 주세요!'라는 말은 통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건 '입 닥쳐!'라는 고함과 발길질뿐이었다. 시커먼 구둣발에 한 번씩 채일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아픔에 몸이 웅크려 들었다. 나중엔 발길질 시늉만 봐도 몸이 저절로 웅크려 들었다.

가자마자 머리를 박박 밀렸다. 몸에 하얀 가루를 뒤집어쓰기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몸에 해롭다는 DDT라는 살충제였다. 선감학원, 이름에 학원이라는 글자가 있으니 혹시 공부를 시키거나 학교를 보내 주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는 며칠만에 무너졌다.

선감학원, 그곳에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은 천자문을 3살 때 줄줄 읽을 정도로 영특한 소년 김철화가 원하는 배움은 없었다. 감당하기 힘든 노동과 견디기 힘든 폭력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정말 참기 힘든 것은 이유 없이 맞는다는 것이었다.

"열여덟, 열아홉 살 정도 된 원생인 사장(막사의 장), 반장이 주로 때렸는데, 바다를 쳐다보고 있으면 한눈판다고 때리고, 무언가 기분이 안 좋으면 행동이 굼뜨다고 때렸어요. 뾰두라지 난 엉덩이를 심하게 맞은 적도 있는데, 너무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질렀더니, 엄살떤다고 정말 죽지 않을 만큼 때렸어요. 그 분함이, 그 고통이 지금도 잊히질 않아요."

바다를 두 번이나 헤엄쳐 건너 얻은 자유

 1964년 10월 1일자 경향신문 선감학원 관련기사. 선감학원생들이 자유를 찾아 집단탈출을 감행했다는 내용. '연고자가 있는데도 잡아서 보내기도'라는 부제가 눈에띈다.
 1964년 10월 1일자 경향신문 선감학원 관련기사. 선감학원생들이 자유를 찾아 집단탈출을 감행했다는 내용. '연고자가 있는데도 잡아서 보내기도'라는 부제가 눈에띈다.
ⓒ 정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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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은 운명이었다. 돌아가야 할 집과 만나야 할 부모 형제가 있었으니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잡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첫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갯벌에 발도 들이지 못하고 열여덟, 열아홉 살 정도 된 원생인 경비에게 붙잡혔다. 환한 대낮에 아무런 준비 없이 저질렀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1년 뒤에 또 도망쳤는데 그때도 갯벌 입구에서 잡혔어요. 잡히면 엄청 맞아요. 다구리(몰매)가 제일 힘든데, 저는 그걸 두 번이나 당했어요. 다구리는, 원생들이 죽 늘어서서 주먹질하는 복도를 통과하는 거예요. 보통 아이들은 살짝 때리거나 때리는 시늉만 하는데 반장이나 사장은 달라요. 발로 뻥뻥 차는데, 그러면 저처럼 덩치가 작은 아이는 나가떨어지죠. '더 맞으면 죽고 말지!' 할 정도가 돼서야 멈춥니다."

세 번째 탈출에 그는 성공했다. 잡혀 들어간 지 2년 만이었다. 바다를 두 번이나 헤엄쳐 건너서 얻은 자유였다.

"한 친구가 도망치다 잡혀서 다구리를 당한 날이었어요. 이불 쓰고 울고 있기에 농담처럼 '이번에는 나랑 도망갈래?' 했는데, 대번에 '그러자'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 함께 도망쳤어요. 경비 눈을 피하려고 아카시아 가시에 찔리면서 하수구를 통과해 갯벌까지 나온 다음 대부도까지 헤엄을 쳤어요. 가까워 보였는데 헤엄을 쳐 보니 굉장히 멀었어요. 물살은 또 얼마나 센지! 힘이 다해서 숨이 꼴깍 넘어가기 직전에 대부도에 닿았어요. 닿고 보니, 헤엄치면서 옷이 다 떠내려가 둘 다 발가벗은 상태였어요."

소년들은 어느 집엔가 널려 있는 빨래를 걷어 몸을 가렸다. 배고픔은 밭에 심어진 무나 토마토 등으로 해결했다. 그리고는 몸을 숨겼다. 마을 사람 눈에 띄면 또 선감학원에 잡혀 들어갈 위험이 있어서다. 도망친 아이를 신고하는 주민에게는 밀가루나 쌀이 건네졌다.

소년들은 마을 사람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숨겼다가 어둠이 깔리면 나와서 걷기를 일주일간 되풀이했다. 대부도에서 이런 식으로 일주일을 보낸 것이다. 그런 다음에 다시 목숨을 걸고 헤엄을 쳐 선재도에 닿았고, 선재도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건너왔다.

소년 김철화는 가족을 만날 희망을 안고 평택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가족은 모두 이사를 가버리고 없었다. 정말로 부랑아가 된 것이다.

돗자리 파는 데서도 학력 따져, 홧김에 공부 시작

 1963년 7월12일자 경향신문 선감학원 관련기사. 일제단속에 잡혀 고아원을 전전하던 아들을 8개월 만에 부모가 찾았다는 내용. '과잉단속이 빚은 빗나간 아동복지'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1963년 7월12일자 경향신문 선감학원 관련기사. 일제단속에 잡혀 고아원을 전전하던 아들을 8개월 만에 부모가 찾았다는 내용. '과잉단속이 빚은 빗나간 아동복지'라는 부제가 눈에 띈다.
ⓒ 정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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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랑아가 된 소년 김철화를 기다리는 운명은 '열차 간 꼬마'였다.

"그 사람들은 '꼬마 잡았다'고 하니, 저로서는 꼬마 잡힌 거죠. 열차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그 사람들한테 잡혀서 그때부터 열차에서 장사했어요. 버는 돈은 모두 왕초한테 바치고 저는 밥만 얻어먹는 그런 생활입니다. 거기도 선감학원만큼이나 험했어요. 깡통을 바닥에 놓고는 번쩍 들어서 메다꽂는데, 정말 엄청 아파요. 발등을 돌로 찍히기도 했는데, 거의 한 달은 기어다녔던 것 같아요. 발등에 금이 갔거나 부러졌거나 그랬겠죠."

대전역 보일러실 기억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악몽이다.

"대전역에 보일러실이 있었는데, 거기서 아무 이유 없이 3시간 정도를 죽도록 맞았어요. 이러다간 죽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돌멩이를 집어서 왕초 뒤통수를 찍어 버렸어요. 그런데 그게 설맞았던지 쓰러지지를 않아서 흠씬 더 두드려 맞았어요. 맞은 다음 한 번 더 찍었는데, 그 후부터는 안 맞았어요. 독종이라는 소문이 난 덕분이죠."

소년은 스무 살이 다 돼서야 꼬마 생활을 마치고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 룰(규칙)이 그래요. 스무 살 정도 되면 자유롭게 장사를 할 권한을 줍니다. 근데, 그것도 단속이 심해서 힘들어요. 공안(철도 경비원)에 걸리면 벌금을 내거나 구류를 3일 살아야 해요. 저는 몸으로 때웠죠. 집을 찾아 그 생활을 그만둘 때까지 20번 이상은 갇혔던 것 같아요."

자유를 얻게 된 소년 김철화는 사촌이 일산역 부근에 살았던 기억을 떠올렸고, 그 기억을 더듬어 결국 사촌을 찾아, 사촌 형 도움으로 9년여 만에 부모 형제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였다.

"가족들이 너무 가난하게 살고 있었어요. 제 수중에 8000원이 있었는데 금세 생활비로 없어졌어요. 당시 쌀 한 말이 400원이었으니 적은 돈이 아니죠. 제가 돈을 벌어야 했어요. 그래서 취직을 하려 했는데 초3 학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거예요. 돗자리를 파는 곳에서도 학력을 따져서 얼떨결에 00고등학교 나왔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랬는데 그 정도 나와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정말 울화가 치밀더라고요. 돗자리 파는데 도대체 왜 고학력이 필요할까요? 그래서 공부를 시작한 거죠. 중학교 책 사서 혼자 공부했는데, 검정고시를 보려 했던 것인데 일이 좀 이상하게 흘렀어요." 

⇒ 다음 기사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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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선감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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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공동체부, 경기도 담당. 교육에세이 <날아라 꿈의학교> 저자.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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