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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의 시간>은 9장으로 구성된 일종의 민주주의 개론 강의서다. 민주주의의 어원과 간략한 역사, 그리고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건 무엇인지 등을 논의한다. 민주주의의 아버지라고 칭송받는 루소나 미국 헌법의 초안을 쓴 제임스 메디슨이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은 꽤 흥미롭다.

민주주의의 시간
 민주주의의 시간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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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 책의 저자 박상훈씨는 '정당정치론자'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무엇보다 정치체제를 일컫는 용어이며, 그 핵심 원리는 대의제이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이다. 사실 이 주장은 책을 관통하는 가장 큰 주제이기도 하다.

그는 요즘 한창 뜨거운 직접민주주의나 시민단체 같은 '사회적' 영역에서 제기되는 제도정치 비판을 경계한다. 시민이나 사회단체는 의회 민주주의(대의제)를 잘 이끌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이 내용은 특히 '8장 민주주의 논쟁 : 나는 왜 다른 민주주의론을 비판하는가'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관심이 가는 분이라면 이 부분만 읽어봐도 될 것이다).

"시민이 직접 참여해 직접 일을 해야 하고 그래야 세상이 좋아진다는 주장은 현실이 될 수 없으며, 무엇보다도 시민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중략) 좋은 자동차가 필요하다고 해서 직접 자동차 만드는 법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 회사들로 하여금 그 일을 대신할 방법을 찾듯이, 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기대와 바람을 실현할 방법을 찾고자 하는 것이 오늘날 시민이 선택한 대의 민주주의다."

얼핏 "시민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부분에서 의문을 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시민을 정치에서 떼어놓으려는 엘리트주의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견은 차분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시민'을 추상적이고 숭고한 이미지가 아니라, 몸과 성향을 가진 개별적 존재로 인식해보자. 저마다 취미가 다를 것이고 교육 수준이나 판단 능력도 다를 것이다. 수학을 포기한 사람이 있는 반면 복잡한 함수까지 거뜬히 풀어내는 사람도 있다.복잡한 경제 문제가 무엇보다 우선시 되는 현대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적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저자가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가 실현 불가능하다고 비판하는 지점도 이 맥락이다. 고대 아테네는 도시국가였고 처리해야 할 문제가 지금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더욱이 아테네는 여자와 노예를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회적 재생산을 전적으로 담당했기에 아테네가 도시국가로 기능할 수 있었다. 저자는 '직접 민주주의'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지적한다.

반대로 대의민주주의에서는 판단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도 자신을 올바로 대리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힘없고 가난한 보통 사람들의, 그리고 사회적 사각지대에 있는 약자들의 권리가 정치를 통해 보장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치적 영역에서도 평등의 원리가 실현된다. 이 부분은 노조를 생각해 보면 잘 이해될 수 있다. 사측과 논쟁이 일어났을 때 노조가 잘 조직된 회사와 그렇지 못한 회사에서 어떤 차이가 발생하는지 떠올려 보라.

자신을 대리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복잡한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줄 사람이 있다는 것, 이를 통해 자신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박상훈씨가 대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주의에서는 무엇보다 정당이 중요하다. 정당이 잘 조직되어야 산적해 있는 사회 문제들이 이슈화 될 수 있고 정치인들이 시민들을 더욱 잘 대표할 수 있다.

"사회운동은 특정의 단일 이슈에서 강하고, 이익집단은 소속 구성원들만의 배타적 이익을 추구해도 상관없지만, 정당은 다르다. 정당은 노동정책에서 교육, 국방, 경제, 외교, 문화, 농민, 자영업, 청년, 여성, 장애인 정책 등 공동체와 관련된 전 분야를 다뤄야만 지지도 늘리고 집권도 할 수 있는 특별한 결사체이다."

이것이 논리적으로는 수긍이 가는 <민주주의의 시간>의 주장이지만, 책을 읽는 내내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소모적인 갈등을 부추기는 한국의 현실정치가 자꾸 생각났기 때문이다. 불과 며칠 전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 부부싸움 때문이라는 정진석 의원이 발언이 파장을 일으켰다. 또 세월호 참사 때 어린 학생들의 죽음에 대해 막말을 쏟은 것도 정치인이었다. 참사 후에 있었던 지방선거에서 당시 새누리당은 정당 차원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호했다.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22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부부싸움 때문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정진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지난 22일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부부싸움 때문이라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 정진석 의원 페이스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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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이런데도 정당이 중요하다며 정치개혁을 비판하는(9장 민주주의와 정당) 저자의 주장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려웠다. 물론 저자도 진보와 보수가 서로를 파트너가 아니라 악마로 규정하는 현실의 정치상황을 비판한다.

정당이 잘 조직되어서 "누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가를 두고 진보와 보수가 좋은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좋은 정당을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의 시간>에는 그 부분에 대한 해답이나 설명이 없다.

민주주의에는 정당이 필요하고, 정치인은 좋은 정당을 만들기 위해 고심해야 한다. 이 주장이 반복되기만 한다. 그럴듯한 말만 하는 건 누구든지 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이에 대한 대답이 빠져있으니 그의 주장 또한 그가 비판하는 직접민주주의처럼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직접 차떼기 사건을 일으킨 정당이 반성도 개혁도 없이 좋은 정당이 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대리라는 '구조'가 수반하는 도덕적 해이 문제에 대한 부분은 왜 언급이 없는 것일까? 예산계수조정위원회가 매번 비공개로 진행되는 현실에서 그에 대한 실질적 참여를 보장하기 위해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게 정말 나쁜 건가? 시민들은 '깜깜이'로 처리되는 부분이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부분 때문에 보조적인 수단으로 직접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것 아닌가? 이런 의문들이 계속 이어졌고 갈수록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저자가 다음에는 좋은 정당을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한 책도 썼으면 좋겠다.


민주주의의 시간 -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박상훈 지음, 후마니타스(2017)


태그:#민주주의, #박상훈, #촛불, #정진석, #직접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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