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첫 번째 영화 <러브레터>는 인물의 동질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예를 들면, 작중의 두 남녀 '이츠키'가 동명이인인 것과 '히로코'와 '후지이 이츠키'가 같은 얼굴을 한 것을 들 수 있다. 실제로 히코로와 여자 이츠키는 같은 배우 '나카야마 미호'가 연기했다.

영화가 시작하면 한 여성이 설산 위에 누워 있는 것이 보인다. 그 여성은 이내 밑으로 내려와 누군가의 장례식에 참여하는데, 묘비 앞에 모인 고인의 지인들과의 대화를 통해 장례식의 주인공이 여성의 죽은 남자친구 '이츠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녀는 이츠키의 집에 돌아가 오래전의 기억이 담긴 이츠키의 옛 방을 천천히 살펴보게 되는데, 우연하게 이츠키의 중학교 졸업앨범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곤 그곳에서 '이츠키'라는 이름의 주소를 보게 되고, 죽어버린 애인의 집 주소라고 생각하며 편지를 보내게 된다.

 영화 <러브레터> 스틸 사진

영화 <러브레터> 스틸 사진 ⓒ 이와이슌지


이어지는 점프 컷은 어떤 도시를 비춘 후 여성과 똑같이 생긴 한 여성을 보여준다.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여성을 통해 수신인과 발신인의 이름이 드러나는데, 발신인 '와타나베 히로코' 그리고 수신인 '후지이 이츠키'다. 두 사람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가 가진 '이츠키'의 기억을 공유하게 된다.

작품은 세 인물 간의 동질성을 환유적 관계로 풀이한다. 그리고 그것을 삶과 죽음의 모티프로 설명한다. '히로코'가 '이츠키'의 장례식장 근처 설산에 누워있던 것으로 시작하던 작품의 도입부는, 결말부에서 '이츠키'가 죽은 설산 위에 올라서서 '잘 지내시나요"를 외치는 것으로 대칭을 이룬다. 감기에 걸린 '이츠키'가 낯선 사람 '히로코'의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하던 도입부는, 병원에 실려갔다가 다시 집으로 귀환하는 결말부와 대칭을 이룬다.

위에서 동질성이라고 언급했지만, 애초에 삶과 죽음이라는 두 단어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환유와 동질성이라는 단어가 어느 정도 비슷한 속성을 공유하긴 하지만, 삶과 죽음은 교차하기만 할 뿐 동시에 진행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품에 드러난 신화적인 속성을 생각해본다면 삶과 죽음이야말로 하나로 합쳐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러브레터> 속 신화화 요소

신화화의 요소 첫 번째로, 온 주변이 눈으로 뒤덮인 도시의 전경이 대표적이다. 이 눈이 가진 속성이 작품 속 주인공들을 신화화하는 것에 일조한다. 도입부에서 '히로코'가 내려다본 도시의 풍경은 발을 내디딘 산부터 저 아래까지 모두 하얗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츠키'의 장례식에서는 인물들의 복장이 검은색으로, 하얀 설원의 모습과 대비된다.

고베와 오타루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본토의 최남단에서 최북단을 대각선으로 이어놓은 것만큼 거리가 멀다. 그러나 편지가 도착한 오타루의 전경은 얼핏 보면 전 쇼트의 '히로코'가 사는 고베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눈이 내린 풍경은 외모가 같은 두 여자처럼 엇비슷해 보인다. 덕분에 두 여자가 사는 곳이 무척 거리가 있음에도 화면과 화면 간의 전환이 자연스럽다.

두 여자를 잇는 게 '이츠키'라는 남자임을 생각하면 이 눈이 이츠키를 상징함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눈이 가진 순결함이 사랑을 돋보이게 한다. 또한 두 여자에게 '이츠키'라는 남자뿐만 아니라 눈이라는 속성을 부여한다. 이츠키라는 사람이 얼마나 맑고 깨끗했는지를, 그를 둘러싼 두 여자의 마음도 그러했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관객들은 초반부에 편지를 주고받는 두 여자의 모습을 보며 이것을 깨닫게 된다. '눈'이 내린 도시의 풍경을 공유하는 두 인물, '히로코'와 '이츠키'는 '우연히' 편지를 주고받게 되고 또한 서로의 인연이 '이츠키'라는 인물로 엮여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두 이츠키는 눈처럼 순수했던 시절을 되짚어가며 '이츠키'라는 인물의 과거를 되짚게 된다.

또한 남자 이츠키는 눈이 내린 산에서 죽었고, 여자 이츠키는 감기 탓에 죽을 위기에 처해 폭설 속에서 병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히로코는 이츠키가 죽은 산 위에 올라 그에게 안부를 묻는다. 결국 눈을 따라 진행되는 영화의 이야기는 인물들의 삶과 죽음의 모티프와 연관되며, 이것은 이츠키라는 사람을 기억하는 사랑의 죽음과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화화의 요소 두 번째로, 같은 얼굴을 한 두 여자는 사실상 같은 인물로 보인다. 정리하자면 모습과 이름을 공유하는 것인데, 이것은 보이는 것과 불리는 것의 차이가 있다.

얼굴이 같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자면, 작품은 이 부분을 신화적으로 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플갱어가 마주치게 되면 둘 중 하나는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속설이 있듯이 작중에서 '히로코'와 '이츠키'는 얼굴을 마주친 적 없다. 편지의 수신인이 궁금해진 히로코가 오타루의 집 주소까지 직접 찾아가기도 하지만, 동행한 친구 '시게루'에 의해 얼굴을 보지 못하고 돌아간다.

이름이 같다는 것에 대해 언급하자면, 작중에서 사진과 같은 비대면적인 형태로도 공유되지 못하는 얼굴과는 다르게 두 남녀의 이름만큼은 뚜렷하게 공유된다. (히로코도 믿을 수가 없었는지 이츠키에게 주민등록증을 팩스로 보내달라고 까지 한다.) 동시에, 영화는 그 이름을 공유하는 두 여자와 남녀의 추억을 겹쳐 떠올린다. 남자 이츠키는 예전에 자신이 짝사랑했던 여자 이츠키를 잊지 못하고 그녀와 닮은 히로코와 사귀게 되었고, 이것이 세 사람을 신화라는 하나의 틀로 엮는다.

이처럼 신화화는 세 인물을 하나로 엮음으로써 익숙한 것과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엮는다. 이 과정에서 환유를 통해 동질성이 생겨난다. 한 남자의 중학교 시절과 현재 시절의 사랑을 공유하는 것이, 두 여인을 하나의 인물이 가진 시간의 양면을 뜻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작품에서 드러나는 우연의 범주를 넘어서 인물들을 특별한 무언가로 만든다.

중학교 시절을 간직한 여자 이츠키는 이츠키의 과거 완료된 사랑 혹은 과거 그 자체이며, 현재 시절을 간직한 히로코는 이츠키의 현재 완료된 사랑 혹은 현재 그 자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과거에 살아있던 이츠키는 현재에 죽어있게 되고, 과거를 간직한 이츠키는 감기에 걸렸던 죽음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에 죽어있는 이츠키의 과거를 따라가는 히로코는 눈밭에서 일어나 숨을 내쉬며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것이 작품을 오르페우스처럼 살아있는 자가 죽어있는 자를 찾아가는 영웅 서사로 보이게 하고, '스틱스 강과 대응되는 폭설' 속을 지나며 죽음에서 삶으로 향하는 이야기로 만든다. 즉, 개인으로서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것이지만 두 얼굴의 하나의 여자이기 때문에 삶과 죽음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순환의 구도인 것이다.

감기에 걸린 주인공이 상징하는 바

 영화 <러브레터> 스틸 사진

영화 <러브레터> 스틸 사진 ⓒ 이와이슌지


사랑이 시간과 연관되는 건 이것뿐만이 아니다. 작품의 도입부에서 감기에 걸린 채로 나와 우편물 배달을 온 집배원을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밀어내는 여자 '이츠키'는, 후반부에서 병원에 가지 않고 미루어 두던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해 죽음에 위기에 처한다. 작품 내내 가족들이 내내 이츠키에게 병원에 가라며 권유했음에도 가지 않은 대가다. 중요한 건, 시름시름 앓는 이츠키를 대하는 가족들의 태도다.

이츠키의 가족들은 이츠키가 감기에 걸린 것을 민감하게 생각했는데, 그녀의 아버지가 감기가 폐렴으로 발전해 사망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그 죽음을 가슴에 안고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딸인 이츠키 또한 아버지처럼 폭설이 오는 날 밤, 열이 팔팔 끓어 생사를 오가게 된다.

구급차를 불러보지만 폭설에 한 시간이 넘게 걸린다는 말만 듣는다. 이츠키의 할아버지는 이츠키를 등에 업고 병원으로 가려 하지만, 이츠키의 어머니가 반대한다. 예전에 폭설이 내리던 그날도 이츠키의 아버지를 등에 업고 병원에 갔지만 이미 죽어 있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이츠키의 어머니에게 선택권을 준다. 예전에는 내가 결정했으니, 이번에는 네가 결정하라고 말이다. 여기서 한 가지 모티프를 읽어낼 수 있다. 가만히 앉아 죽음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뛰어갈 것인지 라는 물음이다.

죽어버린 아버지와는 달리 이츠키는 살았다. 전처럼 폭설을 넘어 병원에 갔지만 결과가 달랐다. 전과는 달리 걷지 않고 뛰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츠키의 어머니가 하는 말이 더해져 이 시퀀스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한다.

위에서 말했듯, 보이는 것은 불리는 것보다 의도성이 적다. 그저 고개를 돌리기만 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누군가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고개를 돌리는 것에도 약간의 의도성이 있지만, 이름을 부른다는 행위에 비해선 아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전달하기 위해, 어떠한 의도를 지니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행위다. 또한 이름이라는 것이 한 객체를 지칭하는 단어이자 방법이기도 하다. 그저 관찰하는 것과는 다르게 객체를 명확하게 지칭하고 언급하는 행위이다. 정리하자면 두 행위는 당사자로서는 '당하는' 것이지만,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다.

때문에 작중에서 이름만으로 소통하는 두 여인은 지극히 의도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생각해보면 학창시절 짝사랑하던 이츠키와 닮은 히로코에게 반한 남자 이츠키의 행동은 의도성이 약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운명이나 인연과 같은 비의도적 행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비의도적 행동이 두 여자를 의도치 않게 잇게 되고, 두 여자는 서로에게 이츠키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아 행동한다. 세 사람의 관계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이것은 다시 '여자 이츠키'의 가족의 대화와 이어진다. 어머니가 할아버지에게 "딸도 죽일 셈이냐"며 행동을 저지하지만, 할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정확히 38분 걸렸다"며 어차피 어떻게 해서든 늦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번에도 구급차가 오기까지 1시간이나 걸리는데, 걸어가도 1시간 이하로 걸리는 시간을 뛰어가면 더 짧게 걸릴 것이라 설득한다.

"들은 대로 하셨어야죠"라는 어머니의 말과, 할아버지의 "걷지 않아. 뛸 거야"라는 말은 수동적인 것과 적극적인 것의 차이를 지닌다. 위의 세 사람의 관계에서 '의도'가 개입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작품 내내 짤막하게 언급되는 두 이츠키의 과거에서 모호한 두 사람의 태도를 향한 정답이기도 하다. 이른바 '의도'와 '의지'는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가가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살려고 하는 의지 말이다.

"걷지 않아. 뛸 거야"라는 대사는 걸었기 때문에 죽어버린 아버지의 경우와는 달리 이번에는 뛰어서 손녀를 살리겠다는 할아버지의 마음가짐이기도 하며, 세월이 흐르고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닫게 된 이츠키가 죽어버린 이츠키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겠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로의 마음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가 나오지 않는 중학교 시절의 회상 장면은 관객들을 헷갈리게 한다. 그렇게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 되어서야 도서관 책에 꽂힌 네임 카드를 통해서 이츠키에 대한 이츠키의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과정에서 관객들은 "만약 이츠키가 중학교 시절에 여자 이츠키에게 제대로 고백을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라는 궁금증을 안게 된다.

뒤늦게 깨달은 사랑

 영화 <러브레터> 스틸 사진

영화 <러브레터> 스틸 사진 ⓒ 이와이슌지




정리하자면, '여자 이츠키'의 아버지처럼 그녀의 마음속에서 남자 이츠키는 죽어버렸다. 소극적으로 대응하다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홀연히 떠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츠키에게 아버지와 같은 죽음이 찾아오게 되고, 과거의 사건 탓에 잔뜩 트라우마가 있었던 가족들은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죽음이 갑작스럽게 사람을 덮쳐오는 것처럼 마음 속에서 잊혀 있던(죽어있던) 남자 이츠키도 여자 이츠키의 마음 속에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이젠 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

이를 뒷받침 하는 증거가 두 가지가 더 있다. 하나는 작품의 초중반에 감기 기운에 병원을 간 이츠키가 잠결에 아버지의 죽음이 복도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츠키의 아버지가 장례식을 치르던 날에 '남자 이츠키'도 이츠키의 집에 들러 빌린 책을 대신 반납해달라고 부탁하는데 그것이 이츠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관객이 던지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이미 작품에서 나와 있었고, 관객들은 그것을 뒤늦게 인지하게 된다. 이츠키가 뒤늦게 깨달은 사랑처럼 말이다. 그러나 돌아가신 아버지가 되살아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을 깨달았다고 해서 이츠키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러한 부분에서 우리는 사랑과 삶, 그리고 죽음이 유한성이라는 하나의 단어로 연결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객들이 작품의 메인 주인공인 '이츠키'의 마음을 인지하고 나면, 이제 환유로 연결되는 '히로코'의 행동들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 고베의 설원에서 죽은 듯 누워있다가 이내 숨을 트며 삶으로 돌아오는 모습과, 오타루의 설산에서 "잘 지내시나요. 저는 잘 지내요"를 외치는 히로코의 모습을 말이다.

사랑과 삶은 분명 영원하지 못하고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그 정념만큼은 확실하게 남는다. 작품은 오타루와 고베라는 공간과, 삶과 죽음의 모티브를 통해 시공간을 넘어선 사랑의 감정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선호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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