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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둘레길 삼성산성지에서 서울대 쪽으로 가다보면 돌산 전망대가 나온다. 돌산전망대에서 본 옛 자하동마을 터. 사진 좌측 하단 대운동장이 옛 자하동 마을 있던 자리이다.
▲ 옛 자하동 마을이 있던 자리 서울둘레길 삼성산성지에서 서울대 쪽으로 가다보면 돌산 전망대가 나온다. 돌산전망대에서 본 옛 자하동마을 터. 사진 좌측 하단 대운동장이 옛 자하동 마을 있던 자리이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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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아래 60여 가구의 주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자하동 마을이 사라진 것은 1970년대 초 이곳에 서울대학교 캠퍼스가 들어서면서 이다. 해체될 당시 마을은 전체 60여 가구 중 50여 가구가 의성 김 씨였을 만큼 의성 김 씨들이 대대로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언제부터 의성 김 씨들이 이곳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의 역사는 최소 300년에서 700년 이상으로 추정된다. 1967년 이곳에 관악컨트리클럽이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꿋꿋하게 버텨냈던 이 마을주민들은 1970년 2월 관악산 일대가 서울대학교 종합캠퍼스 부지로 최종 결정되면서 결국 지금의 약수사 근처와 고시촌 일대에 조성된 철거민 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만 했다.

골프장 건설공사로 인해 마을 좌측으로 흰 마사토층이 길게 드러나있다. 마을 앞, 사진 오른쪽 하단에 느티나무가 보인다.
▲ 1960년대 자하동 마을 골프장 건설공사로 인해 마을 좌측으로 흰 마사토층이 길게 드러나있다. 마을 앞, 사진 오른쪽 하단에 느티나무가 보인다.
ⓒ 2012서울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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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이 사라진지도 어언 50년, 지금 마을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랫동안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해왔던 수령 300년 이상의 느티나무는 마을이 철거된 후인 1978년 고사(枯死)했고,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지켜주던 국수봉 미륵불은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채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서울대 박물관 한 귀퉁이에서 쓸쓸히 옛 추억을 더듬고 있다. 오늘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자하동 마을을 지켜왔던 느티나무와 미륵불에 대해 이야기할까 한다.

1978년 10월 9일자 서울대학교 『대학신문』에는 캠퍼스 진입로에 있던 3백 살이 넘은 느티나무가 수명을 다해 베어졌다는 기사가 실렸다. 후에 미대 조소과 실습용으로 쓰였다는 이 나무는 지금으로부터 약 340년 전, 이곳 자하동에 이로당(二老堂)이 들어설 때 심은 세 그루의 느티나무 중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었다.

이로당은 조선 숙종 연간에 성천부사 신여석, 공조판서 신여철 형제가 노년에 이곳 자하동에 터를 잡아 세운 별장으로 크기는 서너 칸 규모이고 시기는 대략 1675년에서 1680년 사이이다. 이후 신여석의 차남 공미 신호가 이로당 옆에 만오당을 지었고 개울가에는 작은 모정(茅亭)을 지었다. 이로당은 1689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그 때 심은 세 그루의 느티나무는 무려 300여 년 동안 당산목으로서 수호신 역할을 하며 자하동 마을을 지켜왔다.

자하동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고 지금은 자하동 주민들의 이주단지 중 하나인 신림동 고시촌에서 새마을금고를 운영하고 있는 김운기 이사장의 증언에 의하면 이 느티나무들은 1973년 마을이 철거되기 전까지도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나 마을이 철거되고 나자 나무들 스스로 그 수명을 다했다고 한다. 마을이 철거된 데 대한 아쉬움과 함께 마을의 수호신으로서 느티나무에 대한 김 이사장의 경외감을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은 물론 김 이사장뿐만 아니라 자하동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는 동질감일 것이다.

1970년 제작된 영화 꼬마신랑이 자하동마을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그 영상을 구할 수 없다.
▲ 영화 꼬마신랑 포스터 1970년 제작된 영화 꼬마신랑이 자하동마을에서 촬영되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그 영상을 구할 수 없다.
ⓒ 다음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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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동 마을 느티나무는 1970년에 제작한 영화 「꼬마신랑」에 온전히 그 모습이 담겨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현재 「꼬마신랑」은 영상을 구할 수가 없다. 또 이보다 먼저인 1964년에 제작된 영화 「사자성(獅子城)」 역시 이곳 자하동에서 촬영했다고 하니 혹시 옛 마을과 느티나무의 모습이 보일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한국영상박물관에 DVD가 있다고 하니 오는 주말에는 상암동에 가서 영화 「사자성(獅子城)」을 관람해야겠다.

느티나무와 더불어 자하동 마을을 지켜온 또 하나의 수호신은 미륵불이다.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의 공식 명칭은 「국수봉석조미륵좌상」으로 그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마을이 해체되면서 이 미륵불 역시 수난을 면치 못했다.

고려시대의 석불로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 국수봉석조미륵좌상 고려시대의 석불로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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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이사장의 증언에 따르면 본래 국수봉 도당에 모셔져 있던 미륵불은 도당이 없어지면서 산에 방치되었고 미신타파 구호가 한창이던 시절 관악산을 찾은 사이비 종교인들에게 핍박 아닌 핍박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마을이 해체되면서 부득이 인근 성불암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본래 자하동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 주민들에게는 영험한 부처님으로 숭배의 대상이었지만, 마을 주민들이 아닌 타지 사람들에게 미륵불은 더 이상 영험한 존재가 아니었고 따라서 성불암에서도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지금의 서울대박물관에 거처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륵불의 영험함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미륵불만은 본래의 터전인 자하동을 굳게 지키고 있는 셈이다.

비록 자하동을 떠나서 살고 있지만 지금도 옛날 자하동 사람들에게 미륵불은 강력한 숭배의 대상이다. 쇠그릇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강한 염력을 지녔으며 특히나 제 몸에 손을 대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재앙을 내렸다고 하니 그 자신 끝까지 자하동을 지키며 마을의 풍요와 안녕을 빌고자하는 뜻에서였을 것이다. 오늘도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박물관 한쪽 귀퉁이에 앉아 계실 미륵님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태그:#현해당, #자하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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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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