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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정치철학자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두고 "우리의 적대자로 하여금 우리의 뜻을 완벽히 이해하도록 하는 폭력행위" 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래, 한반도는 여전히 냉전 상태에 놓여 있다.

유감스럽게도, 그 전쟁 이데올로기는 한국의 국민들에게도 별 차이 없이 적용되었다. 한국의 권력자들은 클라우제비츠의 저 말을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적용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그들의 뜻, 즉 국가권력에 대한 충성과 복종은 곧 국가폭력으로 이어졌다. 그 국가폭력은 총칼과 고문 등 '고전적인' 형태에서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바뀌었지만 본질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공회대학교 김동춘 교수의 말처럼 '전쟁정치'는 여전히 존재하고, 국가는 여전히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를 여전히 능동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인 백남기 농민이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한 해가 지났다. 말마따나 '생명평화의 일꾼'으로 살았던, 그리고 그 이름이 꽤나 잘 어울렸던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에 맞아 쓰러질 때까지도, 숨을 거둘 때까지도 생명평화의 일꾼이었다.

2015년 11월 14일 그는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고,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열 달 가까이 온 힘으로 버텨내었다. 비록 경찰과 정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사과하고 박근혜가 퇴진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국가폭력의 증거를 온몸과 기억에 지닌 증인으로서, 또 피해자로서 묵묵히 사람들의 뒤에서 싸울 용기와 힘을 보태주는 사람이었다.

평생을 국가폭력과 싸워온 생명평화의 일꾼

사실 백남기 농민은 그가 살아오는 내내 국가폭력의 피해자였고, 거기에 저항하는 투사이기도 했다. 그는 다니던 대학교에서 제적까지 당해가며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과 싸워왔다. 그리고 박정희가 죽고 1980년 전두환이 권력을 잡자, 다시 맨 앞으로 나가 독재정권에 맞섰다. 그 덕분에 감옥에 다녀오기도 했지만, 그는 그의 학교 이름 앞에 붙는 구호 '의혈'이라는 말이 무척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주화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갇혔다가 1981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고향인 전라남도 보성으로 돌아가 평생 밀 농사를 지으면서도 백남기 농민은 의롭게 살아왔다. 1986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한 후 부회장을 역임하거나, 수입 밀과는 다른 한국의 토종 밀 종자를 지키자는 취지로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광주전남 본부의 창설을 주도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농사를 지으며 내내 생명평화의 일꾼으로서 살아온 것이다. 자녀들에게 지어 준 도라지, 민주화, 두산이라는 이름들도 민주주의와 생명평화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대포를 맞는 농민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당시, 농민들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 물대포를 맞는 농민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당시, 농민들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 장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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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의 삶 내내 그를 괴롭혀 왔던 국가폭력은 결국 일평생 민주주의와 생명평화를 위해 살아왔던 백남기 농민을 쓰러트렸다. 2015년 11월 14일, 민주노총과 전농을 비롯한 단체들이 모여 연 민중총궐기 집회에서, 그는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경찰의 규정에도 하지 말라고 적혀 있던, 직사였다.

오후 7시가 좀 넘은 시각 종로 리미에르 빌딩 앞에서 백남기 농민은 물대포에 직사 당해 쓰러졌고, 구급차에 실려 서울대병원으로 갔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고 그 광경을 목격했는데, 물대포에 맞아 튕겨 나가듯 쓰러져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백남기 농민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심지어 사진기자까지 그를 둘러업고 물대포가 오지 않는 현장의 밖으로 향했다. 그가 실려 간 후, 쓰러져있던 자리엔 핏자국마저 지워진 채 하얀 거품이 부글부글 올라오는 매캐한 물거품만 흥건히 남아있었다.

그렇게 그는 300일이 넘는 시간을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있었다. 뇌출혈과 합병증이 호전되었다 악화되었다 하며 그를 괴롭혔으나, 오래 살지 못할 거라는 예상을 뒤엎고 300일이 넘도록 버티고 또 버텼다.

쪽잠을 청하는 사람들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2016년 9월 26일 새벽 쪽잠을 청하고 있다.
▲ 쪽잠을 청하는 사람들 백남기 농민의 시신을 지키기 위해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이 2016년 9월 26일 새벽 쪽잠을 청하고 있다.
ⓒ 장성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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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은 후에도 그를 괴롭힌 국가폭력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그가 눈을 감은 후에도 국가폭력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경찰은 그의 시신을 가져가 부검하겠다며 그가 있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에워쌌다. 시신을 '탈취'해 그의 뇌출혈과 감염이 자신들이 쏜 물대포 때문이 아니라는 부검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라고 사람들은 의심했다.

경찰이 시신을 '빼앗가' 가는 건 그다지 낯선 일은 아니었다. 1991년에는 당시 성균관대 학생이던 고 김귀정 씨의 시신을 '탈취'하려 했고, 영장을 받았다며 영안실 벽을 뚫고 들어와 한진중공업 노동자 고 박창수 씨의 시신을 가져가기도 했다. 가장 최근 사례는 지난 2014년 5월, 금속노조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의 시신을 부친이 요청했다며 가져 간 사건이었다. 이외에도 수많은 시신 '탈취'(시도)가 있었다.

나도 그때 밤새 뜬눈으로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었는데, 경찰에 둘러싸인 채로 지하 안치실을 비롯해 장례식장 곳곳을 지키고 있거나 쪽잠을 자는 사람들에게서 모종의 불안과 함께. 생명평화의 일꾼 백남기를 지켜야 한다는 일종의 결의 비슷한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다행히 밤새 별일이 일어나지는 않았고, 결국 경찰은 부검 시도를 포기했지만 경찰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공권력인지 새삼 느낄 수 있는, 전쟁의 전야 같은 밤이었다.

물대포를 맞는 시민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당시, 차벽을 당기던 시민들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 물대포를 맞는 시민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당시, 차벽을 당기던 시민들이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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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지 않는 현장의 입법자

발터 벤야민의 "경찰은 현장에서의 입법자" 라는 말처럼, 경찰은 현장, 즉 거리에서 자기 입맛대로 법을 만들고 바꿀 수 있는 입법자이자 집행자이다. 민주화가 된 후 조금 나아졌다고 한들, 그들의 성격은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거기다 진보나 사회 운동 등을 북한과 연관 짓고 '종북' 프레임에 가두어 버리는 (준)전시 이데올로기가 합쳐져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의 비민주적인 행위나 불법 행위 등을 사실상 사회적으로 용납하고 정당화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왔다. 실제로 이승만 정권 이래로 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감옥에 갇히거나 고문을 당했고, 심지어 죽기까지 했다. 마치 즉결처분권을 가졌던 일제강점기의 '헌병 경찰' 같은 이들은 현장에서 규율-폭력을 행사했는데, 그 규율은 일제강점기의 일본도에서 최루탄과 곤봉을 지나 방패와 최루액, 물대포로 바뀌어 왔을 뿐이었다.

김동춘 교수는 책임(responsibility)을 response + ability, 즉 '응답 가능성'이라고 규정했다. 국가나 공권력이 책임을 진다는 이야기는 곧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응답을 잘 해주느냐, 혹은 구성원들이 국가나 공권력에게 응답을 받을 가능성이 얼마나 크냐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공권력은 책임을 지지 않아 왔다. 구성원들에게 응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국민들과 전쟁을 하고, 국민들끼리 전쟁을 하게 만들며 그들을 규율하려고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무응답'과 '무책임'은 바로 최근까지도 계속되어 왔다.

그러다 얼마 전인 6월 16일, '언론플레이'를 연상케 하는 반쪽짜리 사과였지만, 이철성 경잘청장이 백남기 농민의 사망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전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청장이자 최고 책임자였던 강신명 전 청장은 끝끝내 사과를 하지 않았다.

안치실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시민들 2016년 9월 26일 새벽, 시민들이 경찰이 안치실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입로에 앉아 있다.
▲ 안치실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시민들 2016년 9월 26일 새벽, 시민들이 경찰이 안치실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진입로에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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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를 찍은 한 편의 거대한 부조리극

백남기 농민의 일생은, 어쩌면 한 편의 거대한 '부조리극'을 연상케 했다. 젊은 시절 민주화를 위해 국가폭력과 싸워 왔고, 고향에 내려가 밀 농사를 지으며 우리 농촌과 우리밀을 지켜야 한다고 이야기했던 사람이 국가폭력에 의해 의식을 잃고, 세상을 떠난 후에도 국가폭력에 시달렸다. 그리고 그 국가와 공권력은 사죄를 하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한 편의 부조리극이었고, 비극이었다.

그런데 직접적인 가해자와 책임자들은 사과를 끝내 하지 않았지만, 경찰과 국가가 백남기 농민과 그 유족들에게 사과를 표명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반쪽' 짜리 사과이지만, 국가가 드디어 '응답' 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사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 부조리극은 끝이 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의 소위 '민주정부' 들에서도 국가폭력이 존재해왔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에서 국가폭력이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다. 아마 형태나 양상이 달라진다 한들 꾸준히 존재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폭력의 가해자로만 존재해왔던 국가가 드디어 과거의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고 국민들에게 '응답'했다는 것은 무척 큰 의미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부조리극이 끝났으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또 다른 부조리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들어 나가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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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글로 기억하는 정치학도, 사진가. 아나키즘과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습니다. 가장자리(Frontier) 라는 다큐멘터리/르포르타주 사진가 팀의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