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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 '아이들'만 문제인가. 240번 버스 사건에서 많은 '어른들'도 똑같이 행동하진 않았나. 어쩌다 어른들이 이렇게 되었나라는 질문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런데 정말 '아이들'만 문제인가. 240번 버스 사건에서 많은 '어른들'도 똑같이 행동하진 않았나. 어쩌다 어른들이 이렇게 되었나라는 질문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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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번 버스 사건, 어쩌다 어른들은 이렇게 되었나

최근 일어난 건대 앞 '240번 버스 사건'은 우리 사회의 단면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할 만하다. 어린 아이 혼자 내려두고 버스가 떠나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찰나의 '불행'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무사했고 엄마를 다시 만났다.

진정 사회적 재난이라 부를 만한 일은 '이후'에 펼쳐졌다. 승객 중 하나가 버스기사를 나무라며 조치를 요구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곧 버스기사에게 여론의 뭇매가 쏟아졌다. 버스기사는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혼비백산했을 아이 엄마를 두고 아이 혼자 내리는 것도 모른 '맘충'이라는 비난도 이어졌다.

버스기사의 잘못으로 볼 수 없다는 조사결과가 나오자 이번엔 인터넷에 글을 올린 '최초 유포자'에 집중포화가 쏟아졌다. 누군가는 나와 아이에게 똑같은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을 테고, 누군가는 자신을 또다시 홀로 남겨질지 모를 아이와 아이를 잃어버릴 위험에 처한 가족의 구원자라 자처했을지 모르며, 또 누군가는 자기가 사회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쪽창에 비친 풍경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금물이라는 아주 간단한 겸손함도, 나의 섣부른 행동이 타인에게 부당한 타격을 가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어설 자리를 잃었다. 그 바람에 사고의 관련자 모두가 돌을 맞고 피투성이가 됐다.

부산 여중생 폭력 사건을 두고 많은 이들이 엄벌을 촉구하고 있다. '어쩌다 우리 아이들이 이렇게 폭력적이 되었냐'며 혀를 찬다. 그런데 정말 '아이들'만 문제인가. 240번 버스 사건에서 많은 '어른들'도 똑같이 행동하진 않았나. 어쩌다 어른들이 이렇게 되었나라는 질문은 어디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유독 청소년의 폭력만을 문제 삼는다. 다른 연령 대비 청소년 범죄율이 유독 높은 것도 아니다. 40~50대 남성의 범죄율이 가장 높지만 '요즘 중년남성들 어쩌다 이렇게 폭력적이 되었나'라고 혀를 차는 이들은 본 적 없다. 특정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하거나 문제 있는 존재로 취급하는 인식론은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나이주의로 다양하게 변주돼 온 차별의 밑거름이었다.

폭력을 가르치는 사회에서 촛불을 든 청소년들

▲  5일 오후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에서 설립 반대 쪽 주민들이 특수 학교 설립을 주장하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항의를 하고 있다.
 ▲ 5일 오후 서울 강서구 탑산초등학교에서 열린 ‘강서지역 공립 특수학교 신설 주민토론회’에서 설립 반대 쪽 주민들이 특수 학교 설립을 주장하는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항의를 하고 있다.
ⓒ 신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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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되라'고 가르치는 사회에서 청소년의 폭력만 문제 삼는 건 염치없는 일이기도 하다. '이젠 지겹다.' 진실과 책임이 채 밝혀지기도 전에 세월호 희생자 가족에게 또 다시 희생을 재촉하지 않았던가.

시교육청의 땅이고 특수학교 부지로 이미 공고된 곳에 한방병원을 설립해주겠다는 정치인이 나타났다.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공약으로 사기 치냐.'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돌아가야 할 화살은 외려 엉뚱한 곳을 향했다. '강서구에 장애인이 왜 이렇게 많냐.' 오래도록 학교의 설립을 기다려온 장애부모들은 읍소하며 무릎을 꿇었다.

사람이 일하다 수십, 수백, 수천 명이 죽어나가도 기업은 이윤을 거둬들이는 데 별다른 제약을 받지 않는다. 교사가 학생에게 각목을 휘둘러도 '사회상규'에 어긋나지 않는 생활지도였다며 기소조차 되지 않은 일도 있다.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현장실습을 나간 청소년들이 부당한 대우와 멸시에 학교로 돌아오려 해도 '그 정도는 견뎌야 사회생활 한다'며 복귀를 막는 학교도 있다. 이처럼 힘 있는 자들의 횡포는 폭력으로조차 분류되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2017년,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사회와 교육의 풍경이다.

부산 폭력 사건이 가볍다는 이야기도, 가해학생에게 책임이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회의 무죄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가해자 신상을 털고 소년법 폐지를 요구하는 그 수십 만 명의 에너지가 썩은 사과를 도려내는 데 급급하지 않고 썩은 상자를 고치는 일에 쓰인다면, 비슷한 잔혹상을 마주할 가능성이 조금은 더 낮아지지 않겠냐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더욱이 일부 청소년의 안타까운 잘못을 이유로 전체 청소년을 싸잡아 비난하고 이들의 인권을 유보할 이유로 삼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우리 정치, 우리 사회, 우리 교육이 만들어낸 온갖 '적폐'의 현장에서 오늘도 청소년들은 고단하기 짝이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다.

학대와 다름없는 학습노동에, 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라는 승자독식의 메시지에 짓눌리던 청소년들이 사회적 지배적 가치를 거슬러 세월호 진실규명과 민주주의의 촛불을 함께 들었다.

광장을 경험한 이들이 묻고 있다. 민주주의 새 역사를 썼다는 '촛불' 이후에도 왜 우리는 아직도 시민이 아니냐고, 인간이 아니냐고. 이것이 민주공화국의 학교냐고. 이들의 외침에 우리는 '위험한 청소년'이라는 비난과 통제로 화답할 것인가, 아니면 동료시민으로서의 초대장을 보낼 것인가.

어떻게 아이는 무사했던 걸까?

그나저나 버스에서 홀로 내린 아이는 어떻게 무사했던 걸까. 아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무력한 존재라는 가정이 사람들을 더 격노케 했을 텐데, 정작 아이는 행인의 휴대전화를 빌어 엄마와 통화하는 기지를 발휘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중대한 교훈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통념과는 달리 아이들도 (때론 성공하고 때론 실패할지언정) 판단하고 해결에 나선다는 것. 나이어린 존재에게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고 존중하는 이들이 많다면, 그들의 역량은 더욱 커질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몇몇 개인을 비난하기보다 홀로 남겨진 아이를 발견하고 관심을 기울일 이웃을 하나라도 더 만드는 게 보다 확실한 안전대책이라는 것. 결국 질문은 우리 자신에게 돌려진다.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어린이와 청소년의 곁에 서 있는가.

부산 여중생 폭력 사건도 마찬가지다. 잔혹한 사건이 가져다준 충격 속에서도 우리가 피해․가해 학생들에게 진지한 관심을 기울인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

건물도 아무런 조짐 없이 순식간에 수직으로 붕괴되진 않는다. 그런데 왜 아무도 사건의 전조(前兆)를 발견하지 못했을까. 그 아무에 '나'는 포함되지 않는 걸까. 가해학생들은 무엇에 그토록 화가 나있고 모진 행동을 가하는 것일까. 폭력장면을 전시하는 행동은 혐오문화와 결탁한 미디어환경이나 학교문화와 무관할까.

가해자에 대한 응보적 처벌 강화는 가장 효과가 적은 대책일지 모르지만 가장 값싼 대책이기에 선호되는 것은 아닌가. '문제의 개인화'는 '피해의 개인화'의 다른 이름이다. 특별한 '괴물'이 저지른 문제이기에 사회의 책임은 잊히고, 피해자의 고통 역시 개인의 몫이 된다.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 홍보 포스터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 홍보 포스터
ⓒ 촛불인권법제정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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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청소년인권법'으로 화답하자

이 사회가 나의 존엄과 인권을 지지한다는 믿음, 사회적 약자/피해자를 지원한다는 신뢰, 시민이자 구성원으로 대접받는다는 의식이 반(反)폭력 감수성도 높인다. 겁먹은 시민을 양산하는 토양은 학생을 겁주는 교육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민주공화국의 학교'를 만들기 위한 발걸음으로 이어져야 한다. 청소년을 위한 정책을 비청소년이 대리하여 요구하는 일로는 부족하다. 청소년이 직접 정치를 통해 자기 삶과 사회를 바꿀 기회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고3 연령대의 일부 청소년만 포함되는 만18세 투표권으로는 청소년의 삶이 그다지 변할 것 같지 않다. 만18세라는 너무 높은 장벽을 쳐놓은 채 생색만 내는 꼴이다. 오는 9월 26일, 2018지방선거를 청소년이 참여하는 첫 번째 선거로 만들고 청소년인권법을 제정하려는 열망들이 모여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로 출범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배경내 시민기자는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이자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공동집행위원장입니다.이 글은 천주교인권위원회 소식지 '교회와 인권'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청소년, #소년법, #청소년참정권,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청소년인권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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