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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N 뉴스 화면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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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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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몽>이라는 영화가 있다. 1950년에 만들어진 이 범죄 스릴러는 오랫동안 전 세계의 평론가와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고전'이 되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을 이겨내야 함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이 영화는 평론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지금까지 '신선도 100%'의 평점을 과시하고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을 세계적 반열에 올린 이 걸작은 70년 가까운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현재형 질문을 던진다. 이 물음은 때로 우리를 뜨끔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예컨대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240번 버스' 논란 같은 경우가 그렇다.

'다 끝난 이야기를 왜 또 끄집어내느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건은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며,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다. 무엇보다 사건의 '주연'이 이 사태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같은 사건은 몇 번이고 되풀이될 것이다.

우리는 과거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진실'?
<라쇼몽>은 살인사건에 개입한 세 인물을 등장시킨다. 살인·강도, 그의 손에 죽은 사무라이, 그리고 그의 아내다. 여기서 사건의 재구성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제 3자가 등장한다. 상황을 모두 지켜봤다고 주장하는 나무꾼이다. 


이제 진실이 밝혀질까? 아쉽게도 (혹은 당연히도) 관객들 눈에 진실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네 가지 다른 관점의 차이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대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모두가 동의할 단 하나의 진실을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여기서 심오한 철학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 없다. 나는 기자이며 언론학자다. '단 하나의 진실을 추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은 철학 수업이 아니라, 기사작성법 강의 때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다.

첫 수업 시간에 어김없이 던지는 질문이 있다. '뉴스란 무엇일까?' 그러면 대개 학생 한 명이 손을 번쩍 들고 '독자에게 진실을 전하는 것'이라고 자신있게 답하곤 한다. 나는 다시 묻는다. 다른 매체들이 같은 사건이나 이슈에 대해 전혀 다른 '진실들'을 보여주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라쇼몽 영화포스터
 라쇼몽 영화포스터
ⓒ 라쇼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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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는 현실이 아니다. 뉴스는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일 뿐이며, 이야기는 언제나 특정 관점에서 쓰인다. 그리고 서술자의 관점은 언제나 편견, 무지, 고정관념, 이해관계로 얼룩져 있다. 기사를 신이 쓰는 게 아닌 한, 언론이라고 다를 수는 없다.

그래서 제대로 훈련받은 기자는 최소한 두 가지를 확인한다. 첫 번째는 '내 기사가 잘못된 사실(facts)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가?'이다. 예컨대 사람들의 이름, 나이, 숫자, 통계수치, 인용문 등이 바른지 확인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사건에 개입된 사람들의 관점을 고루 반영하고 있는가?'이다.

한국 기자 다수가 '기레기'라는 상서롭지 못한 애칭으로 불리는 이유는 이 두 가지를 지키지 않는 데서 온다. 예컨대 '240번 사건'에서 일부 언론은 버스 기사의 입장도 확인하지 않은 채, 그를 사악한 인물처럼 그려냈다.

그렇다면 독자들은 아무런 의무가 없는 것일까?

모두가 연결된 '멋진 신세계'

'초연결 사회'
 '초연결 사회'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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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는 언론이지만, 독자와 시청자들의 역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신뢰할 만한 매체를 선택해야 하고, 모든 보도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뉴스는 서술자의 관점을 반영한 이야기일 뿐, '진실'이나 '현실'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자'라는 사람들이 쓴 뉴스를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한다면, 일반인들이 인터넷에 쓰는 글에 어떤 주의를 기울여야 할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한다고 말했다. 이 사실은 <라쇼몽>의 무대가 된 수백 년 전 헤이안 시대나, 이 흑백 영화가 만들어진 50년이나, 필름 없는 영화가 가능해진 21세기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환경 속에 살고 있다. 바로 '초연결' 사회다. 우리는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로 24시간 연결되어 있다. 불과 20년 전만 해도 '240번 버스'가 전국 뉴스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 모든 사건은 신문이나 방송의 매개를 통해서만 전국 독자들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 과거에 이런 1면 기사가 실릴 수 있었을까?

"버스 혼자 내린 7살 딸, 어머니 다음 정류소에서 뛰어와 상봉."

사태를 희화화하려는 것도 아니고, 이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매체가 세상의 모든 사건을 다룰 수는 없기에, 뉴스는 사회적 중요성과 시급성을 토대로 사건을 저울질할 수밖에 없다(뉴스가 대형 사고나 강력범죄 이야기로 넘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앞의 사건은 전통적 뉴스 가치와 상관없이, 뜨거운 국가적 이슈가 되었다. 여기서 가장 놀라운 점은, 사건이 뉴스가 되는 데 언론의 도움이 필요치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번 버스 사건에서 뉴스매체는 사태를 악화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했지만, 논란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번져가고 있었고, 언론은 여론을 좇기에 바빴을 뿐이다.

내가 겪은 '과거'의 버스 사건

도로를 달리는 시내버스. (자료 사진)
 도로를 달리는 시내버스. (자료 사진)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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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서서히 보급되고 있던 1990년대 중반, 버스를 타려다가 기막힌 일을 겪었다. 줄 마지막에 서서 버스에 올라타려고 왼팔을 뻗는 순간, 갑자기 문이 닫히면서 차가 출발하는 것이다.

손목이 문틈에 끼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운전수는 가속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팔을 당겨보았지만 빠지지 않았다. 나는 버스 속도에 맞춰 뛰면서 오른손으로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엔진소음으로 인해 기사는 그 소리를 듣지 못했고, 버스 속도는 빨라지기만 했다.

그 상태로 30여m를 달려갔고, 속도가 붙으면서 심장 박동과 문을 두드리는 속도도 빨라졌다. 만일 앞에 주차된 차나 표지판 등의 장애물이 있었다면 나는 넘어진 채 끌려가고 있을 터였다.

필사적으로 힘을 다해 주먹으로 문을 몇 번 더 친 뒤에야 차가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나는 계단 위로 올라섰다. 기사 옆에 서서, 그를 노려보며 정신없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크게 벌어진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친 숨이 전력 질주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알기 어려웠다.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고발'이었다. 하지만 헐떡이며 기사를 힐끗 보니, 그의 눈이 내 입보다 더 크게 벌어져 있었다. 나만큼이나 그도 놀랐을 게 틀림없었다. 그는 정중히 사과했고, 나는 그에게 주의를 당부한 뒤 자리에 앉았다.

나는 지금도 내 결정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사건이 최근 일어난다면 사건은 결코 내 선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무명의 목격자가 인터넷에 글을 올리고, 기사와 승객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다. 논란이 충분히 뜨거워지면 언론도 달라붙을 것이다.

혹자는 '못된 기사'를 욕하며 '신상'을 털지 모르고, 혹자는 '멍청한 승객'에 분노하며 '손보다 머리 먼저 밀어 넣었어야 했다'고 비난을 할지 모르겠다. 대중은 내 의사와 상관없이 '영상 공개'를 요구할 테고, 내가 공개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뭔가 구린 게 있어서 저런다'고 난리를 칠 수도 있다. "그 '학생충'이 삐삐에 정신이 팔려 제때 못 탄 게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이도 나올까?

뉴스보다 먼저 반응하는 독자들

독자들은 뉴스보다 먼저 반응한다
 독자들은 뉴스보다 먼저 반응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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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매체는 편향되어 있다. '매체'를 꼭 텔레비전이나 신문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미디어학자인 마샬 맥루언은 '매체'를 '인간의 확장'으로 보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총도 하나의 매체가 되는데 (맥루언은 총을 '이빨의 확장'으로 이해했다), 이 매체는 사람을 쉽게 죽이는 '살인 편향'을 가지고 있다.

물론, 효자손('손톱'의 확장?)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지만, 총만큼 '살인의 편향'을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는 어떤 편향을 지니고 있을까? '탈지역(dislocation)'의 편향을 지니고 있다.

인터넷망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며, 지역과 전국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과거에 '240번 버스' 사건은 목격자의 친구나 가족 간의 사적 담화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옆 사람에게 한마디 하고 말았을 사소한 사건이 타인의 명줄을 쥐고 흔드는 거대한 사건이 된다.

문제는 이런 뉴스를 만들고 전파하는 주역이 얼굴도 이름도 없는, 따라서 책임도 지지 않는 군중들이라는 점이다. 형법조차도 증거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따른다. 하지만 무리 속의 대중들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쉽게 판단하고 쉽게 단죄한다.

네트워크 상에서 개인의 '판단'과 '단죄'의 영향력은 개인과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다. 새로운 시대의 독자들에게는 새로운 의무가 주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로 '정보 생산자'로서의 의무다.

<라쇼몽>에서 흥미로운 또 다른 점은, 영화 결말부를 두고 서로 의견이 갈린다는 점이다. 이처럼 결론의 다른 해석은 영화를 스크린 밖 현실로 확장하는 기능을 한다. 극중 인물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현실을 각자의 관점에서 윤색해서 재구성하는 것이다.  

사람의 눈은 불완전하지만 매우 거만하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을 보는 듯하나, 정작 스스로는 보지 못하는 결정적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태그:#204호, #버스사건, #라쇼몽, #초연결, #매체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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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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