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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항상 문 옆 구석 자리를 본인의 지정석처럼 앉고, 술은 생맥주. 안주는 소시지나 새우 튀김을 시키지만 거의 드시질 않고 남긴다. 거의 정해진 패턴이다.
 그는 항상 문 옆 구석 자리를 본인의 지정석처럼 앉고, 술은 생맥주. 안주는 소시지나 새우 튀김을 시키지만 거의 드시질 않고 남긴다. 거의 정해진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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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 한 잔 주세요."

"네"라고 대답한 나는 자연스레 생맥주 한 잔을 따라 손님에게 가져다드린다. 일주일에 2번 정도는 가게를 찾으시는 남성 손님. 많을 때는 일주일에 5일은 오시기도 하는. 그러니 이제 얼굴도 제법 익숙하고, 반갑다.

그분을 더 잘 기억하게 된 건 매번 혼자 오시기 때문. 항상 문 옆 구석 자리를 본인의 지정석처럼 앉고, 술은 생맥주다. 안주는 소시지나 새우 튀김을 시키지만 거의 드시지 않고 남긴다. 정해진 패턴이다.

가끔 가게에 홀로 오는 손님들이 있다. 며칠 전에는 20대로 보이는 여성 손님이 퇴근 30분 전, 늦은 밤 혼자 가게를 찾으셨다. 종종 남성 손님들이 혼자 오는 건 봤지만, 여성분이 혼자 오는 경우는 흔치 않다. 사장님과 나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무슨 일일까' 하는 눈빛을 보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편한 옷차림의 그녀는 소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키곤 문자를 하다가 통화를 하다가 했다. 다정한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그것도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 꾸욱 참고 퇴근했는데 다음 날 사장님이 그녀의 이야기를 해줬다.

새벽 손님들이 없다 보니 자연스레 이야길 나누게 되었고 그러다 알게 된 그녀의 이야기. 서울에서 살던 그녀는 남자친구가 있는 광주로 내려와서 함께 사는 중. 그런데 그날 많이 다퉜고 마음이 상해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광주에 친구들도 없고 그 시간에 마땅히 갈 곳도 없어서 찾게 된 곳이 우리 가게란다.

편한 인상에 살가운 사장님이랑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 남자친구에게 전화가 와서 마음이 어느 정도 풀린 상태로 돌아갔다고. 그런데 인상적인 이야기는 그 뒤에 이어졌다. 홀로 소주를 마시던 그녀를 본 한 남성 손님이 그녀의 술값을 본인이 계산해주고 싶다고 접근했다고. 그냥 딸같고 그래서 그렇다며 계산했다는 거다. 홀로 온 남성 분들에게는 그런 호의(?)를 베푸는 분들이 없는데 왜 그분은 여성 손님의 술값을 계산해주셨을까? 혹시 그녀에겐 별다른 사연이 있어 보였던 것일까?

그러고 보니,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호의 아닌 호의를 받아 본 경험이 있다. 그녀처럼 홀로였을 때 말이다.

대학 시절, 난생처음 산행을 결심하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홀로 버스를 타고 화엄사로 향하던 길의 설렘과 두려움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사실 두려움보다는 내가 혼자 무얼 한다는 것에 대한 설렘이 더 컸다. 씩씩하게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시켜 먹고, 물 한 통 사들고 올랐던 지리산. 그런데 그 식당에서부터 사람들의 질문은 시작됐다.

"혼자 왔어요? 여자 혼자서 여길 오르려고요?"

그뿐이었으랴. 산 중턱에서 과일을 먹으면서 쉬고 계시던 50대 여성분들은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는 나를 멈춰 세우곤 과일을 함께 먹자시더니 "무슨 일 있냐?", "애인이랑 헤어졌냐?" 진심으로 걱정어린 눈빛으로 물으셨다. 아마 산에 오르는 동안 한 10번 정도는 그런 질문을 받았고, 20번 정도 걱정어린 시선을 느꼈다. 정작 내겐 그런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저질 체력이 바닥나, 당장 이 산행이 언제 끝날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던 중 어떤 지점에 올랐을 때 주변에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직 지리산이 나를 포옥 감싸주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에 딱 나 혼자인 것 같은 느낌. 그 순간이 무섭다기보단, 오히려 온 감각을 열어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들려오는 새 소리와 나무 흔드는 소리, 그리고 그때의 공기. 햇살과 바람까지...

그 경험을 하고 나서 난 홀로 하는 것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사람', '폭력'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그때, 지인과 이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다음부터는 '사연없는 여자'라는 명찰이라도 붙이고 가야겠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 질문만 안 듣는다면, 너무나 '즐겁다'

그 경험을 하고 나서 난 홀로 하는 것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그 경험을 하고 나서 난 홀로 하는 것에 완전히 매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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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엔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시즌에 제주 여행을 홀로 다녀왔다. 그 여행의 콘셉트는 '될 대로 되겠지'였더랬다. 무슨 호기였는지 출발지와 목적지만 정해놨다. 게스트하우스도 예약하지 않은 채 여행을 시작하고, 2박 3일 줄기차게 올레길을 걸었다. 칼바람 부는 겨울, 제주에서 걷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한나절 내내 사람 한 명 없는 깊은 오솔길을 걸을 때는 뉴스에서 본 올레길 살인사건이 떠올라 등골이 오싹하긴 했다. 그래도 홀로 걷는 즐거움이 두려움을 이겨냈다.

그 길에서 50대 부부를 만나 길동무가 되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점심을 먹으며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또 어떤 지점에선 홀로 걷고 싶다고 이야기하고 홀로 걷고. 올레길 쉼터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맥주 한 캔을 홀짝였던 2박 3일은 그야말로 충만한 시간이었다. 그런 나와 달리 올레길에서 잠깐 만났던 이들은 한결같이 물었다.

"아니, 여길 여자 혼자 온 거예요? 무섭게."

나는 그렇게 물어오는 당신이 더 무서웠다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 그들에게 뭔가 사연있는 여자로 보였던 게다. 그래서, 혼자여서 외로웠냐고? 아니 혼자여서 자유로웠고 혼자여서 여유로웠다. 혼자여서 온전히 내가 원하는 속도로 걸을 수 있었다.

주말이면 요즘 방송되고 있는 <싱글 와이프>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즐겨본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 살던 여성들이 친구들과, 혹은 홀로 여행을 가는 콘셉트의 프로그램. 요거, 요거 은근 재미있다. 특히 전혜진 배우가 수륙양용차를 신나게 운전하곤 "하얗게 불태웠어"라고 이야기할 때는 그녀가 뿜어대는 '걸크러쉬' 매력에 나도 함께 신이 났다. 홀로 러시아를 여행하는 연극배우 정재은님을 보면서 순간순간 함께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방송 도중 전혜진 배우가 함께 여행 간 지인들과 신나서 소리 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그걸 보던 어떤 게스트가 물었다.

"여자들은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나요?"

그러자 여성 게스트가 이야기했다.

"소리를 지르면 더 신이 나거든요."

이렇게 명쾌할 수가. '여자'라서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순간을 더 신나게 즐기기 위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무슨 '사연' 있는 '여자'여서 '홀로' 산행을 하고 '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건 그렇고, 나는 이번 크리스마스에도 홀로 여행갈 참. 뭐, 또 '사연없는 여자' 명찰이라도 차고 가야 하는 건 아닌가 싶지만. 난 홀로 씩씩하게 걸을 것이고, 맛있는 밥집은 어딘가 어슬렁거리다 우도 땅콩 막걸리 한 병을 반주 삼아 밥 한 그릇을 뽀닷하게 먹을 것이며, 걷다가 지치면 제주 바다를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실 것이다.

여자 혼자서 괜찮냐고?

그 질문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무나 괜.찮.다.


태그:#홀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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