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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림 작가님이시죠?"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굴까? 누군데 내가 방송작가인 걸 아는 걸까.

"언론노조에서 방송작가지부를 만들려고 합니다."

노조요?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아 몇 차례의 질문을 더 해야 했다. 대략 이해한 결과 방송작가들의 처우를 좀 더 나아지게 하기 위해서 모임을 하니 나오라는 취지였다.

노조? 나에게는 남 얘기였다. 방송작가로 일을 하면서도 노동자는 나와 상관이 없는 단어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노동자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본 일이 별로 없었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나오는 그들은 머리에 띠 두르고 조끼를 입고 거리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이었다.

광화문 근처나 서울역 근처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받을 때는 '얼마나 억울하면 이럴까'하는 어렴풋한 연민을 느끼는 정도였다. 그런 생각도 10년 전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친구의 얘기 덕분이었다.

"여기서는 파업을 시도 때도 없이 해. 그런데 시민들이 별로 불평하지를 않아. 일상으로 받아들여."

노조? 나에게는 남 얘기였는데

그렇게 무식한 상태에서 작년 3월부터 노조 모임을 나가기 시작했다. 방송일을 하면서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작가들을 만나며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무엇보다 서로의 처지를 잘 아는 사람들끼리 어려움을 공유할 수 있다는 자리 자체가 좋았다.

내가 일을 막 시작했을 때 이런 자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직장 내 고충을 어디서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시절, 묵묵히 참기만 하면 멋진 메인작가가 되어 내가 원하는 방송을 언제든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허울 좋은 방송작가라는 타이틀에 가족들에게도 친구들에게도 다 털어놓을 수 없던 시절. 고작 같이 일했던 동료에게 술 한잔 기울이며 불평으로만 끝났던 그때가 떠올랐다.

모임의 횟수가 잦아지면서 방송작가라고 해도 연차마다, 사업장마다, 프로그램마다 일하는 역할도 다르고 그에 따른 부당함도 다르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렇게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비정규직 노조를 어떻게 지속할 것인지.

출근시간은 있어도 퇴근시간은 없는, 주말도 명절도 없이 일하는 작가들이 모임에 지속적으로 나오기는 쉽지 않았다. 자주 얼굴 본 작가들끼리 임시집행부를 꾸리기는 했으나 노조에 대한 기본 인식이 낮았다.

솔직히 말해 노조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기는 했으나 그리 강하지는 않았다. 목마름을 느낄 때쯤 언론노조에서 '평등사회노동교육원‧민주노총교육원에서 주최하는 '활동가 기초과정'이 교육비를 지원 할 테니 들어보라고 하였다. 나처럼 노동에 관심있는 사람들부터 노조 활동가를 이미 하고 있는 수강생들을 4개월에 걸쳐 1주일에 한 번씩 만나게 되었다.

식민지 시절, 한 장의 사진

민주노총 건물에서 진행한 교육을 받으며 '왜 이런 걸 이제야 배웠을까' '왜 진작 알지 못했나' 매번 돌이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일을 하는 누구나 '노동자'라면 치킨집 사장은? 알바생에게는 사용자처럼 보이지만 사장도 같이 일을 한다면 사용자일까, 노동자일까?

치킨집 임대료를 받는 건물주는 어쩌다 한번 건물 관리자를 만난다고 해도 딱히 일을 하지 않고 임대료를 챙긴다면 사용자인가, 노동자인가? 그렇다면 월급을 받는 의사들도(뭔가 돈을 잘 벌면 노동자가 아닐 것 같은 잘못 세뇌된 이상한 메커니즘을 백프로 깨지는 못함) 노동자라면 그럼 병원장은? 대통령은? 성매매 여성들은? 용역은?

나는 직종별로 노동자이다 아니다 하는 문제에 O, X를 당당히 들었다가 다른 학우들의 얘기를 듣다보면 O가 X로 바뀌기도 하고, 반대가 되기도. 아니면 그 중간으로 세워서 팻말을 들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는 다양한 노동자 또는 노동자처럼 보이지만 돈만 번다고 해서 노동자는 아닌 진정한 의미를 가진 '노동자'에 대해, 사용자에 대하여 태어나서 처음으로 깊은 고민을 할 수 있었다.

방송작가는 프리랜서, 즉 비정규직이다. 그렇게 나로부터 시작한 기본적인 질문부터 노동자, 노동의 의미, 일을 한다는 것. 나에게 돈이란? 노동조합은 왜 필요한걸까? 나는 왜 방송작가 일을 시작했으며, 왜 노동조합을 하려고 하는지. 책, 인터넷이 아닌 내 스스로가 답을 찾을 수 밖에 없는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 했다. 아래는 노동에 대한 역사를 배우면서 인상 깊었던 사진이다.

1931년 5월29일 아침. 약 11m 높이의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100여명의 사람들 앞에서 공장주의 횡포를 고발하였다. 9시간 30분 동안 버티다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고,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다 건강 악화로 풀려났으나 그 해 여름에 죽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1세. 지금의 내 나이, 나처럼 그녀도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을까.
▲ 평양 을밀대 지붕위에서 1인 시위를 벌였던 평양 평원고무공장노조 지도자 강주룡. 1931년 5월29일 아침. 약 11m 높이의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가 100여명의 사람들 앞에서 공장주의 횡포를 고발하였다. 9시간 30분 동안 버티다 결국 경찰에 체포되어 구속되었고, 옥중에서 단식 투쟁을 벌이다 건강 악화로 풀려났으나 그 해 여름에 죽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31세. 지금의 내 나이, 나처럼 그녀도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을까.
ⓒ 동광 제2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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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평원고무공장노조의 지도자였던 그녀는 평원고무공장에서 49명의 임금을 삭감하려 하자 그렇게 되면 평양에 있는 모든 공장에서 일하는 2천 3백여 명의 노동자의 임금도 깎일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였다. 강주룡은 을밀대 오르기 전인 1930년 평양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에 참여하여 경험을 쌓았다."
-<노동자 역사 이야기>저자 박준성이 쓴 <인물로 본 문화>(2005)

우리 노동권에 대한 투쟁을 여성들이 먼저 시작했다는 것을 보고, 힘을 얻고 싶은 마음에 더욱 정보를 찾아봤다. 그런데 더 혼란에 빠지고야 말았다.

"'임금인하 반대, 해고반대' 등 20여개 조항을 내걸고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 가운데 3분의 2가 여성노동자였는데 노동자대회에서는 임금인하 반대와 해고 반대 뿐 아니라 '산전 산후 3주간 휴양과 생활보장, 수유시간 자유' 같은 모성보호에 대한 요구를 전면에 내세우고 파업에 참가했다. 그리고 7년 앞서 1923년에는 이미 경성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노동운동의 물꼬를 튼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다."
-같은 책

1930년대는 식민지 시대였는데 지금의 우리 구호보다 더욱 앞서고 있다. 너무 놀라웠다. 그 사이에 우리는 얼마나 더 후퇴를 한 것인가. 우리나라 정권과 미군정의 결탁 아래 어용노조를 만들고, 평등을 주장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사상을 덧씌워 발목은 잡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렇다하더라도 너무 뒤쳐진 것이 아닌가. 그 사이에 우리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역사 속에서 여성운동가 하면 유관순 외에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노동사를 공부하며 주목 받지 못했던 여성 운동가들과 활동을 알아가며 큰 맥락 속에 우리 방송작가들의 활동이 차지하는 위치를 좀 더 넓게 볼 수 있었다.(2016년 방송작가 노동인권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방송작가 중 여성이 94.6%)

임시집행부 이름을 달고

내 삶의 주인이 나인 것처럼 각자의 분야에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끊임없이 높이기 위한, 그럼으로서 타인에게도 도움이 되는 그 기본이 바로 노동조합 활동이며, 이 기본 활동을 장려하고 키워가는 사람들이 바로 '활동가'인 것.

십여 명의 수강생들은 활동가로서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항상 수업 때마다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전달해야했다. 단순히 주입식이 아닌 활동가로서 기초를 매 수업시간마다 나도 모르게 서서히 배워나가고 있었다.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다큐 ‘어머니’를 만든 감독이기도 한 태준식. ‘나는 무엇을 위하여 노조/노동운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쓴 답을 들어 올리고 있다.
▲ 박한백(민주노총 법률원 송무차장)과 태준식(공공운수노조 교육국장)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다큐 ‘어머니’를 만든 감독이기도 한 태준식. ‘나는 무엇을 위하여 노조/노동운동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쓴 답을 들어 올리고 있다.
ⓒ 수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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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초반에는 발표하기 전에 '명색이 방송작가 일을 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면 너무 무식해 보이지 않을까?'하며 눈치를 보기도 했으나 수업에 참여하면서 다른 수강생들의 진지하고 솔직한 모습에 '모르는 걸 아는 척 하는 게 진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 관련 배움의 차이가 다른데도 포용하는 분위기 속에서 점차 내 감정에 솔직해졌고, 먼저 발표하고 싶은 마음에 손을 번쩍 들기도 했다.

이번 교육에 참여하면서 활동가를 꿈꾸는 예비 활동가뿐만 아니라 노동자로서, 시민으로, 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 누구나 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내가 발 담근 이곳만 조금씩 바꾸면, 모두들 각자 자리에서 다 그렇게 한다면 좀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왜 노조활동을 하려고 하는지 수업이 끝날 때 쯤 나는 방송작가의 열악한 처우에 분노를 너머 세상도 생각하고 있었다.

머릿수만 채우자며 나갔던 자리를 꾸준히 채우다 보니 어느새 임시집행부라는 이름을 달고 활동을 하고 있다. 방송작가의 10에 9명이 여성인 비정규직. 우리 방송작가 유니온이 여성과 비정규직을 아우르는 노조의 롤모델이 될 수는 없을까. 방송과 시청자들을, 다른 노조와 노조, 노동자들과 노동자들을 우리 조합원들이 전파를 통해 이어준다면. 시청자들도 곧 노동자이기에. 우리 모두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기에.

덧붙이는 글 | 평등사회노동교육원에서 발행하는 회지에 올라갈 예정입니다.



태그:#활동가 교육, #평등사회노동교육원, #민주노총,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준) /방송작가유니온, #여성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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