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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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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멀쩡하다고 해서 국가의 부름을 받은 아들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국가유공자 혹은 보훈보상대상자로 '인정받기' 위해 엄마는 직접 아들의 사체검안서를 들고 국방부와 국가보훈처를 찾아가야 합니다. 사실 엄마는 보상금을 주겠다는 종이 쪼가리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게 있습니다. 철저한 조사, 투명한 정보공개, 진심어린 사과, 따뜻한 위로, 털어놓을 수 있는 공간 말입니다. 웃어도 안 되고, 울어도 안 되는 일상이 그들의 가슴에 콕콕 트라우마를 새겼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국가 차원의 군트라우마센터를 만들자는 의미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동시에 연재되는 다음 스토리펀딩(바로가기)에서 국가의 책임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군피해치유센터 함께'를 후원할 수 있습니다. - 기자 말

 군 피해자 고 김찬욱 상병의 할머니가 자리를 뜨던 기자들을 맨발로 배웅하며 세상을 떠난 손자 김 상병을 잘 부탁한다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군피해자 고 김찬욱 상병의 할머니가 자리를 뜨던 기자들을 맨발로 배웅하며 세상을 떠난 손자 김 상병을 잘 부탁한다며 마지막 인사를 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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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커덕, 끼이이익.

분명 닫고 나왔던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할머니(75·최영자)는 맨발이었다. 뒤편으로 우산, 신발,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마치 할머니의 머리칼처럼.

인터뷰 때 젖었던 할머니의 눈가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얼굴을 향한 양 손은 눈물을 닦아야 할지, 호소의 표현을 해야 할지, 아니면 그냥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건지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기자 : "할머니, 왜 나오셨어요? 무릎도 안 좋으시면서."
할머니 : "근데 우리 찬욱이는 왜 제대 안 합니까?"

찬욱이는 죽었다. 할머니가 핏덩이 때부터 키웠던 육군 11사단 김찬욱 상병(살아있다면 26세)은 제대를 불과 2개월 앞두고 군에서 사망했다. 부모 없이 자란 김 상병은 할머니에게 손자이자 아들이었다. 김 상병이 죽기 8일 전, 할머니는 손자에게 온 전화를 받았다.

"할머니, 저 곧 제대하니까 희진이(김 상병의 여동생, 24, 가명)한테 제 방 좀 치워놓으라고 하세요. 휴가도 곧 나가요!"

군에서는 김 상병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확정했지만, 할머니는 인정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분명 안다. 김 상병이 죽었다는 것을. 조금 전 인터뷰 때도 "군대가 우리 애를 죽였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떠나는 기자를 맨발로 붙잡으며 왜 손자가 제대하지 않는지 물었다.

 세월이 흘러 누렇게 변한 베란다 문틀엔 '033 시작하는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찬욱이 대장 전화번호"라고 말했다.
 세월이 흘러 누렇게 변한 베란다 문틀엔 '033 시작하는 전화 번호가 적혀 있었다. 할머니는 "찬욱 대장 전화번호"라고 말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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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베란다 출입문에 삐뚤빼뚤 적혀 있던 전화번호가 떠올랐다. '033(강원도 지역번호)'으로 시작하는 번호였다. 할머니는 "찬욱 대장 번호"라고 말했다. 할머니의 여동생(최명자, 66)이 그를 다시 집으로 들여보내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아이고, 울 언니 또 이런다. (기자를 보며) 찬욱이 죽은 뒤로 이렇게 정신이 왔다갔다 합니다. 지금도 군부대에 전화해서 찬욱이 제대 안 하냐고 물어보고 그래요. 어쩌다 울 언니가 이렇게 됐는지…."

싸움을 멈출 수 없는 이유

 휴가 나왔던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평소 좋아했던 기찻길로 향했다. 그 곳에서 가족도 뒤로한 채 힘들었던 군생활을 영원히 마감했다.
 휴가 나왔던 고 김대웅 일병(가명)은 평소 좋아했던 기찻길로 향했다. 그 곳에서 가족도 뒤로한 채 힘들었던 군생활을 영원히 마감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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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보자. 군대에서 아팠던 아들이 진통제 몇 알로 버티다 목숨을 잃었다면(고 노우빈 훈련병, 고 홍정기 일병). 휴가 나온 아들이 집 앞 기찻길에서 거수경례를 한 채 세상을 떠났다면(고 김대웅 일병, 가명). 아들이 좋아했던 피자·치킨만 봐도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면(고 홍정기 일병). 아들의 죽음을 떠올리다 교통사고만 9번이 났다면(고 김준엽 하사). 다행히 아들의 목숨은 건졌으나 괴롭힘의 도구였던 매미를 피해 이사를 다녀야 했다면(이민욱 일병, 가명).

혹은 당신이 '윤 일병'의 엄마라면….

2014년 윤 일병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주범은 살인죄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다(이후 교도소 내 가혹행위로 3년 추가). 음식을 먹다 목이 막혀 죽었다던 윤 일병의 사망 원인도 지속적 폭행에 따른 것으로 바뀌었다. 국회는 '군 인권개선 및 병영문화혁신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윤 일병, 아니 고 윤승주 일병(살아있다면 25세)의 엄마는 지금도 울고 있다. 여론이 잠잠해진 사이, 정치와 언론이 가끔 필요에 의해 윤 일병 세 글자를 소환하는 사이에 엄마 안미자(63)씨는 울고, 아니 싸우고 있었다.

엄마가 싸움을 멈추지 못하는 이유는 중요한 나사 하나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나사를 찾아 조일 때까지 엄마는 아들을 지키지 못한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

당시 육군 28사단 검찰부는 윤 일병의 사망 원인을 기도 폐쇄에 의한 뇌 손상으로 판단했다.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는 이유를 들며 가해자들의 혐의도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를 적용했다. 아직 윤 일병의 억울함이 세상에 알려지기 전이었다.

 음식을 먹다 목이 막혀 죽었다던 고 윤승주 일병의 사망원인은 지속적 폭행과 가혹행위에 따른 것으로 밝혀졌다.
 음식을 먹다 목이 막혀 죽었다던 고 윤승주 일병의 사망원인은 지속적 폭행과 가혹행위로 밝혀졌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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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군인권센터가 이 사건을 폭로했고, 여론이 들끓었다. 사건은 상급부대인 3군사령부 검찰부로 넘어갔다. 사망 원인도 지속적 폭행으로 인한 좌멸증후군(근육조직이 붕괴해 생긴 유독물질이 혈액으로 쏟아져 장기에 이상을 일으키는 현상) 및 속발성 쇼크(외상으로 인한 대량 출혈로 순환 혈액량이 감소해 쇼크를 일으키는 현상)로 바뀌었다. 가해자들의 혐의 역시 살인으로 바뀌었다. 군 스스로 조작을 인정한 셈이다.

하지만 조작을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 엄마가 찾고 있는 나사, 싸우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폭행 가해자들을 피고로 한 재판은 2016년 8월 마무리됐지만, 조작의 책임을 묻는 재판은 한 번도 열리지도 못했다. 2014년 9월 윤 일병의 가족은 국방과학수사연구소 법의관, 28사단 검찰관, 28사단 헌병대장 등 초기 수사에 관여한 5명을 고소했다. 하지만 국방부 검찰부, 고등군사법원, 대법원 모두 증거가 부족하다며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지금은 증거를 보강해 30여 명을 다시 고소해놓은 상황이다.

일상이 없는 그들의 일상

 .군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선 피해자 가족들이 직접 뛰어다녀야 했다. 요구한 서류조차 부대에서 제대로 받지 못했다. 힘겨운 싸움은 가족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군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선 피해자 가족들이 직접 뛰어다녀야 했다. 요구한 서류조차 부대에서 제대로 받지 못했다. 힘겨운 싸움은 가족의 일상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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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없는 일상. 엄마의 싸움 너머엔 그것이 존재했다.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로 가득 채워진 일상. 평범하지 않은 삶이 어느덧 일상이 돼 버린 상황.

윤 일병의 조부모는 사건 후 1년이 채 안 돼 고인이 됐다. 엄마는 거리에서, 텔레비전에서 군복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점잖았던 아버지는 화가 잦아졌고, 결국 고혈압 약을 먹어야만 했다. 매형은 국방부·법원을 쫓아다니느라 하던 일을 접었고, 그로 인해 누나는 무리하게 일을 하다가 공황장애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래서 엄마는 웃다가도 "내가 이렇게 웃고 있어도 되나?"라고 생각한다. 여행을 가도 "내가 한가하게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라며 몸과 마음을 감춘다. 하지만 마냥 울 수도 없다. "저 엄마는 언제까지 울고만 있을 거야"라는 숙덕거림이 귓전을 맴돌기 때문이다.

"하다못해 성질이 나면 화내고 그래야 하는데, 그러질 못해요. 내가 막 화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저 사람 윤 일병 엄마 아니야?'라며 손가락질 할까 봐…. 그래서 참고, 참고 또 참고 그러죠. 내가 무슨 천사도 아니고. 그러다보니 이젠 웬만하면 화도 안 나요. 바보가 된 느낌이에요."

국방부 자료에 따르면, 군에서 사망 또는 상해로 전역하는 인원은 1년에 1700여 명 수준이다. 2015년에는 93명이 사망했고, 1587명이 병을 얻어 제대했다. 4인 가족을 기준으로 한다면 1년에 6800명(1700×4)이 군 피해자가 되는 셈이다. 단순히 30년으로 계산하면 군에서 가족이 사망하거나 다쳐 신체적·정신적 피해를 입은 인원은 20만 4000명(6800×30)에 이른다.

통상 사고가 발생하면 군은 행정적 수습 및 처리에만 몰두한다. 피해자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은 '조사를 진행한다'는 명분 아래에 철저히 배제된다. "언론에 알리지 않고 사인만 하면 순직 처분을 받을 수 있다"는 회유와 압박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김운선(고 김준엽 하사 어머니)씨는 그 회유 때문에 3년 만에 아들의 죽음을 자살로 인정했다. 하지만 국방부는 순직 처분을 거부했다. "불우한 가정환경"이 그 이유였다.

이처럼 사고의 책임을 피해자 개인과 가정 탓으로 돌리는 것은 군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국가보훈처는 고 김대웅 일병(2015년 5월 자살, 살아있다면 25세, 가명)의 중학교 시절 정신과 상담 내역을 들이밀며 유족의 보훈보상대상자 신청을 기각했다.

"멀쩡한 남자라고 해서 군대에서 데려간 것 아닙니까. 근데 왜 죽고 나면 멀쩡하지 않은 이유가 자꾸 만들어지는 건데요? 어떻게 죽었든 군대가 죽인 겁니다."

하지만 김 일병의 엄마(이정숙, 49, 가명)에겐 절망할 틈도 주어지지 않았다. 무너지는 가슴을 가까스로 부여잡은 채, 엄마는 지금도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

"군에서 발생한 사건의 경우 대부분은 군 복무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 변사사건 기록들은 대부분 개인적인 이유가 그 죽음의 원인이 됐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수사를 시작한다. 가정환경, 여자문제가 가장 자주 등장하고, 군 복무 중 업무과중, 내무부조리, 구타, 가혹행위 등 군에서 원인을 찾는 수사는 나중에 진행된다."(하주희 변호사, <군 피해자 치유·지원센터 왜 필요하며, 어떻게 만들어야 하나?>, 2017년 4월 12일)

"90% 이상의 사람이 적응하는 곳이라고 해서 그곳이 문제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 (중략) 적응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불면의 밤을 보낸 젊은이들이 견디다 못해 택한 마지막 결정인 자살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돼야 한다."(이영문 아주대 인문대 특임교수(정신과 전문의, 해병대 인권위원), <군 피해자 치유·지원센터의 필요성과 한계>, 2017년 4월 12일)

책임지지 않는 국가




 군 피해자들에 대한 예우는 현충원에 안장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진 봉안식은 군피해자 사건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군 피해자들에 대한 예우는 현충원에 안장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사진 봉안식은 군피해자 사건들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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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일병 엄마의 곁엔 재판 기록을 비롯한 서류 뭉치가 놓여 있었다. 지난 한 달여 동안 만난 군 피해자들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모두 두터운 서류 뭉치를 품고 있었다. 군으로부터 겨우 받아낸 수사기록부터 군을 상대로 한 재판 기록, 아들의 억울함을 증명할 이런저런 서류까지…. 윤 일병의 엄마는 "갖고 있는 서류의 복사비만 60, 70만 원이 나온다"라며 씁쓸한 웃음을 내보였다. 켜켜이 쌓인 서류 더미는 군 피해자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트라우마를 상징하는 듯했다.

국가 예산으로 군트라우마센터(군 피해자 치유·지원센터)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 군에서 피해를 입은 이들과 그 가족을 지원할 수 있는 방법은 국가보훈처에서 관장하는 국가유공자·보훈보상대상자 제도뿐이다(이보다 앞서 국방부의 순직 처리도 필요).

이 시스템에는 너무도 큰 공백이 존재한다. 국가유공자·보훈보상대상자로 인정받을 때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고, 지원 역시 단순히 물질적인 것에 국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앞서 소개한 김 하사, 김 일병의 사례처럼 그것도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보훈 혜택을 받는 과정, 특히 각종 사고 발생 직후부토 소속 부대의 사고 종결 처리 과정에서 피해자가 받을 수 있는 지원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중략) 국가유공자 내지 보훈보상대상자로 등록되더라도 이들에 대한 지원은 금전적 지원과 신체 장애가 있는 경우 이에 대한 보철구 지급과 재활 훈련 서비스만 제공되고 있어 사고 발생으로 인하여 겪는 정신적 어려움과 관련한 서비스는 결국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남게 된다."(국회 사무처, <군 복무 중 사망 군인의 가족 지원 방안 : 군 피해자 치유·지원 센터 설립 필요성을 중심으로>, 2016년 12월)

윤 일병의 사례처럼 군이 사건을 조작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 김 하사의 사례처럼 "언론에 알리지 않고 사인하면 순직으로 처리해주겠다"는 군의 기만 행위가 없어야 한다. 김 상병의 사례처럼 유족들이 망자의 사인을 인정할 수 없는 일도 없어야 한다.

 제대를 2개월 앞둔 김찬욱 상병은 할머니에게 전화해 방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마지막 부탁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 최영자씨는 밖이 보이는 베란다에서 찬욱이의 이름을 부르며 김 상병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제대를 2개월 앞둔 김찬욱 상병은 할머니에게 전화해 방을 치워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마지막 부탁이 되고 말았다. 할머니 최영자씨는 밖이 보이는 베란다에서 찬욱이의 이름을 부르며 김 상병이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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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욱 일병의 엄마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약을 복용하다 간이 안 좋아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윤 일병의 매형은 지금도 처남의 죽음과 관련된 자료를 받기 위해 국방부를 드나들고 있다. 김 상병의 여동생은 오락가락하는 할머니의 부름에 학교에서 수업을 듣다가도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야 한다. 방과 후 학교 교사였던 홍 일병의 엄마는 다시 일터에 나갈 자신이 없다.

현행 국가유공자·보훈보상대상자 제도는 이런 피해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는 데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현 제도 아래의 지원은 치유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군트라우마센터를 만들어야 한다. 그곳에는 ▲ 정신건강 분야의 의료지원 대폭 확대 ▲ 군 측의 정보제공 의무 명시 ▲ 법률상담 ▲ 신체 안전을 보호받을 수 있는 응급조치 및 임시조치 ▲ 취업 및 대부 지원 등의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군 피해자들이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울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군에서 아들을 잃은 공복순(54, 고 노우빈 훈련병 어머니)씨는 지난해 직접 '군피해치유센터 함께(아래 함께)'를 만들었다.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작게나마 이곳이 짊어지고 있다. '함께'를 경험한 엄마들은 이렇게 말한다.

"보통 사람이 제게 '빨리 잊고 정신차려야지'라고 말하면, '당신은 안 겪어봐서 모르지'라는 생각이 들며 화가 난다. 그런데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이 '먹고 살아야지, 잊어야지' 이야기하면 위로가 된다."(고 홍정기 일병 어머니)

"일반 사람들은 제 이야기를 두 번 정도 들으면 지치더라고요. 형제들도 자꾸 제가 울기만 하니까 '그만할 때 되지 않았냐'라고 그래요. 저도 알아요. 왜 그런 말을 안 하겠어요. 그런데 (함께에 가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있어요. 같이 아파하고, 같이 이야기하고, 제가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그 이야기를 다 받아줄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필요했어요."(고 김대웅 일병 어머니)

어떻게 죽었든, 군대가 죽였다. 이제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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