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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소장 『경기지』(규12178) 4책에 수록된 시흥현의 그림식 지도로 제작연도는 1832년에서 1833년 사이이다. 규장각 제공
▲ 시흥현 지도 규장각 소장 『경기지』(규12178) 4책에 수록된 시흥현의 그림식 지도로 제작연도는 1832년에서 1833년 사이이다. 규장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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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에서 1833년 사이에 제작된 <경기지>(규12178) 시흥현 지도를 보면 신림리를 사이에 두고 좌우로 '충현서원'과 '일간정'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의 강감찬 장군과 서견, 그리고 조선 선조 때의 청백리 오리 이원익을 배향한 충현서원은 본래 광명시 소하동에 있다가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사라져 지금은 터만 남았는데 광명 아닌 신림동에도 같은 이름의 서원이 있었던 것일까?

지도상으로 보면 현재의 관악구 서원동 근처가 분명하여 아무래도 서영보의 <유자하동기>에 등장하는 '강태사서원'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자료의 부족으로 상고하기 어렵다. 이 충현서원 역시 1871년에 간행된 경기읍지(규12177)부터는 지도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성주암과 함께 18세기 이후 시흥현 지도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일간정(一間亭)'은 지금은 그 존재 자체를 아는 이가 드물지만 약 200여 년 전 자하동을 드나들던 유산객이라면 반드시 들러 잠시 지친 다리를 쉬며 선경을 감상하던 정자였다.

영조 때 심육(1685~1753)의 시 <또 청자 운에 차운하며(又次靑字䪨)>에 "삼월의 자하동, 외로운 마을의 일간정(三月紫霞洞, 孤村一澗亭)"이라는 구절이 보이고, 강준흠(1768~1833)의 <아이들을 데리고 벗들과 함께 관악산을 유람하며 시에 차운함(兒曹與諸生游冠岳有詩次韵)>이라는 시에도 "자하동의 꽃가지 아직 손에 있는 듯, 일간정 아래서 몇 잔 술 기울였었네(紫洞花枝猶在手, 一間亭下幾巡盃)"라는 구절이 보인다.

그렇다면 일간정은 자하동 어디에 위치했으며 누구의 소유였던 것일까? 놀랍게도 그 해답은 채제공(1720~1799)이 쓴 <유관악산기>에 있다. 조선 정조 때의 명재상 번암 채제공이 관악산을 유람한 것은 서기 1786년 병오년 봄, 그의 나이 67세 때였다. 자하동을 거쳐 불성사, 연주대로 향하는 코스였는데 평소 자하동의 승경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던 채제공인지라 이를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그의 <유관악산기> 중 자하동 관련 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4월 13일, 남쪽 고을에 사는 이숙현과 약속하고 말을 타고 길을 나섰다. 아이들과 종자가 또한 네다섯이었다. 10리쯤 갔을까? 자하동에 들어가서 일간정 위에서 쉬니 정자는 곧 신 씨의 별업(別業)이다(四月之旬有三日。約南隣李廣國叔賢。騎馬以出。兒輩從者亦四五人。行可十許里。入紫霞洞。憇一間亭上。亭卽申氏庄也。).

숙종 때의 문신 최석정이 쓴 <이로당기>에 따르면, 자하동에는 본래 성천부사 신여석과 공조판서 신여철 형제가 세운 이로당(二老堂)이 있었고 또, 신여철의 차남 신호(申瓁)가 세운 만오당(晩悟堂)과 모정(茅亭)이 있었다고 한다. 이 모정은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었고 그 아래 개울가 바위에 최석정이 신호의 대자 글씨 '제일계산(第一溪山)'을 모사해 새겼는데 이 모정을 최석정은 벽류정(碧流亭)이라 하고, 자하 신위는 계정(溪亭), 채제공과 서영보 등은 일간정이라 불렀던 것이다. 물론 서영보는 <유자하동기>에서 일간정이라는 명칭을 쓰지 않고 그냥 소정(小亭)이라고만 했으나 그의 <자하동을 나서며>라는 시에는 일간정이 보인다.

일간정 위에 폭포 소리 들리고
이로당 터에 붉은 잎 쌓이는 때
공산의 풍경 소리 그대에게 들려주고파
잠시 산방에 묵었다가 곧 돌아간다오
(一間亭子飛泉響, 二老堂基紅葉堆。空山風珮輸君聽, 蹔宿山房卽便廻。)

지금의 호수공원 자리에는 본래 1968년에 설치된 신림풀장이 있었으나 서울대 이전 후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던 것을 1997년, 호수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관악산 호수공원과 자하정 지금의 호수공원 자리에는 본래 1968년에 설치된 신림풀장이 있었으나 서울대 이전 후 사용되지 않고 방치되던 것을 1997년, 호수공원으로 조성하였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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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회 인문기행 때 국수봉석조미륵좌상을 확인하기 위해 성불암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국사봉에 오르지 못했는데 '일간정'의 흔적도 찾아볼 겸 다시 자하동으로 향했다. 국사봉(國師峰) 또는 국수봉(國守峰)이라는 명칭은 가히 전국적이라 할 만큼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그 어원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마을의 수호신을 모시는 국사당이 있어서 그렇게 불렀다는 게 정설이다. 자하동 국사봉 역시 국사당이 있었고 해마다 음력 10월에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당제를 지냈다.

대운동장을 끼고 곧장 올라가다가 규장각으로 꺾어지는 주차장 겸용도로 위에 서서 서영보의 <유자하동기>를 펼쳐놓고 잠시 당년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발아래로는 연주대 우측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버들골, 자하연, 감골로 이어지는 자하계(紫霞溪)가 흐르고, 이곳 감골 어디 쯤인가 자하계의 물줄기가 급격하게 동북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일간정이 있었다.

그 동쪽에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 아래 '제일계산(第一溪山)' 바위글씨가 있었다. 정자 앞으로는 국사봉으로부터 길게 물줄기를 따라 내려온 야트막한 둔덕이 병풍처럼 에워싸며 정자 서쪽 백여 보를 지난 곳에서 그치고 그 위에는 평탄하고 너른 땅 수백 묘가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었는데 꽃나무는 철쭉이 많고 유실수는 밤나무가 많았다. 물 한 줄기가 여계담으로부터 흘러내려오다가 과수원 서쪽 벽을 휘돌아 자하계와 합쳐졌다.

신위의 <여계담(女笄潭)> 시에, "여계담은 산 중의 세 번째 골짜기다"라는 부연 설명이 있는 것을 보면, 여계담은 지금의 호수공원에서 삼성산 쪽으로 이어지는 골짜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주대, 무너미고개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줄기와 여계담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호수공원 위에서 합류하여 내려오다가 과수원 서쪽 벽을 휘감아 돌며 자하계와 합류한다니 합류지점이 이곳 주차장 아래 어디쯤이었는지 아니면 더 하류 쪽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가 필요해보인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주차장 부근을 서성거리다가 문득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자하동 마을의 옛 모습이 궁금해졌다. 의성김씨 집성촌이었던 자하동 마을은 1973년 철거 당시 대략 60여 호의 규모였다고 한다. 2백여 년 전 마을의 규모도 그 정도였는지 궁금하지만 신위가 그린 <자하산장도>라도 발견되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그 구체적인 모습을 알기 어렵다. 그나마 신위가 남긴 시편들을 통해서 그 단편적인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일 것이다.

1830년 윤상도의 옥사로 강화유수 직에서 물러난 신위가 자하동에 머물고 있을 때 쓴 시 중에 <심화(尋花)>라는 제목의 절구 5편이 있다. 그 중 마지막 편을 보면 석양에 물든 자하동 마을의 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스물네 마리의 황소가 있는 마을이라고 했으니 두세 집 당 한 마리의 소가 있다고 가정할 경우 대략 1970년대 철거 당시 마을과 비슷한 규모가 아니었을까?

꽃을 찾아서

밭갈이 마치자 푸른 산봉우리 석양에 물드는데
꽃에 홀린 삿갓 쓴 나그네는 돌아갈 줄 모르네
한 마을 스물네 마리의 누런 송아지들
봄날의 초원 위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네
(耕罷夕陽生翠巒, 迷花籉笠不知還。一村二十四黃犢, 散點平原春草間。)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h2ony/221095276552)에도 게재됐습니다.



태그:#자하동, #자하 신위, #인문기행, #현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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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기행 작가. 콩나물신문 발행인. 저서에 <그리운 청산도>, <3인의 선비 청담동을 유람하다>, <느티나무와 미륵불>, <이별이 길면 그리움도 깊다> <주부토의 예술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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