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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 있던 시절 나는 소위 말하는 '관심 병사'였다. 군 조직은 나와 정말 맞지 않는 곳이었고 나는 하루하루를 우울과 고통 속을 허우적거리며 살았다. 결국 문제는 발생했고 나는 이런저런 상담과 재활 프로그램에 보내졌으며 일거수 일투족을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지냈다.

그리고 전역 후 나는 그곳에서의 일을 마음속에 밀봉한 후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러워서만은 아니었다. 두려웠다. 내가 어딘가 흠결이 있는 인간으로 의심받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그 때문에 취업이나 직장 생활에 있어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무서워서였다. 내가 그 경험을 어떻게 생각하든 군 생활을 잘하는 것이 '정상적인 남성'이 되는 통과 의례처럼 여겨지는 사회라 어쩔 수 없었다.

그때의 생각이 다시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청와대 누리집에 올라와 화제를 모은 한 청원을 본 후였다. 요약하자면 그 청원은 남성과 마찬가지로 여성 역시도 군대에 가도록 만들어 달라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나는 다음의 내용에 눈길이 꽂혔다.

청원자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군가산점제는 '이화여대 공무원 준비 학생 5명'과 '연대 장애인 학생 1명'이 같이 형평성을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해 폐지를 이끌어냈는데 그렇다면 '여성들이 장애인들과 동급이라는 걸 스스로 인정'하냐는 것이었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여성 징병제' 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올라온 '여성 징병제' 청원
ⓒ 청와대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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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청원자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동일 혹은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들 이야기하시며 남녀평등 주장'했으니 여성도 병으로 의무 복무를 하고 동등한 혜택을 받으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압권은 글의 마지막이다.

"여성의 징병이 여성의 신체차이 운운되며 통과되지 않는다면 지금 시행되고 있는 여성간부모집, 경찰모집도 중단돼야 하고 사회에 나가서 기업에서도 여성은 신체적으로 약해 제약을 크게 받으니 남녀간 취업차별이 이뤄져도 순리상 할 말이 없어지게 되는 겁니다."

평등에 조건이 달려서는 안 된다

우선 지적할 점은 그 글이 장애인에 대한 강력한 혐오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런 점을 차치하고 본다고 해도 여전히 고개는 갸우뚱해진다. 일단 군대를 다녀온 남성이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더 강하다는 것도 편견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취업 과정에서 성별에 따른 차등한 대우를 할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은 체력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 장애 유무를 떠나서 개인들은 각각 저마다의 역량과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그게 특정 직무에 맞고 그 인물이 적합하다면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으면 된다. 만일 일을 구하는 데 있어 이외의 다른 요인으로 누군가가 불이익을 받는다면 그건 그냥 비합리적인 차별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런 식의 차별로 부터 보호를 받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돼야 할 보편적인 원칙이다.

말하자면 청원자가 마지막에 제기한 문제는 여성의 군 입대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애초에 상식적인 사회에서라면 발생해선 안 되는 일인 것이다. 성별, 장애 유무 기타 그 외의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는 국가가 국민에게 보장해줘야 할 기본적인 권리이자 동시에 헌법에도 규정된 가치다. 때문에 이 문제는 성원권과도 연결된다.

누구나 조건 없이 받아야 할 보호를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만 제공하지 않는 것은 그들을 사회의 평등한 구성원으로 대우하지 않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끔찍한 것은 여성이 군대를 가는 것과 상관없이 그의 주장 속에서 장애인은 여전히 병역을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별을 마주해도 '할 말이 없'는 존재로 남는다는 것이다. 왜? '동급'이 아니라서?

여성이 군대를 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지난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67주년 여군 창설 기념식에서 표창 수여자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지난 6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67주년 여군 창설 기념식에서 표창 수여자들이 경례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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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자의 주장은 보편적인 인권에 조건을 달고 이를 충족하지 못한 사람을 2등 시민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도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기준이 병역이라는 점에서도 심각하게 문제적이다. 한 마디로 사회에서 누군가 온전한 구성원으로 인정 받기 위해선 군대에 가야 하고 군사 훈련을 받아야 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한국 사회의 만연한 군대 문화가 문제로 지적받는 와중에 이런 식의 주장을 하는 건 아예 군사주의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질문해야 할 것은 왜 남성의 병역은 의무이고 그것이 최선인가이지 왜 남성'만' 군대를 가야 하는가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군인이거나 혹은 군인이었던 사회?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조직 체험을 전 국민이 하는 나라? 정말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인가?

첨언하자면 여성 역시 군대를 간다고 남성과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국가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심지어 여성들은 군대 내부에서조차 차별을 겪었다. 가령 여성 또한 강제 징집으로 정규군으로 입대하는 이스라엘의 경우, 여성 군인은 '켄'(Khen)이라고 불렸다.

이는 히브리어로 매력을 뜻하는데 나라 유발-데이비스에 따르면 이스라엘군 대변인이 이를 두고 여성 군인의 공식적인 임무는 '부대의 사기를 진작하고 군인들을 돌보는 영역'이라고 기술한 적이 있을 정도다. 2000년대 초반 미국의 여성 ROTC를 대상으로 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남성 중심적인 군대에서 생존하기 위해 보수적인 성 역할에 자신을 맞추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여성 군인에 대한 남성 군인의 성추행과 성폭력은 주기적으로 뉴스에 등장해 이제는 생소하지도 않을 정도다.

'여성 징병제'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정 제기해야 할 문제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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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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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에 남성들에게 있어 군인이 된다는 것은 딱히 긍정적인 경험이 아니다. 전역을 해도 문제다. 내게 있어 인생 최악의 공포는 내가 밑바닥까지 추락했던 시절 같은 부대에서 나와 함께 있었던 누군가와 마주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군에 있던 시절 겪은 많은 일들이 상처나 나쁜 기억으로 남은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최선의 선택지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끔찍함에 던져지도록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병역이 반드시 의무여야 하는지를 질문하거나 하다 못해 병영 문화의 전면적인 개혁이 가능한가를 모색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심지어 여성을 징집하는 것이 성평등은커녕 사회에 아무런 바람직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말이다.

청원자가 글의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나 역시도 안보에 대한 걱정이 많다. 하지만 방향은 다르다. 수천억 원 단위로 연일 터지던 방산 비리 사건들을 보라. 총알을 못 막는 방탄조끼와 가라앉지 못하는 잠수함이 군에 보급되었다. 이건 국가 방어 체계에 대한 심대한 위험임과 동시에 국방비 배임 행위이기도 하다. 그 비용이 제대로 집행되어 군의 전문성이 강화되고 체계의 효율성이 확립되었다면 어땠을까.

돈이 그렇게 낭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 예산으로 현행 징병제를 완전히 뜯어고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런 문제를 내버려 두고 여성 징집제를 요구하는 청원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했다는 것이 수치스러울 따름이다. 차라리 자유한국당 당사 앞에 가서 '북핵 위기 와중에 국회 보이콧이라니 무슨 짓이냐'라고 시위라도 해라. 그 편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태그:#군대, #징병제, #평등,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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