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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스톤타운 전경
▲ 스톤타운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스톤타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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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 스톤타운의 머큐리하우스
▲ 머큐리 하우스 잔지바르 스톤타운의 머큐리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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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잔지바르의 중심 스톤타운에 가면 머큐리 하우스라는 곳이 있다. 관광명소가 돼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필수코스이지만 실제 가 보면 별로 볼 것이 없다. 건물만 덩그러니 있고 입구에 머큐리하우스라는 작은 간판과 벽의 액자에 프레디 머큐리가 퀸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 몇 장 걸려있을 뿐이다.

2012년 영국 싱글 차트 60주년을 기념해 '영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곡'을 음반사와 언론사가 공동 조사했다. 그 결과 비틀스가 1위를 차지할 것이라는 많은 이들의 예상을 깨고 록그룹 퀸의 <Bohemian Rhapsody> 가 1위로 꼽혔다. 1971년도에 정식으로 결성해 1973년도 데뷔 이후 15장의 정규 앨범을 낸 퀸은 그야말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밴드 그 이상의 전설이 되었다. 퀸, 그리고 프레디 머큐리는 아프리카의 탄자니아 잔지바르와 무슨 인연일까?

프레디 하우스 바로 앞에 펼쳐진 해변과 바다
▲ 잔지바르 프레디 하우스 바로 앞에 펼쳐진 해변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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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 머큐리는 1946년 영국의 식민지였던 잔지바르에서 영국 총독부 공무원의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파로크 불사라'였다. 집안이나 이름, 외모 등을 볼 때 전형적인 영국인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는 인도 국적을 가졌으며 오래 전 8세기에 이슬람교 교도에 쫓겨 인도로 피신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 신자의 후손이었다.

어린 시절을 잔지바르에서 보낸 프레디 머큐리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인도의 뭄바이로 가서 10년간 기숙학교에 다녔으며 이때부터 영어 프레드릭의 애칭인 프레디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학창시절 프레디는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였는데 당시에는 리드 보컬을 맡지 않고 키보드를 연주했다.

1964년에 잔지바르에서 아랍인과 인도인을 규탄하는 운동이 일어나자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은 쫓겨나다시피 영국으로 이주하였고 프레디는 1969년에 런던의 일링 칼리지에서 그래픽 디자인 학위를 받았다. 이 무렵 영국 시민권을 얻으면서 본명을 인도식 이름인 '파로크 불사라'에서 영어식으로 '프레드릭 벌사라'로 개명했다. 프레디는 퀸으로 데뷔하고 나서 본인의 이름을 프레디 머큐리로 개명하는데 대학시절에는 프레디 불사라라는 이름으로 그냥 썼다고 한다.

프레디는 그의 고향 진지바르 시절의 과거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에 관한 에피소드가 있다. 퀸의 전성기 때 공연 직후 잔지바르 시절의 프레디 동창들이 찾아왔는데 그들에게 알은 체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잔지바르에서의 어린시절이나 인도에서 유학하던 때의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주변사람들에게도 인도식의 본명도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머큐리 우스 벽에 걸려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진들
▲ 머큐리 하우스 머큐리 우스 벽에 걸려있는 프레디 머큐리의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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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큐리 하우스 내부 벽에 걸려있는 사진
▲ 프레디 머큐리 머큐리 하우스 내부 벽에 걸려있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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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디가 고향 잔지바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던 건 1964년에 잔지바르를 통치하던 오만의 아랍 정부가 아프리카 현지의 흑인들에 의해 전복되면서 아랍인들과 인도인들이 대거 재산을 몰수당했는데 프레디 머큐리의 가족들도 인도계였기 때문에 같은 이유로 쫓겨났던 일 때문이라고 한다.

잔지바르에서는 언제부터인가 관광객들 중에서 퀸의 팬들이 "프레디 머큐리가 태어난 집 어디예요?"라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당시 탄자니아나 잔지바르에서는 프레디 머큐리가 그렇게 유명한 사람인지 잘 몰랐다고 한다. 아무튼 프레디 머큐리가 대단히 유명한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자 관광객을 유치하려고 서로들 자기 집이 그가 태어난 집이라고 홍보하거나 알려줘서 실제로 프레디가 태어난 집을 찾기 어렵다고 한다.

실제로 잔지바르에는 머큐리의 집이라고 하는 장소가 여럿 있다. 여러 집에서 머큐리의 집이라고 주장을 하는 데 정확한 곳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머큐리가 진짜 태어난 장소나 살던 곳에 대한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조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잔지바르를 찾는 여행객들도 머큐리의 고향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결국 머큐리의 발자취를 이곳에서 찾으려는 여행객에게는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다.

프레디 머큐리가 어린시절 보았을 집 앞 해변의 일몰
▲ 잔지바르 프레디 머큐리가 어린시절 보았을 집 앞 해변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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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지바르의 무슬림들이 바라보는 머큐리의 이미지도 그리 우호적이지는 않다. 그 이유는 머큐리가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아버지가 식민지 총독부의 영국 관리로 왔기 때문에 진정한 잔지바르 인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가족이 나중에 영국으로 이주하였으며 프레디가 이슬람 교리에 어긋나는 동성애를 한 사실은 잔지바르 사람들의 정체성과 맞지 않다는 것이다.

락 역사상 최고의 보컬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당연히 의견이 갈리지만 락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가 누구의 것이냐는 질문에는 대개 프레디를 처음으로 꼽는 경우가 많다. 45살의 짧은 생을 살다 갔지만 위대한 록음악의 전설을 만들어 냈던 프레디 머큐리는 잔지바르에서의 어린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에이즈로 죽기 전 프레디는 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

'나는 무대에서는 늘 외롭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나의 음악보다도 나의 팬들을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혼자 병마와 싸우고 있는 나의 몰골은 점점 더 왜소해지고 흉해져 간다. 지금 소원이 있다면 팬들은 제발 나의 마지막 죽어가는 모습이 아닌 나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기억 해줬으면 한다. 언제 떠날지는 모르지만 죽기 전까지 노래하고 싶다. 사랑하는 나의 팬들을 위해서.'

스톤타운 머큐리하우스 입구
▲ 머큐리 하우스 스톤타운 머큐리하우스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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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프레기 머큐리, #머큐리하우스, #스톤타운, #잔지바르, #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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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의 니나 또는 슈타인처럼, 여행과 사진 그리고 건축, 머나먼 이베리아 반도의 끝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와 숭산 스님의 선의 나침반, 수타니파타의 그물에 걸리지않는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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