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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12월 개미마을 성탄절에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이 전과자 출신의 신자들에게 영세를 주고 있다. 오른 쪽 하얀 미사보를 쓴 사라 김혜경.
 1967년 12월 개미마을 성탄절에 찾아온 김수환 추기경이 전과자 출신의 신자들에게 영세를 주고 있다. 오른 쪽 하얀 미사보를 쓴 사라 김혜경.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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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스무 살의 가톨릭 신자 '마리아'(세례명)는 술주정뱅이와 전과자들이 모여 사는 동경의 개미마을로 향했습니다. 대학교수의 딸인 마리아는 넝마주이로 살아가는 개미마을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찾아갔지만 아이들은 그녀에게 돌을 던졌고 남루한 옷을 입은 여자들은 "꺼지라!"고 야유를 퍼부었습니다. 가진 이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입니다.

마리아는 개미마을 사람들처럼 누더기 옷을 입었습니다. 넝마 통을 메고 동경 시내를 다니며 폐품을 주었습니다. 거리의 떠돌이 아이들을 데려와 막사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냈고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폐품을 열심히 주웠습니다. 그녀가 어느 날 각혈했습니다. 자신을 돌보지 않은 탓에 건강이 극도로 나빠진 것입니다. 그런데 엎친데 덮인 격으로 개미마을 철거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차라리 나를 스끼야다리 위에 데려다 놓아라. 그곳에서 죽을 것이다."

죽음을 불사한 그녀의 청원서에 놀란 동경시청은 '에다가와'에다 넝마주의 공동체 부지를 내주기로 했습니다. 단, 2500만 엔을 내야한다는 조건을 달아 통보했습니다. 생명이 꺼져가는 마리아는 개미마을 사람들에게 새로운 거처를 마련해달라고 간구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1958년 1월 23일 스물여덟의 꽃다운 나이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체온이 식어버린 그녀의 손엔 묵주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그녀의 일본 이름은 '도시꼬'입니다.

"마리아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1967년 12월 개미마을 성탄절 축하모임에서 사라 김혜경.
 1967년 12월 개미마을 성탄절 축하모임에서 사라 김혜경.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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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마리아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살겠습니다."

스물넷의 사라(세례명)는 국제가톨릭형제회(A.F.I) 교리신학원 수련생이었습니다. 현재의 사직터널 위에 형성된 개미마을에서 1967년부터 봉사활동을 시작한 사라는 이렇게 맹서했습니다. 개미마을은 박정희 정권이 출소자들을 집단 생활하도록 만든 마을입니다. 넝마주이로 사는 이들을 '재건대'라고 불렀는데 개미마을 사람들의 전과는 보통 5~6범 혹은 7~8범 심지어 10범도 있었습니다.

사라는 2년 동안 이들에게 밥을 해주고 폐품 분리작업을 도우면서 가톨릭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죄를 짓고 이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은 험상궂었지만 공손하고 겸손했습니다. 이들은 사라를 선생님 혹은 누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사라는 이들과 남한산성으로 야유회도 갔습니다. 평신도 사도로 살기로 맹세한 사라는 이들과 평생을 같이 할 생각이었습니다.

1977년 난곡동 성당 준공식에 참여한 김수환 추기경과 도요안 신부와 김혜경 사라(오른쪽)
 1977년 난곡동 성당 준공식에 참여한 김수환 추기경과 도요안 신부와 김혜경 사라(오른쪽)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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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야, 너는 이 사람들이 무섭지 않으냐!"

개미마을을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이 사라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뿐 아니라 성직자조차 가까이 하길 꺼리는데 쪼그만 단발머리 처녀가 100여 명의 전과자 틈바구니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기특했던 것입니다.

"무섭지 않고 너무 좋습니다, 이분들은 교리를 진지하게 배웁니다. 그리고 진실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사라의 부탁을 받고 그해 겨울 성탄절에 개미마을을 찾아와 40명의 전과자 신자들에게 영세를 주었습니다. 죄로 얼룩진 이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죄를 뉘우친 이들의 눈물은 맑았습니다. 예수는 죄 없는 척하는 위선자들은 싫어하지만 죄를 뉘우친 사람들은 좋아합니다. 사라는 진실한 이들이 좋았습니다. 그해 개미마을 쓰레기더미에 내린 눈은 희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아낀 평신도 사라, 빈민운동가의 길로 가다!

왼쪽 두 번째 권호경 목사와 김혜경, 한 사람 건너뛰어 박형규 목사와 허버트 화이트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부소장, 한 사람 건너뛰어 오재식 박사.
 왼쪽 두 번째 권호경 목사와 김혜경, 한 사람 건너뛰어 박형규 목사와 허버트 화이트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부소장, 한 사람 건너뛰어 오재식 박사.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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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현장에 들어가 살 사람은 사라밖에 없다!"

개미마을 사람들과 넝마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 사라의 소망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마리아처럼 생명을 다해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로 했던 꿈이 무산되자 사라는 슬피 울었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뜻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그녀를 사회 구조악과 싸우는 운동가로 부른 것입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산업화와 도시화를 급속도로 진행시켰습니다. 가난한 농민들의 이농으로 도시빈민이 형성됐고 생활고가 심각해졌습니다. 부패한 정권은 민중들의 생존권 요구를 억눌렀습니다. 교회의 사회적 참여를 고민하던 박형규 목사와 오재식 박사 등이 도시빈민을 위한 선교단체를 조직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후원으로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가 1969년 만들어지면서 여섯 명의 빈민선교 훈련생을 선발했는데 김수환 추기경이 사라를 추천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빈민운동의 대모가 탄생했습니다. 그녀는 '관악사회복지' 초대 이사장을 지낸 '난곡의 어머니' 김혜경(72)입니다.

빈민운동가 김혜경, 창신동 철거투쟁 승리로 이끌다

1970년 성탄절,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소장 노정현 박사가 창신동 낙산시민아파트를 방문해 '희망탁아소' 원장에게 선물을 전달했다.
 1970년 성탄절,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 소장 노정현 박사가 창신동 낙산시민아파트를 방문해 '희망탁아소' 원장에게 선물을 전달했다.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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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창신동과 청계천 등지의 빈민 20만 명을 경기도 광주(성남)로 집단 이주시켜 위성도시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1969년 창신동에 투입된 김혜경은 산동네 엄마들을 조직해 철거 반대 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엄마와 아이들 700여명이 서울시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서울시청으로 몰려갔는데 100여명이 종로경찰서와 동대문경찰서에 붙잡혀가면서 언론에 대서특필 됐습니다.

서울시는 물론 청와대까지 발칵 뒤집혔습니다. 창신동 관할인 동대문구청장과 종로경찰서장은 좌천됐습니다. 주민들의 조직적 반발에 놀란 서울시와 구청이 협의에 나섰습니다. 공무원들의 회유와 분열 책동이 수차례 있었지만 모두 분쇄했습니다. 그리고 눈물겨운 투쟁으로 건립된 낙산시민아파트 28개동(1동에 48세대)에 98%의 주민이 입주하는 꿈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왜 외국 사람들에게 떠넘기느냐. 우리에게 지원할 돈을 다른 지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우리는 우리 힘으로 해낼 수 있다."

1971년 창신동 주부들을 위한 분식장려 요리 강습하는 모습.
 1971년 창신동 주부들을 위한 분식장려 요리 강습하는 모습.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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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 주민들은 외국 원조를 사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철거투쟁을 통해 깨어난 것입니다. 그들은 서울시에 요구해 탁아소와 지역센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소년들을 위한 야학과 주부교실, 주민 자립을 위한 기술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주민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군 일들에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김혜경은 빈민운동을 통해 이런 신념을 가졌습니다.

'우리 스스로 만들지 않은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1972년 연세대 도시문제연구소를 그만둔 그녀는 박형규 목사가 도시빈민선교를 위해 만든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 스태프가 됐습니다. 여기에는 문동환, 서남동, 이효재 교수 등 민중신학 1세대의 주요 인사들이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1973년 남산 부활절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 등이 내란예비음모죄로 구속되면서 더 이상 활동할 수 없게 되자 김혜경은 난곡에서 빈민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남산 부활절 사건은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부활절 기념예배에서 박형규 목사 등이 민주주의 부활을 외치는 성명서를 발표하면서 독재정권에 맞서 투쟁할 것을 선언한 사건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이를 좌익 용공 사건으로 조작하면서 박형규 목사 등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며 긴급조치를 계속 발동했습니다.

난곡의 어머니 김혜경을 따라 다니는 꼬리표 '빨갱이'

난곡 산동네의 겨울.
 난곡 산동네의 겨울.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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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조직의 귀재였습니다. 난곡으로 이주한 그녀는 '국수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국수를 먹으며 사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로등 달기와 하수도 고치기, 공동화장실 만들기 등 동네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달동네 주민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의료문제였습니다. 돈이 없어 병원에 가지 못하고 병을 키우다 생명을 잃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습니다.

1976년 3월 118세대 조합원으로 출발한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은 순식간에 조합원이 2200세대로 늘었습니다. 이와 함께 신용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청소년 공부방과 글을 모르는 엄마들을 위한 사랑방교실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의 요구로 관악구의원이 돼 주민권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녀는 30년 넘게 빈민운동의 길을 걸으면서 한 번도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덕분에 붉은 꼬리표가 달렸습니다.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 정기총회.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 정기총회.
ⓒ 김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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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간첩, 국제 빨갱이, 국가전복을 획책하는 여자, 뿔 달린 운동권 아줌마….

김혜경의 꼬리표입니다. 정부 당국과 경찰에게 그녀는 눈엣가시였습니다. 그녀의 활동으로 잠든 주민들의 의식이 깨어날 때마다 가난한 이들의 권리주장이 커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보과 형사들은 창신동과 난곡 주민들 그리고 가톨릭 사목위원들을 찾아다니며 "김혜경은 빨갱이"라고 모함하고 이간질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주민들에게 신뢰를 잃지 않았습니다.

"형사들의 모함에 놀란 남편들이 '김혜경이 빨갱이라는데?' 하면 아내들은 '빨갱이가 그렇게 착한 일을 하면 나도 빨갱이가 돼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동네에서 형사들을 만나면 '김혜경이 빨갱이라고? 그럼 우리도 빨갱이다. 잡아가라'고 야단쳤고 형사들은 꽁무니가 빠져라 달아났습니다."

남산 부활절 사건이 터졌을 때는 서울시청 공무원인 남편이 "무슨 자금을 받은 게 있느냐?"고 의심했습니다. 딸은 친구들에게 "너희 엄마 빨갱이라면서!"라는 말을 듣고 울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일은 늘 위험하고 억울했습니다. 가시밭길의 삶이었지만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라는 하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순명(順命) 했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몹시 아팠습니다.

빈민운동의 대모가 드리는 기도, 하늘이여 이들을 굽어 살피소서!

빈민운동의 대모 김혜경 관악사회복지 초대 이사장.
 빈민운동의 대모 김혜경 관악사회복지 초대 이사장.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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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간 빈민운동을 하면서 그녀는 몸을 사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수차례 쓰러졌습니다. 빈민운동의 대모라는 수식어 뒤에는 병고가 서려 있습니다. 1994년에 척추 수술을 했고 2004년과 2014년엔 양쪽 무릎 인공관절 수술을 했습니다. 이밖에도 혈관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2여1남을 둔 그녀는 자녀들에게 미안합니다. 가난한 이웃에게 헌신하느라 자녀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사인 큰딸의 손자를 돌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관악사회복지 후배들에게도 미안합니다. 능력이 없어서 재정적으로 돕지 못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쉽니다.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가난한 사람들 위해 수고하는 활동가들을 축복하소서. 아내와 엄마의 가시밭길을 묵묵하게 지켜준 착한 남편과 자녀들을 살펴주소서."

순명의 여인이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며 기도합니다. 사라의 따뜻한 손에는 묵주가 들려져 있습니다.

▶'관악사회복지' 사무실 마련과 재정난 해소를 위한 '조호진 시인의 활빈(活貧) 프로젝트'에 참여하실 분들은 '관악사회복지' 홈페이지(www.kasw21.or.kr)를 방문하시거나 전화(02-872-8531/070-7568-8531)로 문의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와 후원을 기다립니다.



태그:#김수환 추기경, #빈민운동, #관악사회복지, #김혜경, #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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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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