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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술을 마신 그는 무례했다.
 술을 마신 그는 무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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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사장 바뀌었나 보네(처음 온 손님인데 옛 사장님 이야길 꺼내다니 조금 불안감이 엄습). 내가 여기 동네에서 유명한 사람인데(이런 이야기 하는 사람 치곤 진상 아닌 사람이 없던데... 불안이 더 깊어진다. 역시나 이어지는 말) 옆에 좀 앉아보쇼."
"네? 그냥 옆에 서서 들을게요."
"아니, 30초만 좀 앉아 있어 봐요."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그러면 10초만..."
"저는 그냥 서빙만..."
"아... 씨X... X같이 구네." (이 순간의 이 남성은 나를 한 대 때릴 기세였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매일 겪는 일이다. 앉아봐라, 싫다, 앉아봐라, 싫다. 늘 반복되는 일상... 이제는 그냥 눈 질끈 감고 '똥 밟았다' 하고 넘기려 하는데, 유독 괜찮지 않을 때가 있다. 저 일이 벌어진 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낮에 일하는 시민단체 퇴근 시간이면 쫓기듯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가 다시 집에 휘리릭 들러 불을 켜고 다시 가게로 출근한 지도 이제 거의 두 달이 되어 간다.

매일 이런 진상손님을 만나는 것도 아니고, 배려 깊은 사장님과도 끈끈한 자매애를 맺어가고 있으며, 이젠 나름 얼굴이 익은 손님들과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아르바이트로 시작한 일이지만 소소한 일상의 재미와 감동도 있다. 그런데 가끔 이렇게 모멸감을 느낄 때마다 차곡차곡 서러움이 쌓였나보다.

손님들이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수 있는 나의 위치. 카운터 구석에 앉아 있노라니 그 서러움이 증폭되고 증폭되어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씨X이라고 욕하던 손님은 하하 호호 웃으며 함께 온 지인과 이야기하는 상황. 눈물을 쏟으면 더 억울할 거 같고, 그 사람이 알든 모르든 같은 공간에서 훌쩍훌쩍 우는 건 왠지 지는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내 서러움을 이야기해야 할 것만 같아 SNS를 열어 오늘의 상황을 썼다. 나만의 대나무 숲.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쳐야만 살 것 같은 순간. 내 감정을 쏟아내는 그 공간에 이야길 하고 났더니, 잠시 잠깐 숨이 쉬어졌다.

바로 첫 번째 댓글이 달렸다. 항상 내 SNS를 살펴보고 그 글 안에 담긴 내 감정을 세심하게 읽어주는 나의 동료, 그녀였다. 그녀의 댓글을 읽고 있노라니 꾸욱 참고 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안돼, 안돼... 감정을 추스르고 있는데 그 아래로 친구들이 줄줄이 댓글을 달았다.

씨X1, 씨X 2... 함께 씨X 씨X. 나보다 더 분노해주는 친구들. 그 댓글을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고, 줄곧 나를 괴롭히던 서러움, 모멸감은 눈 녹듯 사라졌다. 퇴근하며 친구들이 보여준 '씨X의 힘'을 생각했다.

"네가 잘못한 거 아니니?" 비수가 되는 그 말

성폭력 피해자를 옥죄는 그 말들.
 성폭력 피해자를 옥죄는 그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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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낮엔 여성단체 활동가, 밤엔 알바생의 이중생활 중)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 며칠 전, SNS를 통해 몇 년째 스토킹을 당하고 있는 여성이 전화로 도움을 요청해 와 직접 만나게 됐다. 그녀는 나름 안전한 공간인 상담소에서도 내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불안한 기색이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는 것 자체를 어려워했다.

따뜻한 물을 한 잔 건네며 '이곳은 안전한 공간이며, 어떤 이야기든 좋으니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보라고,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긴 하지 않아도 좋다며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더듬 자신이 당한 피해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잠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나고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혹시 주변에 도움줄 만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고,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제가 당한 이 피해를 사람들이 공감해 줄까요? 너무 사소해 보이는 거잖아요. 오히려 제가 너무 예민하다고 하지 않을까요?"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하던 익숙한 질문. '제가 당한 이 고통을 사람들이 이해해 줄까요?'

"그럼요. 당신이 얼마나 무서웠을지 짐작할 수도 없지만 저 같아도 두려웠을 거 같아요. 그리고 당신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어느 누구도 판단할 수 없는 걸요. 사소한 것은 없어요."

여느 때처럼 대답해주었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지 않다는 건 그 이야길 듣던 그녀도, 그 이야길하던 나도 알고 있었다. 

"뿌리치고 소리를 지르든 신고든 뭐든 했어야지."
"그럴 수도 있지 그런 일로 유난 떨지마. 네가 예민한 거야."

당신이 언젠가 했던 말들이지 않은가? 실제로 내가 만난 피해자의 대부분은 성폭력 사건 자체로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피해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주변인이 보인 반응에 상처 입는 경우도 많았다.

몇 달 전, 어린 시절 성폭력 피해를 입었던 당시 그녀의 이야길 믿어주지 않던 가족들에게 20년 가까이 고통받다가 상담소를 찾은 여성을 만났다. 

나의 이야길 좀 들어달라며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그녀는 내가 동석한 자리에서 가족들을 향해 내내 울며 이야기했다. 왜 그때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냐고, 나는 내내 미친년처럼 살았다고...

그날의 나를 생각한다. 앉아보라던 그의 말에 내가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앉았고, 이야기를 하던 그가 나의 몸을 만졌다면 그 순간 성폭력 피해자가 되는 거였다. 그리고 성폭력 가해자들이 주구장창 말하는, '먼저 유혹해놓고 피해자 퍼포먼스를 하는 꽃뱀'이 되고 '왜 그 자리에 앉았느냐', '왜 빌미를 줬냐'는 말을 듣는, '그럴 만해서 당한 여성'이 되었을 것이다. 성폭력 피해자는 그렇게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 자신' 혹은 내 곁의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말의 온도'에 대해 생각한다. 말에는 가슴이 담긴다. 그러므로 말 한마디에도 체온이 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야", "많이 힘들었겠다"는 따뜻한 말의 힘. 내가 올린 글 하나에 공감해주며 '씨X'이라는 말 한마디를 보태준 사람들을 통해 위로받고, 다시 힘을 낼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태그:#호프집 알바, #언어의 온도, #성폭력 피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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