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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그대와

팡보체까지의 길은 길었다.

디보체 까지는 카일리 일행을 만나 신나게 괴물 개미처럼 올라갔다. 여럿이 깔깔거리며 오르는 산은 해발 3500m가 넘은들 그냥 뒷산을 오르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디보체에서 고소적응을 하는 친구들을 뒤로한 채 우리는 100m의 고도를 더 올라갔고 3.3km의 거리를 더 걸었다. 앞으로의 일정을 소화하려면 고소적응 시간을 최대한 줄이자는 계획 때문이었다. 

함께 걷던 친구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근 10시간의 산행은 몸을 땅밑으로 끌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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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질질 끌어 팡보체에 도착했다. 이전까지의 롯지에서는 그냥 춥다 추워 정도였다면 팡보체에서부터는 '똥꾸'가 시릴 정도로 춥다(푸세식 화장실에 쪼그려 앉으면 똥꾸가 시리다). 우리는 간단한 저녁을 먹고 롯지의 난로에 모여앉아 수다를 떨었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 고산병으로 죽은 오스트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며칠 전 남체에서 고생을 하고 보니 자면서 죽음을 맞았다는 그의 이야기가 남일 같지만은 않다.

하지만 호환마마보다 무섭고 고산병보다 무서운 것은 와이파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

남체까지 와이파이 환경이 너무 좋았다. 롯지마다 무료 와이파이가 있었고 카페에서 차를 마시면 광랜 와이파이를 이용할 수 있었다. 남체도 꽤 고도가 높은 곳이었기 때문에 더 고도가 높아진다 해도 크게 달라질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오해 금지! 와이파이는 남체 위로 가면 부르는 게 값이고, 날을 잘못 만나면 비싼 와이파이 카드가 무용지물이 돼버린다.

히말라야로 떠나오기 전 남자친구를 이해해보기 위해 그 사람이 영향을 받은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수레바퀴 아래서> 부터 <유리알 유희>까지. 그는 헤르만 헤세를 무지도 사랑했다. 20대에 헤르만 헤세의 전집을 읽고는 아직까지도 그의 시구절을 읊어주곤 한다. 나는 <수레바퀴 아래서>와 <데미안>외에는 접해보지 못했었다. 고르고 골라, 히말라야에는 <황야의 이리>를 가져가기로 했다. 뭔가 히말라야와 어울리는 느낌의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황야의 이리>를 읽을 틈은 나지 않았다.

솔직한 마음으로 틈이야 있었겠지만 친구들과 연락하고 SNS를 하느라 읽을 마음이 들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문명의 이기에서 격리되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매일 저녁 나는 주인공 할러를 만났고 그와 함께 히말라야의 밤을 보냈다.

할러는 헤르미네를 통해 새로운 세계와 자신을 만난다. 유희와 향락의 삶에서 자신의 본 얼굴을 보게 된 할러는 철 지난 옷가지를 벗어던지듯 이전의 삶을 벗어던진다. 아니 벗어던진 것 같다. 소설의 막바지에 이르러 할러는 마술 극장에 초대받는다. 몇 개의 문을 지나 마지막 문을 연 할러는 다른 남자(파블로)와 벌거벗은 채로 바닥 카펫에 누운 헤르미네의 아름다운 나신을 보게 된다. 그녀의 배신을 용납할 수 없었던 걸까. 그는 주머니칼로 헤르미네의 유방 아래 보이는 애무 자국을 깊게 찌른다. 헤르미네의 희고 아름다운 나신 위로 피가 흐른다.

"결과를 회피하다니요! 제가 바라는 건 속죄하고 속죄하고 또 속죄하는 것, 도끼 아래 모가지를 내밀어 벌을 받고 처형당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할러는 벌을 받기를 갈망한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비웃는 표정으로 모차르트는 할러를 쏘아보았다.

"(중략) 그럴 테지! 어리석고 유머도 없는 모든 모임을 자네는 좋아하니까. 자네는 참으로 대단해. 비장하고 위트도 없는 것들에 그리 관심이 많으니. 그러나 나는 그런데는 관심이 없어. 자네의 로맨틱한 속죄에 동전 한 닢 던 저 줄 생각도 없네. 자네는 처형되기를 원하고, 머리가 잘리길 바라고 있어. 자네는 만용을 부리고 있는 거야. 이 터무니없는 소망을 이루려면 열 명은 더 죽여야 될 거야. 자네는 죽기를 바라는 겁쟁이야. 살기를 바라지 않으니. 그러나 자네는 바로 그 삶을 살아야 한다네.자네가 아무리 엄중한 벌을 받더라도, 그건 자네가 당연히 받아야 할 벌이라네."

저자는 죽음으로 죄를 갚겠다는 할러의 로맨틱한 속죄를 한껏 비웃는다. 형을 받기를 갈망하는 할러를 겁쟁이라 조롱한다. 누군가를 상처 준 삶을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속죄라고 말한다.

"자네가 저지른 짓이 아직 충분한 불행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그러나 이제 그런 비장함이나 살인은  끝내야 하네. 이제 좀 정신을 차리게나! 
자네는 살아야 하고 웃음을 배워야 하네. 자네는  인생의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그 뒤에 숨은 정신을 존중해야 하고, 거기서 야단법석을 떠는 걸 비웃을 줄 알아야 하네. 이상이네. 더 이상 자네에게 요구할 건 없네."

연극 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적이고 재현적인 이 대화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인간의 모습에 닿아있다.

모든 책임을 지고 죽어버리는 것. 얼마나 쉽게 문제를 회피하는 방법인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혼자만 쏙 빠질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이지만 쉬운 방법.

하지만 나라고 이 쉬운 방법을 쓰지 않는 건 아니다. 죽음으로 치환하지 않을 뿐 내가 가진 문제들에 대한 자세는 할러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실수에 진지하고 자위적이며 외로움으로 똘똘 뭉쳐 겉모양만 나이를 먹어가는 미생.

이 쉬운 게 없는 삶을 살아내고, 웃음을 배우라니. 무겁게 나를 옭아매고 있는 것들을 훌훌 보내버리고 웃어볼 수 있을까?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어버리는 이중잣대가 과연 웃음으로 승화될 수 있을까?

에베레스트보다 진지한 할러를 매일 밤 만난 덕에 나는 외로움이 더 깊어졌다. 아 왜 하필이면 헤세냐구. 카프카, 조지 오웰, 소세키, 위화, 많잖아! 트레킹보다 연애가 더 힘들다. 아후.

외로움은 그리움을 낳고, 그리움은 서러움을 낳는다

너무나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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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외로움이 끊임없이 밀려와 나를 뿌리부터 흔들어댔다. 걸어도 걸어도 끝은 보이지 않았고 손과 발은 시퍼렇게 꽁꽁 얼어붙어 녹을 틈이 없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체온이 필요했다. 하지만 길 위에서는 오롯이 나의 신체로만 서야 했다. 

로부체로 가는 끝없는 자갈길 위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외로움도 함께 때려맞았다. 흡사 광야와 같았다. 구도자도 아닌 내가 이 광야를 걸어야 한다니. 몸은 로부체를 향해 있지만 마음은 자꾸만 집으로 향한다.

"아빠는 딸을 믿어. 잘 다녀와라." 

출발 전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아빠의 목소리가 귓가에 쟁쟁 울린다.

젊은 시절, 아빠는 어린 딸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기계과를 다니다 해병대를 다녀온 아빠는 무일푼의 신세로 엄마와 결혼했다. 신혼 초, 아빠의 월급은 6만 원, 엄마의 월급은 30만 원이었다.

시간이 많았던 초임 전도사 아빠는 엄마가 출근하기 전 드라이기로 엄마의 머리를 말아주곤 했다. 신혼은 길지 않았다. 곧 딸이 태어났다. 아빠는 목사 안수를 받고 반 빈털터리로 가족을 이끌고 인천에 내려왔다. 개를 키우던 막사에 교회 간판을 세웠다. 개막사에 수도시설은 당연히 없었고 화장실도 아빠가 삽으로 파서 만들었다.

개막사에서 둘째 딸이 태어났다. 온갖 벌레들과 쥐가 들끓는 곳에서 딸 둘은 이점에 걸려 밤낮으로 빽빽 울었다. 아빠는 예배시간에 빽빽거리는 딸들을 쫓아냈다. 엄마는 겨울에도 딸들을 업고 교회 밖에서 서있었다.

재개발로 개막사에서 쫓겨나게 되자 아빠는 조폭들에게 맞서다 크게 다쳤다. 아빠는 입원을 했고 물론 보상도 얼마 받지 못했다. 결국 교회를 동네 상가 지하로 옮겼다.

돈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쌀이 떨어진 날에 엄마는 나를 업고 동네를 돌았다. 동네에서 만난 분들이 쌀도 주고 라면도 줬다. 어느 때는 일주일 내내 라면을 먹었다. 라면만 먹기 질려서 있는 반찬도 넣고 이런저런 풀떼기도 넣어 끓였다. 이때 라면을 하도 먹어서 질릴 만도 한데 아빠는 아직도 라면에 온갖 것을 넣어 꿀꿀이죽처럼 끓여먹는 것을 좋아한다(아빠는 예나 지금이나 찬투정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런 고단한 날들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신학교를 세우고 오래도록 아빠는 딸들에게 애정을 줄 틈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17년 동안 나에게 있어 아빠는 혈연으로 묶여있는 친근한 어른 동거인이었다.

열일곱 살이 되었다. 나는 진로를 정하고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미술학원이 끝나면 10시였다. 집으로 오는 길은 가로등이 적어 컴컴했다. 버스도 다니지 않고 걸어 다녀야만 하는 애매한 위치에 학원이 있었다.

며칠을 혼자 다녀보니 너무 무서웠다. 그렇다고 학원을 옮길 수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아빠는 매일 학원 앞으로 딸을 데리러 왔다. 처음 아빠의 손을 잡고 걸었던 길은 어색했다. 아빠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모습을 보면 왠지 모르게 창피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아빠와 함께 걷는 길은 무섭지 않았다.

가끔 아빠에게 맘이 상하면 데리러 오시지 말라며 어깃장을 부렸다. 그런 날에도 어김없이 아빠는 학원 근처 나무 아래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아빠 손을 잡는데 손바닥에 피가 묻어있었다. 서둘러 오다 넘어질 뻔했다며 아빠는 웃었다. 내 손에 피 묻으니까 다른 손을 잡으라고 했다. 속상하고 죄송하고 그랬는데 별말을 못했다. 그렇게 삼 년을 꼬박 아빠의 손을 잡고 학원을 다녔다. 매일매일 아빠와 손을 잡고 걸었다. 아빠 손은 크고 단단해서 컴컴하고 무서웠던 길은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길이 되었다.

15년이나 지났는데도 아빠는 종종 이때 이야기를 한다. 삼 년 동안이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마중 오던 시간이 아깝지 않으냐는 딸의 질문에 아빠는 서운한 투로 짧게 대답했다.

"아빠는 삼년 내내 딸 데리러 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기다림과 사랑은 동의어라고 했던가. 나는 꼬박 삼 년을 아빠의 사랑 위에서 걸었다.

"아빠의 손을 잡고 걷는다면, 이 자갈 길도 삼청동 돌담길 같겠지.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도 겨울을 담은 서늘한 바람이 되겠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광야가 아닌 산책길이 되겠지.그렇지요 아빠."

젊은 날의 아빠는 애정을 표현할 줄 몰랐고, 딸들이 성장할 때는 애정을 표현할 시간이 없었다. 이제 아빠는 애정을 표현할 여유가 생겼는데 딸들이 훌쩍 커버리자 딸들은 아빠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사춘기의 딸들은 예민했고 아빠를 불편하게 생각했다. 성인이 되기 전 큰 딸은 유학을 떠났고 작은 딸은 성인이 되자 집을 나왔다.

학교는 신촌, 통학이 불가능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길에서 몇 번 고꾸라지고 나니 통학이 어려워졌다. 어린 딸의 자취생활이 걱정스러웠지만 아빠는 작은딸과 엄마에게 백기를 들었다. 딸은 자취를 시작했다.

그리고 아빠는 10년 동안 딸의 집에 가보지 못했다. 자기 공간에 사람을 들이지 않는 딸의 지독한 성미 덕이었다. 발아래에 펼쳐진 자갈길은 아빠가 간판을 세운 개막사가 있던 벌판 같다. 아빠도 이렇게 막막하고 두려웠을까.

삼년 내내 마중을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렸던 적이 있던가. 그 시간 덕에 생각보다 나는 아빠를 많이 닮은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늘 그 자리에 계셔주셔서 감사하다고, 앞으로도 오래도록 나의 뿌리가 되어주셨으면 한다고 말해야 하는데.

눈물 콧물 훔치다 보니 더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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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한테 쫓겨나더라도 엄마 등에서 빽빽이던 그 때로 돌아가고 싶다. 누군가의 등에서 막막한 들을 밟지 않고 서고 싶다.  중얼중얼. 비 맞은 중처럼 중얼거리며 걸었다. 걸어야지 별 수가 있나. 지금 이곳에 나는 혼자인 것을.

"아빠는 딸을 믿어."

다시 귓가에 쟁쟁 울리는 아빠의 목소리. 아빠는 나를 믿는다. 바람에 금세 말라버리는 눈물을 꿀꺽 삼켰다. 야속하게 아름다운 풍경을 한 눈 가득 담고 걸었다. 곧 로부체가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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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C, 약속은 지키는 거예요

로부체의 롯지는 따듯했다. 이상하리만치 햇살이 잘 들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서럽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잘 쉬고 추슬렀다. 사실 해발 5000m가 넘어가니 외로울 틈조차 없다. 산소가 적어지니 실제로 뇌를 쓰는 게 잘 되지 않았다. 외롭다 그립다 서럽다며 일기와 그림을 끄적이던 밤이 어쩌면 좋은 밤이었다.

고락셉에서 짐을 놓고 EBC로 가는 가장 중요한 일정이 시작됐다. 크라우드 펀딩에서 약속했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오르는 내 모든 일정의 클라이막스 같은 날. 근데 아무 생각이 없다. 고락셉까지는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고락셉.
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다.
바위와 모래 길이 합쳐진 길
오르막이 끝없이 이어진 황량한 길 위에서
그저 땅만 보고 걸었다.
양손에 쥔 스틱에 기대 걷고 또 걸었다.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오고 또 그 고개를 넘으면 또 다른 고개가 나오고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고갯길이 끝나고 멀찌감치 보이는 작은 마을.
10가구 남짓한 작은 마을에는 산을 오르는 여러 나라의 젊은이들과
그들을 이끌어주는 셰르파가 있다.
숙소를 몰라 한참 동안 고락셉 마을 어귀를 서성인다.
여기는 해발 5100m."

일기를 꺼내보니 아마 엄청 힘들었는가 보다. 뇌의 산소가 부족해지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도 고산병의 증상 중 하나다. 그 당시에는 고산병이 없었다고 장담을 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지만 고락셉 등반에서 써놓은 일기가 있다는 사실조차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런데 고락셉에 짐을 놓고 EBC 가는 길은 또 생각이 난다는 것.(뭐지. 거기가 거긴데?)

해발 5000m가 넘자 걸치고 있는 옷 만으로는 추위를 견딜 수 없어졌다. 1000m의 고도마다 6도씩 떨어진다고 하니 지면과 30도 가까이 차이가 난다. 그러나 나는 준비성이 철저한 녀자가 아니던가! 오리털 내피와 바람막이 위에 추위를 대비해 가져온 스키복을 덧입었다.

오리 털이 빵빵하게 들어있는 스키복! 내 이날을 위해 준비하였찌! 아하하. 나갈 차비를 차리며 옷을 입으려고 보니 자크가 이상하다? 어? 아 왜 또. 왜! 파카는 자크를 위아래 양쪽으로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 나름 인체공학(?) 적인 구조였다. 그런데 뭐가 문제인지 지퍼를 채워 아래서 위로 올리면 자크도 따라 열렸다. 하지만 난 당황하지 않지. 영혼까지 끌어모아 자크를 위로 올렸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 잠갔다. 됐어! 얇은 장갑 위에 두꺼운 장갑도 착착 끼고 모자도 쓰고 여유롭게 EBC로 출발!

"칼바람이 양싸다구를 내리친들 어떠하며 콧물이 고드름이 된들 어떠하리. 나는 이같이 완전 무장을 했음이라."

그런 줄 알았다.

EBC로 가는 길은 돌무더기 길이었다. 뾰족하고 메마른 돌덩이들이 가득 한 곳을 라마즈 호흡을 하며 걸었다. 그런데 걸을 때마다 자크로 여민 옷이 풀어헤쳐졌다. 처음에는 목에서부터 가슴팍 정도까지 풀어지던 것이 조금 가다 보니 제일 아래 자크 머리만 남았다. 이 추운 날씨에 앞섶을 훤히 열고는 EBC를 오르는 강인한 녀자. 그래. 강하게 자라나자. 아니 강하게 늙어가자. 어차피 인생 독고다이지! 아예 자크를 풀어버리고는 걸었다. 찬 바람이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재차 언급하지만 나는 강한 녀자다.

그런데 이번에는 장갑이 말썽이다. 오기 전 등산인들의 드림몰 5케2몰에서 구입한 독일 정통 아웃도어 브랜드 잭울프스킨의 삼손 패딩 장갑. 엄청 따듯하게 생겨서 이번 등산에 분명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얇은 고어텍스 장갑만 가져온 형석이를 나무라대며 두꺼운 스키장갑을 구입하게 했다. 그리고는 장갑자랑을 해댔었다.

"누나 장갑 봐! 이 정도는 돼 줘야지! 히말라야에 온 사람이 말이야!"

그렇게 자랑을 해쌌던 장갑이. 겉은 멀쩡하고 뻔지르르 했던 장갑이 내 손가락을 옥죄이고 있었다. 오기 전에 착용해봤을 때는 괜찮은 것 같았는데 손가락으로 힘을 쓰며 스틱을 쥐고 걸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오래전 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전기 놀이를 했었다. 주먹을 쥐고 손목에 있는 동맥을 꽉 누르면 피가 통하지 않고 손이 하얘진다.

손을 펴고 몇 초 있다가 손목 동맥에서 손을 떼면 전기가 오른다. 전기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쥐가 난 거겠지만. 여하튼 독일 정통 브랜드 잭울프스킨이 내 손가락을 꽉 누르며 전기 놀이 중이었다. 잔인한 녀석. 힘센 이 놈은 손가락을 점점 더 세게 조여왔다. 나는 강한녀자다. 독일의 탈을 쓴 중국의 잭 이리 스킨 따위에게 질수야 없지. 오기를 부려봤다. 손꾸락을 짤라야 할 것 같은 고통이 느껴지자 더 이상 장갑을 끼고는 걸을 수 없었다. 강한녀자는 장갑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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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녀자는, 앞섶을 풀어헤치고 얇은 여름 장갑 하나로 해발 5200m를 당연히 넘을 수 없었다. 추운데 바람까지 부니 손가락이 부러질 것 같았다. 온몸에 찬기가 들어 덜덜 떨며 걸었다. 짓은 콧물을 킁킁거리며 댓 사발 마셔대는 나를 걱정스럽게 보고 풀어헤친 앞섶을 몇 번이고 잠가주었다. 형석이도 별말 없이 고어텍스 장갑을 벗어주었다. '나는 왜 이럴까?'라는 자기반성은 에베레스트에 올라온 후 매일 탑재되는 옵션 같다.

오늘도 히말라야 산 위에 민폐를 흩뿌렸다. 오늘 못 가면 평생 EBC 근처에 또 올 수 있을지 모르니까 민폐에 대한 본격적인 사과는 다녀와서 해야지. 고락셉의 롯지에서부터 따라오며 꼬리를 신나게 흔들어대는(진정 즐길 줄 아는 당신이 챔피언!) 강아지들을 돌아 볼 새도 없다. 뜨슨 콧물을 드링킹하며 걷고 또 걷기를 반복하다 보니 EBC에 도착했다.


태그:#히말라야, #이타, #기부, #에베레스트, #기부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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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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