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승완 감독 영화, 10편째 보다

<군함도>를 봤다. 지금까지 나는 류승완 감독 영화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부터 <다찌마와 리> <피도 눈물도 없이> <아라한 장풍대작전> <주먹이 운다> <짝패>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부당거래> <베를린> <베테랑>까지 봤고, 이번에 <군함도>가 10편째였다. 한 편 빼고는 모두 극장에서 봤다.

영화는 영화를 떠오르게 만든다. 류승완 감독 영화는 더 그런 편이다. 그래서 본다. <군함도>도 마찬가지였다. '저기도 조선인들이 많이 사는 곳인데' 정도의 대사쯤에서는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이 떠올랐다. 아니, 그보다는 <장군의 아들> 식의 영화를 기대하면서 <개벽>을 봤을 때 들었던 그 기분에 더 가까웠다. 영화의 인상이 그랬다.

이강옥(황정민)은 <인생은 아름다워>의 귀도보다 현실적이었고 동시에 자식을 그 곳에 가게 만든 원죄가 있는 '아빠'였다. <여명의 눈동자>의 여옥과 최대치가 그 섬에 들어갔다면 칠성(소지섭)과 말년(이정현)이 됐을 것이다. 캐릭터의 부분적인 사연들이 그랬다.

그런데 류승완 감독 영화는 내용이나 캐릭터보다 배우들 때문에 다른 영화들이 더 기억나게 만든다. <베테랑>의 정웅인은 강우석 감독의 <전설의 주먹> 캐릭터를 뒤집어 연기한다. 그래서 더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이 연상된다. <베를린>의 한석규를 보고 강제규 감독의 <쉬리>를 떠올리는 건 당연했다. 이외에도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김영인, 백찬기, 송경철 등은 류승완 식의 <영웅본색2> 적룡과 석천 캐스팅처럼 보였다. <짝패>에서 류승완을 보고는 배창호 감독의 <러브 스토리>처럼 하고 싶은 걸 하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군함도>와 황정민은 <설국열차>를 떠오르게 했다. 이제 리뷰를 시작한다.

 영화 <군함도>

영화 <군함도> ⓒ CJ 엔터테인먼트


류승완과 황정민, 봉준호와 송강호

<군함도>와 대응점이 가장 많은 영화는 <설국열차>다. 당장 <설국열차>의 봉준호와 송강호, <군함도>의 류승완과 황정민이 그렇다. 배우와 감독이 세 번째 만난 작품들이다.

거기까지 가는 과정도 여러모로 대응한다. 감독과 배우들이 처음 만난 <살인의 추억>과 <부당거래>는 전환점이었다. 시답잖은 소동을 과장한 감독, 허술한 드라마를 액션으로 특화한 감독의 영화로 더는 보이지 않게 된다. 상징은 그대로 난무했지만 리얼해 보였고, 액션은 여전했지만 드라마의 부가재료처럼 여겨졌다. 재회한 <괴물>과 <베테랑>은 정점이 됐다. 서로의 여름이 지나자 관객은 두 감독을 천만감독이라 불렀다. 세 번째 만나자 네 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많은 제작비가 투자됐다. 개봉 전 기대치는 극점이었다.

<설국열차>와 <군함도>의 연결선은 영화 안에 더 많다. 한국 배우여도 됐을 <설국열차>는 외국 배우들로 채웠고, 외국 배우면 더 좋았을 <군함도>는 한국배우들로 메워졌다. 뫼비우스 띠 같다. 꼬리 칸과 다다미방, 남궁민수 부녀(송강호-고아성)와 이강옥 부녀(황정민-김수안), 길리엄(존 허트)과 윤학철(이경영), 횃불과 촛불은 어떻고. 게다가 꼬리 칸의 '프로틴 블록' 재료가 이강옥이 섬에서 처음 배식 받은 국물에서 기어 나온다, 우연이겠지만.

 영화 <설국열차>

영화 <설국열차> ⓒ CJ 엔터테인먼트


그것들은 열차와 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두 공간을 연결하면 전부 귀속된다. 영원히 정차하지 않아서, 따로 떨어져 있어서, 열차와 섬은 폐쇄됐다. 폐쇄공간을, 두 영화는 똑같이 이야기한다. 폐쇄된 공간 밖으로 사람들이 나갈 때 영화들은 비로소 끝난다.

폐쇄된 공간, 두 감독 영화들에서 새삼스러운 환경이 아니다. 둘의 영화는 언제나 폐쇄된 상황에 사람들을 두었다. 보이지 않는 경계, 삶의 경계가 둘러져 있었다. 그렇게 보면, 열차와 섬은 기존 공간들과 다르다. 물리적인 경계로 완벽하게 폐쇄된 공간이 두 감독의 영화 세계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설국열차>와 <군함도>는 폐쇄 상황을 공간으로 명확히 했다. 두 영화는 두 감독이 에둘러 말하지 않는 영화일 수도 있다.

열차와 섬은 감독들의 영화들을 닮았다. 봉준호 영화는 <지리멸렬>부터였다. 아무리 시끌벅적한 상황으로 홀려도 시작과 끝이 달라진 게 없었다. 류승완 영화들은 <패싸움>부터였다. 가만있으려는 사람도 환경이 옭아맸다. 그리 보면,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자리로 돌아가는 열차는 봉준호 영화에,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섬은 류승완 영화에 선택될 수밖에 없었다.

<설국열차>와 <군함도>는 빈자리 문제를 꼭 닮은 인물들로 해결한다. 빈자리를, 열차는 만들어야 하고 섬은 없애야 한다. 각 공간은 길리엄과 윤학철로 빈자리를 통제한다. 기이한 건 두 영화 모두 두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바꿔 말하면 둘만 제거하면 공간이 열려야 하는 영화의 반동인물이다. 그런데도 반동의 서사가 있던가. 없다. 기능만 있다.

얼마나 무심한지 보자. <설국열차>에서 길리엄의 실체는 극중 인물들에게 공표되지도 않는다. <군함도>에서 윤학철의 비밀이 밝혀졌을 때 그를 제거한 건 그에게 휘둘렸던 자들이 아니다. 외부자 박무영(송중기)이다. 길리엄과 윤학철은 부품인 거다, 공간이 폐쇄를 유지하기 위한. 그러니 관객은 길리엄과 윤학철의 행태를 보는 게 아니다. 그렇게 작동하는 부품이 길리엄과 윤학철이었던 시기의 공간들을 관객은 엿보는 것이다.

영화들은 반동인물들보다 다른 곳을 가리키는 데 주력한다. 거기서 두 영화는 달라진다. 사람들이다. 그 공간에 사람들이 들어간 이유, 두 영화의 확연한 차이다. 그 차이 때문에 <설국열차>는 열차를 비추고, <군함도>는 섬의 사람들을 따라간다. <군함도> 쪽 이야기가 더 빨리 느껴졌다면 그 차이다.

<설국열차>, 폐쇄공간을 비춘다

<설국열차>의 '모든' 사람들은 빙하기를 피해 자발로 그 안에 들어갔다. 그래서일까. <설국열차>의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들에게는 열차에서 벗어나려는 개념이 없다. 그들에게 '열차 밖'은 이동할 수 없는 공간이다. 레일에 박힌 생각, 그들은 당연히 앞 칸으로 전진하려고만 욕망한다. 영화는 그들을 따라가며 열차를 탐색한다. 커티스들이 칸을 이동할 때마다 명확히 다른 콘셉트의 공간들이 나타난다. 커티스들의 욕망은 전진할수록 점점 실현된다. 가자, 앞으로, 동력 칸으로.

이미 많은 이들이 해석했듯 또는 봉준호의 영화가 그러했듯, 어쩌면 커티스들의 이동 과정은 맥거핀이다. 관객은 커티스들과 함께 앞 칸으로 이동하다가 수상한 자들을 만난다. 남궁민수 부녀, 이들은 뭐란 말인가, 마약에나 절어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들은, 자자, 전진이다. 드디어 동력 칸에 도착한다. 거기서 우리는 아이들을 찾는다. '살아 있는 부품'을 본다. 그 순간, 길리엄도, 그를 숭배하던 꼬리 칸 사람들도 그 아이들처럼 부품이었다는 걸 커티스와 관객은 안다. 이미 알았으므로 되돌릴 수 없다. 아, 우리는 더 이상 전진할 수 없다.

 영화 <설국열차>

영화 <설국열차> ⓒ CJ 엔터테인먼트


동력 칸에서 새로운 수장 커티스가 좌절할 때에, 기존 수장처럼 폐쇄공간에 종속되도록 강요받는 순간에, 끝점이 원점이 될 수도 있던 그 시점에, 부녀의 수상함은 풀린다. 열차 안에서 전진하던 커티스들과 수상한 부녀는 서로 대비된다. 대비되자 비로소 부녀의 숨은 말이 관객에게 들린다. '거기, 어차피 같은 곳이야.' 영화가 내내 비춘 다른 콘셉트의 공간들은 그래봤자 열차의 1/n. '왜 열차 밖으로는 향하지 않지?' 그러게, 왜 바깥으로 안 나갔을까? 관객이 부녀의 질문에 반응할 때쯤, 공간의 규칙을 바꾸려던 커티스가 사라지고, 열차가 전복되고, 문이 열린다. 드디어, 새로운 공간이다.

<설국열차>가 새로운 공간에 목적을 둔 것 같진 않다. 관객은 '코카콜라 곰'을 만나는 게 다니까. 그렇게 보면, 수상한 부녀의 역할은 앞으로 가봤자 동일한 공간이라고 관객에게 상기시키는데 있다. 부녀는 어떻게 열차를 벗어날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예언자들처럼 마약을 끊임없이 흡입한다. 그러고 보면 <매트릭스>의 앤더슨도 약을 먹고 네오가 됐더랬지. 아, 열차 밖을 생각하는 건 열차 안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하구나.

 영화 <설국열차>

영화 <설국열차> ⓒ CJ 엔터테인먼트


<설국열차>는 공간이 사람을 지배하는 데 주목한다. 사람은 그 열차에서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열차는 사람의 의지로 전복된 게 아니다. 눈사태 때문이다. 피비린내 나는 전진이 없었더라도 열차는 전복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국열차>는 종속변수인 사람들이 아니라 독립변수인 열차를 탐색한다. 탐색을 마친 후, 그 부조리한 공간 안에서 해법을 찾을 수 있겠는지, 관객에게 되묻는다. <설국열차>는 답을 내놓지 않고 자기 문제를 관객에게 넘긴다. 너구리 같으니라고.

<군함도>, 폐쇄공간의 사람을 따라간다

약육강식의 규칙에 따라 순조롭게 순환하는 폐쇄된 세계. 섬은 류승완 세계의 축소판이다. <군함도>도 그렇고 류승완 영화들의 세계는 봉준호 영화들보다 폐쇄성의 이치가 더 분명했다. 분명한 만큼 제3자의 눈에는 봉준호의 것들보다 탈출로가 보였다. 퇴로의 가능성은 류승완 세계에서도 부정하지 않는다. 상환(류승범)이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에서 평행세계인 <주먹이 운다>로 넘어갈 때 더 느슨한 방법으로 경계를 넘어서지 않던가.

그런데도 류승완의 인물들은 대개 물러서지 않는다.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되, 가로질러 가려 든다. 예컨대 <짝패>의 태수(정두홍)와 석환(류승완)이 장필호(이범수) 무리 안으로 진입해야 할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베를린>의 표종성(하정우)은 영화가 끝났는데도 기어이 그 중심을 관통하려고 한다. 후속편을 예고한 게 아니라 그렇게라도 중심으로 들어가야 하는 류승완의 고집처럼 보였다. 그게 가능한 이유? 류승완의 인물들은 육체적으로 늘 강하기 때문이다.

 영화 <군함도>

영화 <군함도> ⓒ CJ 엔터테인먼트


그 대목에서 <군함도>의 인물들은 낯설다. 육체적으로 약하다. <군함도>와 동시대에 있는 <다찌마와 리>와 비교해보라. 심지어 <군함도>의 인물들은 기존 류승완 영화에서라면 죽어야 할 인물들이다. 기존 세계에서는 규칙에 적응하면 죽었다, <부당거래>의 최철기(황정민)처럼. 그러나 <군함도>의 그들은 공간이 자신들을 당기자 그 규칙에 곧바로 적응한다. 칠성(소지섭)조차 금세 '오야'가 되어 섬의 구조에 편입된다. '다찌마와 리'(임원희)가 현실에 들어오는 꼴을 우리는 보고 만다.

그래서 드는 의문, 왜 약한 자들이어야 하는가? 적응한 자들이 무엇 때문에 탈출을 시도할 수 있는가? <군함도>는 저 약한 이들을 막힌 공간에 밀어 넣고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군함도>는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이유로 섬에 있는 게 아니다. 그 중에서 강제로 섬에 들어간 사람들을 영화는 주로 따라간다. 그들에게 '섬 밖'은 가고 싶은 공간이다. 영화는 먼저 그걸 알린다. 영화의 시작, 소년들이 탈출을 시도한다. 막장 탄광, 세 소년들, 목침 하나, 망망대해, 그물, 수장, 일제 군가, 그리고 영화제목으로 이어진다. 연속된 이미지들은 이강옥 부녀들이 앞으로 가게 될 공간의 성격을 미리 설명한다.

 영화 <군함도>

영화 <군함도> ⓒ CJ 엔터테인먼트


그러고 나서, 영화는 이강옥 부녀를 따라간다. 그들과 한 배를 탄 사람들은 섬에 대한 풍문을 듣는다. 전쟁터에 나가는 것보다 낫다-더라, 몇 년 고생하면 거금을 모을 수 있다-더라. 그러면서 그 자리에 경성제국대 학생 오장우(장성범)를 영화는 놓아둔다. 무지해서 그런 풍문에 기댄다, 그런 오해를 영화는 오장우를 통해 차단한다. 관객은 이미 섬의 실체를 알고 있으니, 그들이 가여울밖에. 가여운 자들과 함께 영화는 그 지옥으로 다시 들어간다.

도착한 그들은 섬의 규칙에 따라 노역자가 된다. 그리고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중 하나가 되어 폐쇄공간을 순환시킨다. 섬 안에서 죽는 자는 약해서다. 도입부 막장 장면, 어른들은 몸집 작은 아이를 채근하고, 아이는 <설국열차>의 '살아있는 부품'처럼 막장 안으로 들어간다. 그 공간에서 죽는다는 건 역시 약해서다.

그런데 죽음을 각오한 자들이 있다. 영화 시작의 탈출 소년들이다. 그러니까 이강옥 부녀들이 섬에 도착하는 과정은, 그 소년들이 어떻게 그 섬에 갔는지를 거꾸로 설명한다. 소년들의 죽음과 이강옥 부녀들의 도착 장면이 붙는다. 그렇게 섬은 빈자리를 새로 채운다.

<군함도>의 '모든' 사람들이 그 섬에서 탈출하려는 건 아니다. 그 공간이 왕국인 자들은 계속 폐쇄되길 바란다. 다이스케(김인우), 야마다(김중희) 등 관리자들이나 송종구(김민재) 무리들처럼 2등 국민들이 그렇다.

특히 2등 국민들에 대한 반감은 류승완 영화에서 줄곧 표현되던 것들이다. <다찌마와 리> 인터넷판과 극장판은 너무 노골적이라서 되려 B급 지향의 오락영화로 보인다. <부당거래>의 주양(류승범)과 최철기(황정민)는 <군함도>에 그대로 들어와 앉으면 된다. 영화 속 권력자들이 수시로 사용하는 그들만의 언어, 일제식 요정, 복종 행태가 그렇다. 그런 입장을 <군함도>에서도 명확히 한다. 송중구와 그보다 더 강한 최칠성을 대비시키고 둘을 끝까지 좇는다. 영화의 전언, 그런 건 적응이 아니다, 그냥 나쁜 거다.

그런데 또 있다. 일반 거주자들, 그들은 폭격 직후에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잠깐, 이상하지 않은가, 일반 거주자라니? 그들은 류승완 세계가 새롭게 주목한 이들이다. 영화가 이강옥들을 따라 다시 섬으로 들어왔을 때 우리들은 그들을 목격한다. 교복 입은 학생들이 불현 듯 나타난다. 그들이 왜 거기 있는지 설명은 없다. <설국열차>로 치면 앞 칸 사람들일까? 답부터 말하면, 아니다.

그들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그때까지 영화가 보여줬던 섬은 약육강식에 따라 작동하는 공간이었다. 그 이치가 순조롭게 작동하려면 그 곳에는 지배자인 관리자와 피지배자인 노역자만 있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거주자라니. 지옥도 왕국도 아닌 일상터전이라니. 그 곳이 사람 사는 곳이었다니. 그들이 섬의 성격을 하나 더 부여한다. 섬은 사람에 따라 왕국이고, 지옥이며, 일상이기도 하다.

거주자들은 기존 류승완 세계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인물들이다. 그런데 <군함도>는 관객이 꼭 발견하도록 골목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까지 보여준다. 기껏 그래놓고 막판에 두루뭉술하게 거주자들을 관리자들과 합류시킨 건 편집의 패착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설국열차>의 앞 칸 사람들과 다르니까.

 영화 <설국열차>

영화 <설국열차>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군함도>

영화 <군함도> ⓒ CJ 엔터테인먼트


<설국열차>를 보자. 칸이 나뉜 열차에서 앞 칸과 꼬리 칸은 서로 볼 수 없다. 더 나은 어딘가의 존재, 그렇게 욕망될 뿐이다. 볼 수 없는 앞 칸이 꼬리 칸에게 욕망의 대상이고, 커티스들은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전진한다. <군함도>를 보자. 칸이 없으니 섬에서는 노역자가 거주자를 볼 수 있다. 섬의 거주자는 앞 칸 사람들처럼 더 나은 무언가를 누리고 있는 게 아니다. 노역자의 본래 위치일 뿐이다. <설국열차>의 커티스들이 더 나은 삶을 향한다면, <군함도>의 이강옥들은 그저 원상태로 복원하기 위해 섬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노역자도 관리자도 아닌 거주자들이 있기 때문에 <군함도>는 <설국열차>와 다른 이야길 하게 된다. 공간 안에서도 밖을 생각할 수 있다. 커티스가 섬에 있었다면, 앞 칸을 향하지 않고 벽을 향했을 터다.

다만 <군함도>의 노역자들은 영웅도 뭣도 아니다. 류승완 세계에서 가장 약한 자들이지 않은가. 무작정 밖으로 나갈 수 없다. 공간 밖으로 나가기 위해 <설국열차>의 커티스들에게 개념이 필요했다면, <군함도>의 이강옥들에게는 의지가 발현될 방아쇠가 필요했다. 외부 유입된 광복군 박무영(송중기)은 방아쇠가 된다.

<군함도>의 박무영은 <설국열차>에서 사람을 이끄는 커티스와 다르다. 그는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한다. 이강옥과 오장우가 나선다. 그제야 진실이 드러난다. 사람들이 움직인다. 그러나 탈출계획은 실패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간다. 철판 부교를 들쳐 올린다. 맞서 싸운다. <설국열차>에서 꼬리 칸 전원이 문을 뜯어내는 셈이다. <군함도>가 시작하면서 이미 내려놓은 결론을 향해, 영화는 감정을 제어하지 않고 더 거칠게 더 처절하게 더 뜨겁게 막바지를 향한다. 그리고 영화 시작과 끝이 붙는다. 배에서 던진 그물에 수장된 막장 소년들, 배에 올라타고 섬을 벗어나는 사람들.

<설국열차>와 달리 <군함도>는 답을 내놓는다. 부조리한 공간의 중심을 가로질러 베어나가는 것, 약육강식의 공간을 전복시키는 것, 류승완 세계가 추구하던 그 답이다. 대신 이번에는 약자다. 약자들은 원래 생활로 돌아가고자 한다. 약자에게 딱 맞는 그 수수한 바람. 그 바람이 만든 연대. 그게 <군함도> 고유의 답이고, 류승완 세계에서 처음 보는 행동이다. 군중액션이, 류승완의 장기였던 격투액션보다 더 인상적인 이유다. 관객은 늑대 무리 같은 영화를 보게 된다.

2017년 봉준호와 류승완

<군함도>와 <설국열차>만 그런 게 아니다. 봉준호와 류승완, 두 감독은 묘하게 대응한다. 둘은 2000년에 장편영화 감독으로서 관객 앞에 등장했다. 2017년, 6번째 장편 <옥자>와 10번째 장편 <군함도>가 개봉했다. 둘의 영화가 같은 해 개봉한 건 4번째였고, 같은 계절인 건 처음이었다.

 영화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 CJ 엔터테인먼트


봉준호는 <옥자>를 VOD 서비스 콘텐트로 투자받았다. 17년 전, 이미 류승완은 <다찌마와 리>로 그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9년 전 극장판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처럼 <옥자>는 극장관객이 100만 명도 들지 않았다.

류승완의 <군함도>는 2017년 7월 26일 수요일에 개봉했다. 봉준호의 <괴물>이 개봉한 지 정확히 만 11년째가 되는 날이었다. 11년 전 <괴물>처럼 <군함도>도 타 감독의 '저격'을 받았으며 스크린 독점이라는 언론의 집중 포화를 받았다.

2017년 여름, 둘은 무기력했다. 필름을 사랑한다는 감독 봉준호의 영화는 정작 한국 체인극장들에게 외면당했다. 봉준호 연출작이 CGV, 롯데시네마, 메가박스에서 보이콧 당하다니. 관객 입장에서 상영관을 배정한다던 그 주옥같은 원칙은 어디 갔는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옥자>는 그것까지도 봉준호 영화의 연장이다. 봉준호의 <옥자>는 열차의 문을 연 결과물이었다. 한국영화 제작 공간이 아닌 곳, 더 나아가 기존 영화 배급 공간이 아닌 곳, 새로운 공간에서 만들어진 영화니까. 그래서 봉준호에게는 예상 범위를 빗나간 정도였을 것이다.

'군함도' 류승완 감독 영화 <군함도>의 류승완 감독이 2일 오전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류승완 감독 ⓒ 이정민


류승완이 겪은 일은 더 참담했다. 타국 극우 세력과 각을 세우던 영화는 한국 네티즌에게 개봉일 자정부터 1점 몰표를 받았다. 댓글 집단 지성을 영화에서 경험할 줄이야. 역시나 아이러니. 류승완의 <군함도>는 자신의 영화들처럼 환경이 옭아맸다. 예상할 수 없는 범위에서 일어난 일이니 류승완은 '성빈'으로 돌아간 기분일지도.

그렇다 해도 그가 영화계 협회들을 탈퇴한 소식에 다소 의아했다. 이후 인터뷰들을 보고 의아함은 수상함으로 바뀌었다. 기자들이 글자로 정리했을 터인데도 이 사람이 한국을 떠나려는 건가 싶을 정도로 흔들림이 느껴진다. 괜히 불안하다. 잠깐, 류승완의 영화들은 그 중심으로 들어가지 않았던가. 그저 류승완의 인물들은 류승완의 이상형이었던가. 류승완 감독은 제 영화들처럼 구조의 중심을 관통해 나가야 한다. 당신 영화의 악당이 우리에게 한 말이다. "강한 놈이 오래 가는 게 아니고 오래 가는 놈이 강한 거더라." 받아치시라.

군함도 류승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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