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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4박 5일간 '2017 대학생 나라사랑 역사탐방'을 실시했습니다. 전국의 역사학과 및 교육대학교 재학생 30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일본 가나자와·도쿄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 등을 둘러보고 한·일 양국의 역사청산과 화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탐방 간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탐방 수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 5부 '천황 사는 데서 사진 찍자, 호루라기 불며 쫓아온 일본'에서 이어집니다)

일본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4박 5일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떠나야 하는 우리들의 아쉬운 마음을 하늘도 알았던지, 이날은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도쿄 신주쿠(新宿)의 옛 이치가야(市谷) 형무소 터를 찾아가는 것으로 일본에서의 마지막 일정을 시작했다.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됐던 '이치가야 형무소'

'도쿄감옥'으로도 알려진 이치가야 형무소는 도쿄 지역의 사형수들을 처형하는 형무소로 악명 높은 곳이었다. 무엇보다 이곳은 일본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조선인 독립운동가들 다수가 투옥됐던 곳이기도 하다.

도쿄 일대에서 덴노 폭살을 기도했던 김지섭·이봉창 두 의사 역시 이곳에 차례로 수감됐다. 특히 이 의사는 1932년 10월 10일, 이곳에서 교수형으로 뜨거운 청춘을 마감했으니 우리 한국인들에겐 '순국의 성지(聖地)'이기도 한 셈이다.

이치가야 형무소를 거쳐 간 또 다른 독립운동가로는 최근 영화 <박열>로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조선인 아나키스트 박열(1902~1974)이 있다. 영화 속에서 박열(이제훈 분)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 분)의 옥중로맨스가 펼쳐졌던 무대가 바로 이곳 이치가야 형무소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리에 가도 옛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형무소가 있던 자리는 이미 어린이 놀이터로 바뀌어 있었다. 1964년 일본 변호사연합회에서 놀이터 한 켠에 세운 '형사자위령탑(刑死者慰靈塔)'이 아니었더라면 이곳에 형무소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으리라.

그런데 우리 일행이 방문하기 전, 한국인 참배객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왔다 간 흔적이 있었다. 위령탑 앞에 막걸리 두 통이 놓여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흔적은 희미해져도 장소에 얽힌 역사의 기억은 잊히지 않는 법인가보다. 여전히 이곳의 의미를 기억하고 찾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었다.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옛 이치가야 형무소 터
 도쿄 신주쿠에 위치한 옛 이치가야 형무소 터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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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치가야 형무소 터임을 알려주는 '형사자위령탑'
 이치가야 형무소 터임을 알려주는 '형사자위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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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자위령탑 앞에 헌화하는 탐방단 학생
 형사자위령탑 앞에 헌화하는 탐방단 학생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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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취가 올라오는 쓰레기 더미 옆 방치된 위령탑

하지만 뭉클했던 것도 잠시, 이내 착잡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위령탑을 감싸고 있는 담 너머로 쓰레기가 쌓여있었던 것이다. 인근 주택가에서 버린 쓰레기더미 위로 악취가 올라와 참배하는 우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일본 내 한국독립운동의 성지나 다름없는 이치가야 형무소 터가 쓰레기 수거장으로 전락해버린 것을 보니 독립운동가들의 영혼이 죽어서까지 홀대받는 것 같아 딱할 지경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미 작년 봄 한국홍보전문가로 유명한 성신여대 서경덕 교수가 이곳을 다녀갔다고 한다. 당시 서 교수는 형사자위령탑이 쓰레기 수거장 옆에 방치된 실상을 국내 언론을 통해 알리고 관할 지자체인 신주쿠 구청에도 시정 요청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이미 서 교수가 다녀간 뒤로부터 1년이 훨씬 지난 시점이었다. 국내 언론의 조명과 시정 요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바뀐 게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씁쓸함을 느낄 따름이었다.

 형사자위령탑 옆에 방치된 쓰레기 더미
 형사자위령탑 옆에 방치된 쓰레기 더미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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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집단학살의 현장 '아라카와 하천'

이치가야 형무소 터에서의 씁쓸함을 뒤로 한 채, 우리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답사코스인 스미다(墨田)구 아라카와(荒川) 하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 아라카와 하천은 1923년 간토대지진(關東大地震) 당시 조선인을 대상으로 집단 학살이 이뤄진 비극의 현장이다.

1923년 9월 1일, 도쿄를 비롯한 일본의 간토 지역 일대에서 발생한 진도 7.9의 대형 지진은 일본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지진은 대형 화재로 이어졌고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가옥이 불타면서 갈 곳 잃은 이재민들이 길거리를 방황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행방불명된 이들을 포함한 사망자 수만 14만 명, 이재민의 수는 무려 19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재일조선인들에겐 더 큰 불행이 기다리고 있었다.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타개책으로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이다.

이에 분노한 일본인들은 자경단(自警團: 민간이 조직한 자치경찰)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몰려다니며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학살된 조선인의 수는 66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정확한 실상은 아직까지도 규명되지 못하고 있다.

온갖 잔학무도한 방식이 동원된 대학살

우리가 방문한 아라카와 하천 일대는 간토대지진 당시 방수로 개착공사가 한창이던 곳이었다. 공사에 투입된 많은 조선인들이 지진 발생과 함께 자경단의 첫 번째 표적이 됐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자경단은 조선인이라면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 살해했다고 한다. 그중엔 임산부도 있었다.

학살의 방식 역시 온갖 잔인무도한 방식들이 동원됐다. 일렬로 세워놓고 뒤에서 기관총으로 쏴 죽이거나, 일본도·죽창·철봉 등을 이용해 찌르고 베어 죽였다. 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은 구덩이를 파게 한 뒤, 그곳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질러 태워죽이기까지 했다.

학살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한국인 생존자 신창범씨는 "강을 헤엄쳐 도망치는 이들도 있었으나 먼저 헤엄쳐가는 이들이 뒤에서 쏘는 총알에 맞아 가라앉는 것을 보고 헤엄쳐 건너갈 용기조차 꺾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곳 아라카와 하천에서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의 참상을 들으며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 것인가' 한없는 공포감과 무력감, 자괴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이뤄진 장소
 1923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집단학살이 이뤄진 장소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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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의 진상규명 위해 노력하는 '호우센카' 회원들

우리가 현장에 도착하자 시민단체인 호우센카(鳳仙花: 봉선화) 소속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씨와 재일교포 2세인 신민자(愼民子)씨가 친히 마중을 나왔다. 호우센카는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해를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으로 현재 학살 현장 근처에 건물을 매입해 상주하며 현장의 의미를 알리는 노력을 해오고 있다.

점점 거세지는 빗발에도 불구하고 니시자키씨와 신씨는 손수 만든 설명판을 들고서 학살 현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우리에게 이곳 아라카와 하천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인 학살의 실체와 그 진상규명을 위한 일본 사회의 노력에 대해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라카와 하천 일대의 조선인 학살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니시자키 마사오 '호우센카' 대표의 모습
 아라카와 하천 일대의 조선인 학살현장에서 설명하고 있는 니시자키 마사오 '호우센카' 대표의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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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자키씨의 설명에 의하면 '아라카와 조선인 대학살'의 진상이 알려진 것은 무려 60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982년, 한 초등학교 교사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바로 기누타 유키에(絹田幸惠: 1930~2008)씨다.

당시 기누타씨는 학교 수업을 위해 아라카와 하천의 역사를 조사하다가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들이 하천에서 집단학살을 당했다는 증언을 접했다. 그는 곧바로 학살의 진상규명과 유해발굴을 위해 '간토대지진 당시 학살당한 조선인의 유골을 발굴하고 추도하는 모임'을 만들었다. 그해 추도식을 갖고 하천 일대에서 유해발굴조사를 실시했으나 안타깝게도 사람의 뼈를 찾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니시자키 대표가 1982년 유해발굴 당시의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니시자키 대표가 1982년 유해발굴 당시의 사진을 공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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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조사 끝에 학살 당시 일본 경찰이 매장된 유해들을 2번이나 파내 어디론가 옮겼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결국 조선인들의 유해를 영영 찾을 길이 없게 되자, 해당 모임에서는 그 넋이라도 달래기 위해 학살 현장 근처에 봉선화를 심고 추도비 건립을 추진했다. 굳이 봉선화를 심은 것은 일제강점기 당시 작곡가 홍난파가 작곡한 <봉선화>에서 착안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부 당국의 비협조로 인해 추도비 건립은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성금을 모아 학살 현장에서 조금 떨어진 사유지를 매입하여 2009년 그곳에 작은 추도비를 건립했다. 추도비의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1923년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여 일본의 군대, 경찰, 유언비어에 현혹된 민중에 의해 많은 한국, 조선인이 살해당했다. 도쿄의 서민 주거지에서도 식민지 하의 고향을 떠나 일본에 와 있던 많은 사람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귀중한 생명을 뺏기고 말았다. 이러한 역사를 가슴에 새겨, 희생자를 추도하고, 인권의 회복과 두 민족 사이의 화해를 염원하여 이 비를 세운다."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현장이었던 아라카와 하천 인근에 세워진 추도비
 간토대지진 당시 조선인 대학살의 현장이었던 아라카와 하천 인근에 세워진 추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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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도비 옆에 심어진 봉선화와 한글로 적힌 추모글귀
 추도비 옆에 심어진 봉선화와 한글로 적힌 추모글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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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비 바로 옆에는 호우센카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신씨의 안내로 들어간 건물 내부는 우리 일행이 모두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 좁은 공간엔 간토대지진 당시 벌어진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자료들로 빼곡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벽에 걸린 한 장의 사진이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끌었다. 학살 현장에서 풍물놀이를 하는 장면이었다. 알고 보니 신씨는 한국까지 건너가 남도민요를 전수받은 뒤 이곳 현지인들과 함께 해마다 학살 현장에서 풍물놀이를 하며 억울하게 숨져간 이들의 넋을 위로한다고 했다.

 해마다 학살 현장에서 풍물놀이를 하며 추모제를 지내는 모습
 해마다 학살 현장에서 풍물놀이를 하며 추모제를 지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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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우센카 회원인 재일교포 2세 신민자씨
 호우센카 회원인 재일교포 2세 신민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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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일부러 한국 이름을 고집하고 있다는 신씨는 "얼마 전에도 한국인 대학생 한 명이 이곳을 찾아갔다"며 "이곳을 잊지 않고 찾아주는 이들이 있어 고맙다"고 말했다. 실제로 추도비 옆에는 한국말로 '사랑합니다'라는 추모의 글귀가 적힌 노란 띠가 걸려있었다.

우리는 이역만리 먼 땅에서 우리도 잊고 살았던 역사의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과 동시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 일행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양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고개 숙여 절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말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떠나는 탐방단 일행에게 양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호우센카 회원들
 떠나는 탐방단 일행에게 양 손을 흔들어 배웅하는 호우센카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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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귀국길...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깜짝 이벤트

아라카와 답사를 끝으로 일본에서의 답사 일정도 모두 마무리됐다. 아쉬운 마음으로 귀국행 비행기를 타러 나리타공항으로 향하는 우리들에게 예상치 못한 '감동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나자와 지역의 시의원인 모리 가츠토시 의원으로부터 장문의 배웅 문자메시지가 온 것이다. (모리 가츠토시 의원에 대해서는 1부 기사 참조)

"가해자가 가해 사실을 전달하는 것은 갈등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인도주의와 세계시민의식이 아닐까 한다. 한국·중국 친구들과의 만남과 공동의 체험은 미숙한 내게 확신을 가져다주고 있다.

앞서 나는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이 '애국자에게 경의를 표하지만 애국을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않겠다'고 한 연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를 낳아준 여러분과의 교류·연대는 언젠가 반드시 일본시민을 아시아의 진정한 일원으로 이끄는 날이 오도록 만들어 줄 것이다."

앞서 그는 가나자와의 윤봉길 의사 암장지적비 앞에서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고개 숙여 사죄하며 깊은 감동을 안겨준 바 있다. 그가 보낸 문자메시지는 아쉬운 마음으로 떠나는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감격을 선사했다. 한·일 양국의 화해와 미래를 다짐하는 모리 의원의 문자메시지는 이번 탐방의 마침표나 다름없었다.

새로운 화두를 가지고 시작한 또 다른 여정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잠시 눈을 감고 지난 4박 5일을 돌아봤다. 앞서 나는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라는 화두가 안겨주는 무게에 적잖은 부담을 느꼈노라 고백한 바 있다. 그러나 이번 탐방을 마무리하면서 나는 나름대로 그 화두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았다.

사실 이번 탐방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나의 감정은 맹목적인 적대감에 가까웠다. 역사 속에서 일본은 늘 우리 민족을 침략하고 수탈한 가해자였으며,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역사적 과오를 반성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분별한 반일감정에 휩싸였던 나는 일본과 일본인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일본의 양심과 지성들은 일본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심각하게 기울어져 있음을 깨닫게 만들었다. 그들은 국적을 초월한 채 인류의 양심에 기대어 자신들의 조상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를 앞장서 비판하고 있었다. 기울어진 사회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의 양심세력을 보면서 무분별한 적대감을 '애국주의'로 착각한 채 당당하게 주장해온 내 스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윤봉길 의사 순국기념비 앞에서 촬영한 단체사진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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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번 탐방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은 일본의 그릇된 정치와 민중은 구분할 줄 알아야 하며, 여전히 남아 있는 일본의 양심세력과 함께 손을 잡고 한·일 양국의 화해와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런 점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 것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답은 찾았지만, 이제는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새로운 화두가 주어진 셈이다. 한·일 양국의 화해와 미래라는 목표를 위해 과연 내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이 있을까. 이제부터는 그 답을 찾기 위한 새로운 여정이 시작된 셈이다.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에 많은 사랑 보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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