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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9시를 넘기며 행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 늦은 시간까지 중년의 관람객들이 다수였고, '호응'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 피날레를 장식한 YB(윤도현 밴드) 밤 9시를 넘기며 행사는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 늦은 시간까지 중년의 관람객들이 다수였고, '호응'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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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20년도 더 지난 대학 시절, 친구 따라 얼떨결에 놀러 간 경험이 전부인지라, 쉰 살을 코앞에 둔 지금 음악도 조명도 '젊은' 록 페스티발(록페)을 찾아간다는 게 무척 어색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걸 그룹의 말랑말랑한 노래와 춤에 빠져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려니, 중간에 집에 가자고 떼쓰면 어쩌나 싶어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록페를 홍보하는 포스터를 보고는 되레 설레하며 흔쾌히 길을 따라나섰다. 여러 방송사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봤다면서 곡은 몰라도 그들의 이름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는 음악의 장르는커녕 가수인지 아닌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TV에 나오는 유명 연예인을 직접 만나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기부여가 된 셈이다.

어느덧 중년이 된 아내와 난 푸르렀던 청춘의 시간을 회상하며 기꺼이 지갑을 열었다. 이어 날씨 정보도 확인하고 짐을 꾸렸다. 비옷과 우산, 모자, 돗자리 등을 배낭에 넣었고, 땀수건과 얼린 물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한여름 밤이니만큼 바르는 모기약까지도 빼먹지 않았다. 어린 시절 소풍 가는 전날 밤의 설레는 마음이 이랬을까.

비가 '오락가락' 내려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일찌감치 인근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종종 셔틀버스가 갇힌 신세가 되기도 했다.
▲ 주차장으로 변한 행사장 가는 길 일찌감치 인근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종종 셔틀버스가 갇힌 신세가 되기도 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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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오후, 전남 구례의 한 생활협동조합이 주최한 록페를 찾았다. 휴가철 관광객을 불러 모으려는 지역 단위의 축제는 숱하지만, 이번처럼 인적조차 드문 궁벽한 시골에 국내의 내로라하는 록 뮤지션들이 총출동하는 경우는 드물지 싶다. 올해로 불과 세 해째라는데, 광주 전남 지역의 대표적인 록페로 자리를 잡았다. 과연 지리산의 너른 품 안에서 펼쳐지는 록은 어떤 색깔일까.

날씨 예보대로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다. 광주에서 구례로 가는 고작 한 시간 남짓의 고속도로 위에서도 비가 흩뿌렸다 개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와락 쏟아지는 큰비만 아니면 행사가 취소되지는 않을 테고, 야외 행사인 만큼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맑은 날씨보다 조마조마할지언정 먹구름 짙게 낀 흐린 날이 차라리 더 나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 삼으며 차를 몰았다.

내비게이션엔 아직 3km도 더 남았는데, 도로 위의 차들이 멈춰 서버렸다. 군데군데 경찰이 서 있었지만, 밀려드는 차의 행렬에 속수무책인 듯 보였다. 왕복 2차선의 도로의 한쪽 차선은 일찌감치 주차장이 돼 버렸다. 심지어 경운기 한 대 간신히 지나갈 법한 농로 위까지 외지인들의 차들로 가득했다. 인근 지역과 행사장을 연결하는 셔틀버스조차 주차된 차들에 에워싸여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종종 연출됐다.

노변에 차를 버려두듯 세워놓고 걸어야 했다. 그나마 이따금 비가 흩뿌리고 종일 구름이 해를 가려선지 아스팔트가 달궈지진 않았다. 먼발치의 행사장을 등대 삼아 걷는 30분 남짓은 힘들고 귀찮다기보다 마치 연인을 만나러 가는 길처럼 설레는 시간이었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음악소리와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북적임이 어서 오라는 환영인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오후 5시. 이미 잔디 깔린 행사장은 발 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사람들로 가득 찼다. 무대 가까운 곳은 말할 것도 없고, 입장권을 판매하는 부스 안팎으로부터 평상시라면 차가 오갔을 도로 위까지 인산인해였다. 전남 구례의 인구가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라도, 당일 록페를 보기 위해 행사장 주변에 모인 외지인들이 그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땡볕에 맞서 잔디밭 한가운데에 돗자리를 편 사람들의 모습에서 록페를 보기 위해 모인 이들의 열정을 본다. 무대 앞은 종일 서서 관람하려는 열성 팬들의 차지이고, 그들을 에워싸듯 '돗자리 부대'가 부채꼴 모양으로 진을 쳤다. 한 번 그들에게 갇히면 화장실 드나드는 일도 여간 만만치 않다. 아닌 게 아니라, 출연진이 교체되는 막간마다 거대한 '엑소더스'의 장관이 연출됐다.

가족 단위 관람객, 20대보다 60대가 더 많아 보일 정도

그룹 부활의 등장으로, 대낮부터 행사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 발 디딜 틈 없는 행사장 그룹 부활의 등장으로, 대낮부터 행사장은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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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의 비트는 거침이 없었고, 조명은 음악을 더욱 부추겼다. 사람들의 몸은 자연스럽게 반응했고, 그들의 '떼창'은 스피커의 음량에 맞설 만했다. 사람들의 팔은 무언가를 경배하듯 하늘로 뻗었고, 머리는 상하좌우 마음대로 흔들리며 제자리를 잃었다. 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출근길 만원 지하철에 몸 부비며 끼워 타듯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어두워지면서 더위는 한풀 꺾였지만, 열기는 점점 뜨거워져만 갔다. 드럼의 육중한 비트에 가슴이 덩달아 요동쳤고, 베이스 기타 줄의 오랜 떨림은 곡이 끝날 때까지 귓전에 머물렀다. 현란한 악기 연주에 노랫말이 묻혀도 상관할 바 아니었다. 어차피 록에서 보컬이란, 여느 장르와는 달리 음악을 완성하는 기타나 드럼 등과 같은 하나의 도구일 뿐일 테니까.

무대 주변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오후 9시. 록페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장장 6시간의 스탠딩 공연이라 다들 지칠 법도 하건만, 사람들의 얼굴에서 피곤한 기색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함께 간 두 아이도 내내 서 있었지만 힘들다는 불평 한마디 꺼내지 않았다. 박수를 치고, 소리를 지르는 건 아이와 어른이 따로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주위 사람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까지 옆에 누가 서 있는지도 모를 만큼, 눈과 귀는 오로지 무대를 향해 있었다. 분위기에 흠뻑 취한 나머지 갈증과 허기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저녁 7시경 끼니를 거르기 싫어 부러 찾은 행사장 옆 식당은 대목일 텐데도 생각만큼 붐비지 않았다. 짐작컨대, 다들 록페의 순간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낯설었던 건, 떠나기 전 대부분일 거라고 여겼던 젊은이들은 보이지 않고, 우리처럼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과 앳된 중학생들이 광장을 독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20대보다 차라리 60대의 어르신들이 더 많아 보이기까지 했다. 깃발을 세워 들고 찾아온 팬클럽 회원들을 제외하면, 20대는 행사 로고를 새긴 노란 유니폼을 맞춰 입은 자원봉사자들이 전부라고 할 만큼 적었다.

아마도 접근성이 떨어진 탓일 게다. 광주, 순천, 남원 등 주변 도시에서 수차례 셔틀버스를 운행했다고는 하지만, 대도시에서 먼 데다 대중교통편도 마땅치 않아 자가용 없이는 쉽게 찾아올 수 없었을 테다. 더욱이 밤늦게 마무리되는 행사다 보니, 인근에서 하루 묵을 요량이 아니라면 귀갓길이 막막할 수밖에 없다. 애초 지역주민과 가족 단위의 관람객들을 위한 행사로 계획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관람객들의 '호응'은 젊은이들 못지않았다. 현란한 비트에 몸을 맡긴 채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머리 벗겨진 아저씨와, 어린 딸과 나란히 서서 팔을 치켜든 채 소리를 지르는 중년의 아주머니가 한데 어우러졌다. 또, 록으로 편곡된 트로트가 나오자 반색하며 따라 부르는 어르신들의 노랫소리가 앳된 중학생들의 카랑한 목소리와 섞이며 묘한 화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막대 과자를 입에 문 채 곤히 잠든 서너 살배기 아이 옆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젊은 엄마의 얼굴엔 행복이 가득하다. 또, 손자뻘 되는 아이 옆에서 함께 야광봉을 흔들며 함성을 내지르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이곳에선 어색하지 않다. 록 음악과 함께하는 한여름 밤의 페스티발은 그렇듯 남녀노소의 벽을 허물어내며 지리산 자락에 울려 퍼졌다.

록페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는 오랜 편견, 마침내 깨졌다

YB(윤도현 밴드)는 노래하는 도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흑백영상과 영화 <박하사탕> 속 장면들을 배경화면으로 보여주었다. 강렬한 비트와 어울리며 큰 감동을 자아냈다.
▲ 록과 5.18의 만남 YB(윤도현 밴드)는 노래하는 도중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의 흑백영상과 영화 <박하사탕> 속 장면들을 배경화면으로 보여주었다. 강렬한 비트와 어울리며 큰 감동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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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리 모두는 나이와 상관없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록 스피릿' 운운하며 무게를 잡지만, 어차피 음악은 완성된 후부턴 작곡가나 가수, 평론가입네 하는 사람들의 것이 아니라 듣는 이들의 몫일 테니, 괘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남녀노소가 함께 어우러져 '날뛰는' 모습을 통해 록페가 젊은이들의 전유물이라는 오랜 편견이 이내 깨져버렸다.

행사는 밤 11시가 다 되어서야 끝났다. 예정 시간보다 한 시간 가까이 늦어진 것이다. 차를 세워둔 곳까지 왔던 길을 삼삼오오 다시 걸으며 사람들은 관람 후기를 쏟아냈다. 가수와 곡들에 대한 품평부터 행사 진행에서 아쉬웠던 점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왔지만, 공통된 게 하나 있었다. 지방의 소도시일수록, 국가의 지원을 통해서라도 이런 행사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그것이다.

가수야 TV를 통해 보면 되고, 노래야 스마트폰 하나면 언제 어디서든 쉽게 들을 수 있지만, 이번처럼 지역주민과 외지인들이 남녀노소 광장에 한데 모여 어우러지는 기회는 드물다는 것이다. 모든 게 서울과 대도시 중심인 현실에서 특화된 록페는 지방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용한 도구일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구례' 하면, 당장 지리산을 떠올리지만, 요즘 들어선 록페를 말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렸다는 한 분은 이번 록페가 '체면의 해방구'였다며, 어디서 이렇게 '주책없이' 놀 수 있겠냐며 반문했다. 음악에 몸을 내맡긴 채 팔을 뻗어 앙코르를 외치는 낯선 내 모습을 떠올리며, 그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결혼한 지 17년이나 됐지만, 아내의 춤추는 모습도 처음 봤다. 그에게도, 중년의 아내와 내게도 아직 '청춘'이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던 거다.


태그:#록페스티발, #구례, #아이쿱생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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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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