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 감독이 이끄는 남자농구 대표팀이 2017 FIBA 아시아컵을 최종 3위로 마감했다. 대표팀은  21일 새벽(한국시간) 레바논 베이루트서 열린 대회 3,4위전에서 뉴질랜드를 80-71로 제압하며 동메달을 따냈다.

2년전 창사 아시아선수권(아시아컵 전신)에 6위에 그치며 각종 구설수까지 겹쳐 체면을 구겼던 한국농구는 이번 대회에서 어느 정도 자존심을 회복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1997년 이후 20년만의 정상탈환은 이번에도 실패했지만  한국은 뉴질랜드를 두 번이나 제압했고 '천적' 이란을 상대로도 선전하는 등 최근 10여년간을 통틀어 홈을 벗어난 국제대회에서 가장 뛰어난 경기력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가오는 11월 농구월드컵 아시아예선 홈앤드 어웨이전을 앞두고 '아시아 강호'로서의 위상회복과 '세대교체'의 희망까지 찾았다는 평가다.

이번 대표팀이 이전과 가장 차별화될 수 있었던 부분은 역시 '전임감독제' 효과를 빼놓을수 없다. 한국농구는 2000년대 중반 대표팀 전임감독제를 시도하려 했으나 협회의 예산과 지원 부족으로 유명무실해졌고 결국 프로리그(KBL) 우승팀 감독이 국제대회 때마다 대표팀을 겸임하는 구조로 회귀했다. 가뜩이나 부실한 지원 속에 프로리그 장기레이스를 마치고 지친 선수들이 손발을 맞출 시간도 부족한 상황에서 감독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많지 않았고, 이는 국제대회에서의 성적 부진이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 농구협회는 지난해 후보 경선을 거쳐 '농구대통령' 허재 감독을 새로운 사령탑으로 선임하며 2007년 김남기 전 감독 이후 8년만에 전임감독제를 부활시켰다. 허재 감독은 KCC 사령탑 시절이던 2009년과 2011년에 이어 세 번째 대표팀 감독 선임이었다.

허재 감독은 대표팀 사령탑 취임 이후 지난 1년여간 동아시아선수권-윌리엄존스컵-평가전 등을 통하여 조직력을 가다듬으며 조금씩 전력을 끌어올렸다. 양동근, 조성민, 문태종, 김주성 등 2014 인천 아시안게임 우승의 주역들이 노쇠하거나 대표팀을 잇달아 은퇴하면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의 분위기가 형성했다. 이번 아시아컵 대표팀의 경우, 갓 30대에 접어든 87년생 오세근과 이정현이 최고참이었고, 90년대생이 8명, 평균 연령이 26세일 정도로 팀이 젊어졌다.

이번 대회를 앞두고 한국은 4강을 목표로 했지만 전망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았다. 기존의 중국과 중동세는 물론이고 상승세의 일본과 필리핀, 새롭게 아시아 무대에 편입된 오세아니아의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그야말로 만만한 팀이 없어보였다. 두드러진 대형 스타가 없는 한국농구는 일각에서는 '최약체'가 아니냐는 우려까지 나왔고, FIBA의 대회 전망에서도 '더 이상 강호가 아니'라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야했다.

하지만 허재호는 세간의 섣부른 예상을 보란 듯이 극복했다. 한국은 C조 조별리그 첫 경기에서 홈팀 레바논(66-72)에 석패하며 불안하게 출발했으나, 카자흐스탄(116-55)과 뉴질랜드(76-75)를 잡고 1라운드를 통과했고, 12강에서는 불리한 오심을 극복하고 일본(81-68)을 물리쳤고 8강에서는 D조 1위 필리핀(118-86)을 무려 32점차로 완파하며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준결승 이란전(81-87)은 가장 아쉬웠지만 동시에 희망을 남긴 경기였다. 한국은 이번 대회 MVP이자 국제무대에서 여러 번 한국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이란의 센터 하메드 하다디를 성공적으로 틀어막으며 경기 종반까지 대등한 승부를 펼쳤다. 국제대회 경험이 아직 많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 오히려 빅매치에 주눅들지 않는 배짱을 선보인 것은 고무적인 대목이었다. 한국은 3.4위전에서 뉴질랜드를 꺾으며 결승 진출 좌절의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만회하고 11월부터 농구월드컵 예선전을 대비한 기선 제압에 성공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농구대표팀은 이번 대회에서 페이스(Face) & 스페이싱(Spacing)이라는 한국농구만의 확고한 색깔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3점슛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양궁농구'는 높이의 열세를 안고 있는 국제대회에서 한국의 전통적인 트레이드 마크였지만 이번 대표팀은 여기에 빠른 템포의 패싱게임과 변칙적인 수비 전술로 팀플레이의 완성도를 높였다. 개인의 볼소유시간을 최소화하고 선수 전원이 볼없는 상황에서도 활발한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출하는 플레이는 NBA(미프로농구)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한국 버전을 연상시켰다는 평가다. 3점슛과 공간의 역할이 강조되는 현대농구와, 한국처럼 '스몰 라인업'이 불가피한 단신팀에 최적화된 플레이스타일이었다.

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경기당 88.3점으로 우승국 호주(92.5점)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득점을 기록했다. 야투 성공률(50.7%)이 5할대를 넘긴 팀도 한국과 호주 뿐이다. 3점슛 성공률(41.7%)도 일본(43.2%) 다음으로 좋았다.  리바운드는 10위(35.4%)에 그쳤지만 어시스트는 26.4개로 전체 1위, 가로채기는 9.1개로 4위를 기록했다. 반면 턴오버는 경기당 13개로 참가국(12강 기준)중 세 번째로 낮았다. 어시스트당 턴오버 비율이 2.0개였다. 한국이 높이의 열세를 정확한 슛과 효율적인 패싱게임으로 극복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특히 그동안 210cm 이상의 장신 빅맨이 전무한 한국이었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상대국과의 골밑싸움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

대회 베스트 5에까지 선정된 오세근(16점, 5.7리바운드, 야투율 62.3% 48/77)을 필두로 '하다디  킬러'로 맹활약한 이승현(8.6점, 3.4리바운드 야투율 61.5% 24/39, 3점슛 50% 7/14), 호쾌한 운동능력과 덩크슛을 여러 차례 보여준 김종규(7.6점. 2.4리바운드), 블록슛의 달인 이종현(6.5점, 3.3리바운드) 등이 모두 고르게 제몫을 해줬다.

이번 대회에서 가드로 활용된 2미터의 장신 스윙맨 최준용(5.9점, 3.6리바운드. 3.7어시스트)을 앞선에 세운 변형 드롭존 수비도 장신팀들을 압박하고 골밑 열세를 만회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반드시 키가 크지 않아도 빅맨들의 기동력과 중장거리 슈팅 능력 등 다양한 역할을 요구하는 현대농구의 트렌드에 잘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준 한국 빅맨진이었다.

또한 이번 대회 한국의 또다른 강점은 주전과 벤치의 격차가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주전 가드 김선형(12.1점, 3.4리바운드. 4.6어시스트) 외에도 허웅(9.9점 3점슛 47.1% 16/34 평균 15.7분), 전준범(7점. 3점슛 46.7% 14/30 평균 15.2분) 박찬희(2.4점, 2.1리바운드. 5어시스트 평균 8.7분) 등 돌파와 허슬에 능한 젊고 역동적인 백코트진의 활약이 돋보였다. 평균 출전시간이 15분 이하에 그친 식스맨들이 짧은 시간에도 엄청난 폭발력을 보여주며 부진하던 경기흐름을 반전시키는 장면이 많았다.

다만 대표팀의 해결사로 기대했던 이정현(7.4점, 3점슛 31.6% 턴오버 1.6개)과 장신슈터 임동섭(4.8점,2.3리바운드)의 부진은 아쉬움을 남겼다. 국제대회에서 포지션 대비 부족한 스피드와 수비 능력등 KBL 스타일에만 최적화된 한계가 두드러졌다는 평가다. 유일한 대학생 선수였던 양홍석(4경기 평균 4.5분, 평균 3점)은 쟁쟁한 프로 선배들의 아성에 가려 출전시간 자체가 거의 없었다.

비록 올림픽·월드컵 예선티켓이 걸리지않은 이번 아시아컵이 예전보다 위상이 낮아졌다고 하지만 2020 도쿄올림픽 본선진출을 노리는 한국농구로서는 일종의 전초전으로서 아시아 강호들을 상대로 경험과 자신감을 쌓을수 있는 귀중한 계기가 되었다. 한동안 국제무대에서 동네북 신세를 면치 못하며 팬들로부터 많은 실망감을 자아냈던 한국농구지만, '충분한 지원과 준비'만 뒷받침된다면 아직도 아시아에서 한국을 무시할수 있는 팀은 없다는 것을 증명해낸 게 최대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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