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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급식을 먹은 추억이 있을 것이다. 급식을 받으면 마시듯 순식간에 해치웠는데, 쇠도 씹어 먹을 나이인지라 배가 안차 곧장 매점에 가곤했다. 그러다 생각해낸 묘수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에 밥을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밥 먹고 떠난 급식소에는 남은 반찬이 수북했다. 아주머니들은 식판에 반찬을 양껏 담아주셨다. 특히 인기메뉴인 스파게티가 나오는 날에는 식판에 스파게티만 한가득 받기도 했다.

이게 급식에 나왔더라면...

도쿄 무사시노시 키치죠의 '카야시마'에서는 학생 시절의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오후 2시가 조금 안 돼 식당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섰다. 따뜻한 주황색의 아늑한 조명을 받으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자리에 앉았다. 다방에 있을 법한 의자였다.

오래된 스피커에선 캐나다의 재즈 피아노 연주가이자 가수인 Diana Krall의 'Little Girl Blue'가 흘러나왔다. 벽면에는 사진액자, 손으로 적은 메뉴, 연예인들의 사인이 붙어있었다. 식당은 테이블 15개 정도로 손님 40여 명을 동시에 받기에 무리가 없었다. 맞은편 자리에 앉은 50대 중반의 아저씨는 식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카야시마 내부 전경. 밥 먹고 졸고있는 손님도 있다.
 카야시마 내부 전경. 밥 먹고 졸고있는 손님도 있다.
ⓒ 임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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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판을 받자마자 고민할 것도 없이 '와꾸와꾸(두근두근) 세트'를 오오모리(곱배기)로 주문했다. 세트는 메인 메뉴와 사이드를 한 가지씩 고를 수 있는데, 나폴리탄과 햄버그를 골랐다.

나폴리탄은 익숙한 케첩 맛이다. 면, 케첩, 베이컨, 피망, 양파 등 평범한 재료만을 썼는데도, 함께 먹으면 입안에서 이탈리아 축제가 열린 것 같았다. 면도 충분히 익어 부드러웠다. 따라 나온 파마산 치즈를 뿌리니 붉게 물든 늦가을 산에 하얀 눈이 소복이 내린 듯했다.

카야시마의 '나폴리탄산'에 눈이 내렸다.
 카야시마의 '나폴리탄산'에 눈이 내렸다.
ⓒ 임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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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도 가격도 착한 곳

이름만보면 이탈리아 나폴리가 원조일 것 같지만 일본 음식이다. 주일미군들이 먹던 스파게티가 기원이다. 태평양 전쟁 종전 직후 주둔군들의 식량으로 대량의 파스타와 토마토 케첩이 들어왔는데, 미군들이 물에 대충 삶은 면을 케첩에 비벼먹었다고 한다. 이를 본 한 일본인 요리사가 직접 토마토 소스를 만들고 양파와 버섯 등 각종 재료를 넣어 만든 것이 나폴리탄이다.

햄버그는 언뜻 보면 '에계, 크기가 겨우 이정도야?' 할 수 있지만, 3~4cm 정도로 두툼해 사이드 메뉴로서 나폴리탄을 돕기엔 충분했다. 충분히 다진 고기라 입안에 넣으면 부드럽게 씹힌다. 데미그라스 소스도 달짝지근해 햄버그와 어울렸다. 같이 나온 담백한 미소시루를 한 숟갈 먹으니 입안이 말끔해졌다.

카야시마의 런치 메뉴 안내판. 정말 싸다.
 카야시마의 런치 메뉴 안내판. 정말 싸다.
ⓒ 임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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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팀가량이 다녀갔지만 와꾸와꾸 세트를 시킨 사람은 나뿐이었다. 저마다 다양한 메뉴를 시켰다. 오므라이스와 카츠카레를 보니 침이 꼴깍 넘어갔다. 메뉴가 많아 '햄릿 증후군'이 생길 것 같은 이곳은 42년 전 커피 전문점으로 문을 열었다. 식사와 술도 팔고 심지어 가라오케도 겸했다.

가격도 착한편인데 와꾸와꾸 세트는 980엔으로 부담스럽지 않다. 식후음료까지 포함해서다. 보통, 오오모리, 가장 양이 많은 야야오오모리 모두 가격이 같다는 사실도 놀랍다. 싸고 양 많은 곳을 찾는다면 카야시마가 정답이다.

씹으면 "바삭"... 육즙은 "팍"

든든히 먹고 나와 키치죠지 상점가에서 산책하는데 사람들이 길게 줄 서 있었다. 헤아려보니 족히 60여 명. 멘치카츠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것이었다. 멘치카츠는 다진 소고기를 각종 채소와 함께 버무려 튀긴 음식이다. '스테이크 하우스 사토우'에서는 '원조 멘치카츠'를 1개 240엔에 팔고 있었다. 5개 이상을 사면 하나에 200엔으로 쳐 주는 서비스도 했다.

사토우의 '원조 멘치카츠'. 속이 꽉찼다.
 사토우의 '원조 멘치카츠'. 속이 꽉찼다.
ⓒ 임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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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우의 멘치카츠는 묵직하다. 바삭한 튀김을 씹으면 육즙이 뿜어져 나온다. '이것이 멘치카츠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가게 앞에서는 갓 나온 멘치카츠를 먹는 사람들로 여기저기서 "바삭"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 옆에서 먹던 사람도 '오이시(맛있어)'를 외쳤다. 이 바삭한 멘치카츠를 사려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이곳은 영화 <구구는 고양이다>에도 나왔다. 주인공들이 멘치카츠를 한 입 베어 물고 행복해하는 표정이 압권이다. '스테이크 하우스 사토우'는 1층은 정육점으로 생고기와 돈카츠나 멘치까츠 같은 튀김류를 판다. 2층은 식당으로 운영하니 멘치카츠로 살린 입맛을 2층에서 이어가도 좋을 듯하다.

쿠로텐동의 맛은 씁쓸했다

멘치카츠를 먹자 튀김이 더 먹고 싶어졌다. 첫날 못 먹은 쿠로텐동을 먹기 위해 도쿄 주오구 니혼바시닌교초로 갔다. 이번에는 닌교초역이 아닌 스이텐구마역에서 내렸다. 그래도 길 찾기 어렵기는 마찬가지. 10여 분을 헤매다 길 가던 시민에게 길을 물었다. 자신도 잘 모르는 듯 했지만, 건네준 약도를 보며 식당으로 데려다줬다. 가는 길 반대 방향인데도 친절하게 안내했다.

5분 만에 다다른 '텐푸라 나카야마.' 그런데 한창 장사해야 할 시간에 가게 불이 꺼져있었다. "아, 오야스미데스네(아, 휴가네요)." 이게 뭐람. 금요일에도 허탕을 쳤는데 오늘도 먹지 못하게 됐다. 문에 붙은 종이를 보니 17일부터 영업을 재개한다고 돼있었다.

나만큼 안타까워하는 그를 감사인사와 함께 보내고 나니 남자 셋이 캐리어를 끌고 왔다. 나고야에서 친구들과 여행 온 오시로(24)씨는 "친구가 맛있다고 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는 굳게 닫힌 가게 문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묵직한 캐리어를 끌며 돌아가는 세 남자의 뒷모습이 처량했다.

굳게 닫힌 텐푸라 나카야마의 문. 휴가 간다는 안내말이 외로이 걸려있다.
 굳게 닫힌 텐푸라 나카야마의 문. 휴가 간다는 안내말이 외로이 걸려있다.
ⓒ 임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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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없는 탄탄멘의 맛은?

쿠로텐동을 먹지 못한 한을 매운 음식으로 풀기 위해 도쿄 도시마구 니시이케부쿠로에 탄탄멘을 먹으러 갔다. 저녁 7시 반에 도착한 '중국가정요리 양 2호점'에는 사천식 중화요리를 먹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5분 정도 기다리다 카운터석에 자리를 잡았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주문에 다섯 평 남짓한 주방에서 남자 직원 넷이 쉴새없이 움직였다. 그들은 말없이 재료를 씻고 볶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중국인인데 주문은 일본어로 받고 그들끼리는 고향말로 얘기하는 모습이 이색적이었다.

이곳의 주력 메뉴인 시루나시 탄탄멘(국물없는 탄탄면)과 야끼교자(일본식 군만두) 그리고 나마비루(생맥주)를 시켰다. 탄탄멘은 국물이 없어서 그런지 굉장히 뻑뻑했다. 면과 면이 들러붙었다.

양념은 붉지만 그다지 맵지는 않았다. 삼키고 나면 매우면서 아린 맛이 뒤에 남았다. 돼지고기 다진 것, 청경채, 땅콩 등이 함께 토핑으로 올라왔다. 야끼교자는 '보름달 빵'같은 튀김에 만두 몇 개가 숨어있었다. 한 면은 군만두이면서 반대쪽은 물만두였다. 흑식초에 고추기름을 넣은 장에 찍어먹으니 맥주가 더 당겼다.

나올 땐 하얗지만, 면 아래 깔린 양념과 함께 버무리면 이렇게 된다.
 나올 땐 하얗지만, 면 아래 깔린 양념과 함께 버무리면 이렇게 된다.
ⓒ 임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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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명쯤 되는 손님들은 대부분 탄탄멘과 야끼교자에 칭따오 맥주를 곁들여 먹고 있었다. 마파두부에 밥을 먹으며 배를 든든히 채우는 사람도 있었다. 내 옆의 30대 커플은 마파두부와 탄탄멘을 헤치우고 야끼교자를 먹기 시작했다. 가게는 술 마시는 손님들로 흥이 올라 시끌벅적했다. 비 내린 월요일. 그들은 월요병을 술과 매운 사천요리로 치유하는 듯했다.

덧붙이는 글 | '아, 배고프다.' 식욕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것이야 말로 최고의 행복입니다. 임형준 기자는 8월 11일부터 17일까지 6박 7일 동안 도쿄를 여행하며 보고 먹고 느낀 점을 씁니다. 일본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처럼 맛집을 찾아다닙니다. '고독한 대식가'가 되어 먹고 싶은 음식을 즐기며 도쿄를 맛봅니다.



태그:#고독한 미식가, #고독한 대식가, #도쿄, #나폴리탄, #탄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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